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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9)화 (278/1,192)

제279화

사실 그녀에게 방보다 더욱 중요한 곳은 부엌이었다. 먹는 것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부엌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회림각의 부엌만큼 크진 않았지만 남월각의 부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환기도 잘 되고 채광도 좋았다. 커다란 아궁이에 걸린 번쩍이는 솥을 보고 기뻐할 월향이 눈에 선했다.

측간도 방에서 멀지 않았다. 거의 쓰지 않았는지 제법 깨끗했다. 아래쪽에는 볏짚을 태운 재가 깔려 있었고, 구석에 향긋한 말리꽃 향이 피워져 있었다.

더욱더 마음에 든 장소는 목욕간이었다. 무려 온천탕이 있었다. 목욕간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수증기가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탕도 제법 커서 몇 사람이 들어갈 만큼 넉넉해 보였다.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목욕할 수 있도록, 잘 꾸며진 목욕간이었다.

백천범은 나중에 두 시녀와 함께 목욕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로 등도 밀어주고 물싸움도 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본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월향과 월규에게 별장에서 본 것들을 전부 말해 주었다.

얌전한 성격의 월향은 듣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월규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한 번도 온천을 본 적 없었던 터라 궁금함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곧장 보러 가야겠다며 떠드는 월규의 반응에 백천범은 두 시녀를 데리고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두 시녀도 만족스러워했다.

월규가 온천탕을 보며 말했다.

“역시 저택보다 훨씬 좋습니다.”

백천범이 옆에 있던 월향에게 물었다.

“월향이 너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는 더 즐겁게 지낼 수 있겠어요.”

백천범이 문밖을 힐끗거리더니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춥다. 안으로 들어가자.”

별안간 뾰로통해진 왕비의 태도가 의아했던 월규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왕비 마마,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십니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백천범이 창문을 꼼꼼히 잠그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보였다.

“왕야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우리를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고? 왜 문 앞에 병사를 잠복시키셨담?”

월규가 창문 틈새로 밖을 바라보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병사요? 개미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는걸요.”

백천범이 우스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월규 네가 볼 수 있으면 잠복이 아니지.”

“마마께서는 어찌 아셨습니까?”

“나는 좀 전에 봤어.”

“마마께서는 보실 수 있는데 소인은 어찌 볼 수 없단 말입니까?”

백천범이 활짝 웃더니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내 눈이 매의 눈이거든. 눈앞에 날아다니는 모기가 수컷인지 암컷인지도 알 수 있는데, 사람을 못 볼까 봐?”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월규는 다시 창문 틈새로 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아도 월규의 눈에는 컴컴한 정원만이 들어왔다.

“왕비 마마께서 잘못 보셨겠지요.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인다니까요.”

“못 믿겠으면 내기하자. 많이는 못 걸고, 십 문전 어때?”

십 문이라면 월규도 내놓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월규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돈은 여기에 두지요. 소인이 먼저 밖에 나가 보겠습니다. 누군가 절 잡으러 온다면 이 돈은 마마께서 가지세요.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마마께서 제게 십 문전을 주셔야 합니다. 월향이 증인이니 나중에 말 바꾸시면 안 됩니다.”

“좋아. 한번 가 봐.”

백천범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월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정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백천범과 월향은 문 앞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월규를 가로막지 않았다. 월규는 저 멀리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무 앞까지 걸어가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데 어디에 사람이 있단 말인가?

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만 패배를 인정하시고 주십시오.”

백천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그리 급해. 나만 감시하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나가서 살펴볼게.”

월규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러시든가요. 어쨌든 십 문전은 제가 갖게 되겠죠.”

뒤이어 백천범이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며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그녀의 직감은 누구보다 예리하지 않은가. 주변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걸 막으려고 보낸 게 아니라면, 묵용감은 무엇 때문에 병사를 매복해 두었단 말인가?

백천범이 방으로 돌아오자 월규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셨죠? 어서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 월규 네가 이기면 당연히 줄 거야.”

백천범의 얼굴은 미심쩍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우릴 지켜보고 있어.”

월규가 백천범에게 핀잔을 주었다.

“안 주시려고 둘러대시는 것 아닙니까?”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저녁에 한 번 더 나가 봐야겠어. 아무도 없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질게.”

월향이 그녀의 거친 말에 서둘러 월규에게 눈짓을 보냈다.

“밤에 다시 확인해 보면 되잖아. 왕비 마마께서 고작 십 문전을 떼어 가시겠어?”

월규도 더는 따져 묻지 않고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 십 문전 받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군요.”

백천범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너무 자신만만하지 말라고. 네가 이길 일은 없을 테니까.”

* * *

묵용감이 침대에 눕자 녹하는 등불을 끄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침대 주위에 장막이 드리워지니 그만의 세상이 펼쳐졌다. 묵용감은 어둠에 잠겨 멍하니 침대 꼭대기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몰아쳐, 쉬이 잠들 수 없었다.

그때, 가볍고 느린 발소리가 들려왔다. 묵용감은 녹하와 기홍의 발소리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두 시녀가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그는 등불을 켜고 도포를 걸친 뒤 장막을 걷고 나왔다.

침소에 들어온 황보주아가 침대 옆에 서 있는 묵용감을 마주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 어, 어찌 아직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묵용감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모습만 유심히 살폈다. 걸치고 있는 진줏빛 피풍 장옷은 매우 얇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피풍 장옷의 끈을 꽉 붙잡아 몸을 가렸다. 그 상태로 주저하던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묵용감이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늦은 시간인데 어찌 날 찾아온 것이냐?”

황보주아는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어느덧 목덜미까지 새빨개졌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피풍 장옷의 매듭을 풀었다. 피풍 장옷이 흘러내리고, 새하얀 중의 속적삼이 드러났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오, 오늘 밤, 이곳에서 묵고 싶습니다.”

한때는 대갓집 규수였던 그녀다. 부끄럽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일은 처음 해 보았고,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한 가지 확신이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묵용감이 그녀를 원하고 있다고, 그녀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지 않았던가.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병권을 내놓을 만큼 그녀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남녀 간의 정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 그가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잡을 줄 알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눈앞에 서 있는 사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가 슬쩍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예상과 달리 조용히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주아야, 이게 무슨 짓이냐?”

황보주아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쏟아질 듯한 눈물을 참으며 더듬거렸다.

“저, 저는 그저, 오라버니가 기뻐하실 줄 알고, 저는…….”

“돌아가거라.”

그가 차분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우리는 혼사도 치르지 않았다.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면, 모두에게 좋을 게 없다.”

“그렇담, 우린 언제, 그러니까, 제 말은…….”

묵용감이 피풍 장옷을 다시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주아야, 폐하께서 널 저택에 두어도 좋다고 하셨지만 공공연히 혼사를 올리는 건 금지하셨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그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서 쉬거라.”

황보주아는 고개를 푹 떨구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보다 더한 망신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분명, 그녀의 생각대로였다면, 이런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온갖 감정이 북받친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고, 부끄러웠다…….

그때, 녹하가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녹하는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차디찬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황보주아는 수치심이 극에 달하면 차라리 죽고 싶어진다는 걸 이때 알았다. 녹하와 싸울 용기도 사라진 그녀는 도망가다시피 방을 빠져나왔다.

녹하는 묵용감의 침소 앞으로 가서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묵용감은 침대 옆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녹하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물러났다.

곧장 기홍의 방으로 간 그녀는 자신이 본 광경을 기홍에게 알려 주었다.

“내가 방금 뭘 보고 왔게?”

녹하가 입을 삐죽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황보주아, 그 뻔뻔한 게 제 발로 왕야의 잠자리를 찾아갔다니까. 그러더니 왕야께 가차 없이 거절당하고 집 잃은 개처럼 쫓겨났어.”

기홍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황보 아가씨가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아니긴,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다니까? 대학사 가문의 규수라더니, 뻔뻔하기 짝이 없어. 후원에 있는 다른 대학사 가문의 규수는 한 번도 이러지 않았잖아.”

기홍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녹하를 말렸다.

“됐어. 괜히 성내지 마. 어차피 실패했다며. 우리 왕야도 그런 분은 아니시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시지만, 왕비 마마께는…….”

녹하가 슬쩍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야께서도 왕비 마마를 생각하고 계신 거야. 아니면 그렇게 그리워하던 약혼녀가 눈앞까지 찾아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리가 없지.”

기홍의 말에 녹하가 흠칫 놀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내가 가서 지키고 있어야겠어. 황보주아가 또 쳐들어오면 어떡해. 왕야께서도 더는 못 견디시는 꼴은 절대 못 봐!”

녹하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녀의 눈빛이 비장한 결의로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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