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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8)화 (277/1,192)

제278화

마차에 타고 있던 백천범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보따리에서 기름종이 뭉치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조심스레 종이를 펼친 그녀가 두 손에 녹두전병을 하나씩 집더니 월향과 월규에게 내밀었다.

월향과 월규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특히 월향의 안색이 유독 나빴다. 두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되어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망연자실했다. 월규는 울상을 짓진 않았지만 두 눈에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월규는 월향의 울상을 바라보다 억지로 전병 하나를 쥐여 주었다.

“마마께서 먹으라고 주셨으니 먹자.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 월향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왕야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황보주아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추운 겨울날 이 먼 시골로 보내십니까. 너무, 너무도 잔인하십니다…….”

백천범이 손수건을 꺼내 월향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타일렀다.

“울지 마. 사실 옛날부터 저택을 떠나고 싶었어. 나오니까 자유롭고 좋기만 한데?”

“그러니까요.”

월규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황제 폐하가 계신 곳에서 멀어질수록 더 자유로운 법이지요. 별장에 가면 우리가 그곳의 주인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수입이 전부 우리에게 들어올 테니, 먹고 싶은 것도 사고 갖고 싶은 것도 몽땅 사 버립시다. 성으로 놀러 가고 싶으면 마차를 부르면 그만입니다. 이런저런 규율에 얽매이기보다 그곳에 가는 게 훨씬 좋습니다.”

그제야 월향이 천천히 울음을 그치고 손에 쥔 전병을 내려다보았다.

“얼른 먹어.”

월규가 팔로 그녀를 툭툭 쳤다.

“우리도 왕비 마마처럼 팍팍 먹자.”

“그런 건 안 따라 해도 돼.”

백천범은 마지막 남은 전병도 두 입만에 먹어 치웠다.

“너희까지 빨리 먹으면 나중에 나랑 먹으면서 다퉈야 하잖아.”

인색하게 구는 그녀를 보고 결국 월향은 웃음을 터뜨렸다. 월향이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왕비 마마, 슬프지 않으십니까?”

“슬퍼.”

백천범이 전병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슬퍼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이것보다 더 슬픈 일도 겪어 봤는데, 괴로운 건 잠깐이더라고. 슬프다고 울기만 하면 어떻게 살아가겠어?”

월향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더 슬픈 일이 무엇이었는데요?”

“유모가 떠났을 때.”

백천범이 음식을 삼키고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그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매일매일 울어서 눈도 퉁퉁 붓곤 했지.”

“그럼 그 후엔 어떻게……?”

“유모가 떠난 날 밤, 큰오빠가 날 지켜 주려고 매일 밤새 날 돌봐 줬어. 그땐 내가 늘 혼이 나가 있었거든. 이씨 부인이 얼마나 오빠에게 욕을 퍼부었는지 몰라. 둘째 부인이랑 큰언니도 끼어들 수 없었다니까.

그때 깨달았어. 내가 오빠까지 힘들게 하고, 오빠의 짐이 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정신을 차렸지. 그래야 오빠도 마음 놓고 오빠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백 승상 댁에도 마마께 잘해 주시는 분이 계셨군요.”

“응. 유모랑 큰오빠는 나한테 잘해 줬어. 나중에는 오빠도 집을 떠나긴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월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이런 대우를 받은 걸 큰 공자께서 아시면 정말 속상하시겠습니다.”

백천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모르게 해야지. 사실 나쁘지도 않아. 좋게 생각하면 그만이거든.”

“예.”

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장에 가면 저택에서보다 더 즐겁게 지내겠지요!”

“당연하지!”

백천범이 앞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같이 힘내자!”

월규가 웃으며 왕비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눈이 충혈된 월향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을 얹었다. 세 사람은 서로가 전부인 듯이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저택을 떠날 때만 해도 조용하던 세 여자는 녹두전병을 먹어 치우곤 기분 좋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차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왕비를 호송하던 친위병들은 의아함에 마차를 힐끔거렸다. 초왕의 총애를 잃었으니 침울할 터인데, 어찌 저리도 웃는단 말인가?

몇몇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양수리 마을에서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목격한 이들이었다. 어떤 이상한 일도 그녀 앞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곤 했다.

초왕의 농촌 별장은 상상보다 훨씬 컸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는 길 양쪽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광활한 밭이 나타났다. 겨울이라 텅 빈 밭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들쭉날쭉한 잡초 사이로 수확을 마친 옥수수 대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누렇게 시든 잔해를 보고 있으니 겨울 특유의 스산함이 느껴졌다.

발을 걷고 밖을 살펴보던 백천범은 별로 구경할 게 없는 걸 깨닫고 고개를 안으로 넣었다.

“밭에는 아무것도 없어. 근처에 산이 있다던데, 꿩도 있으려나? 지난번 우두산에 납치되었을 때 삼촌들이 꿩을 잡아 와서 요리해 줬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

월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비 마마, 마마를 납치했던 산적들을 좋아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응. 좋은 사람들이었어. 그것도 엄청, 엄청. 나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이모가 힘들어하는 것만 아니었어도 떠나기 싫었어.”

월규는 안 봐도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산적들도 운이 없었네요. 마마를 납치해서 돈을 뜯어내려던 건데, 돈은커녕 음식만 잃지 않았습니까.”

세 사람이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맑은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길가에 서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관리 여득귀餘得貴의 귀에도 희미하게나마 들려 왔다. 그가 목을 길게 빼서 앞을 바라보니 갑옷을 입은 친위병들이 마차를 호송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초왕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마차가 저택 앞까지 다가오자, 여득귀는 미소를 띤 얼굴로 호송을 지휘하는 총령 방령안에게 예를 갖췄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 총령님.”

말에서 내린 방령안이 웃으며 답례했다.

“왕야께서 지시하신 일을 수행하는데 어찌 고생이 있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오셨으니 총관리인께서 고생이 많으시겠지요.”

“아닙니다.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들 수 있다면 저희에게는 큰 복이지요.”

여득귀가 직접 발을 걷어 올리며 공손히 예를 갖췄다.

“소인 여득귀,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옆에 서 있던 하인이 발판을 마차 앞에 내려놓았다. 월규가 먼저 발판에 발을 올려 내린 뒤, 백천범에게 손을 건넸다. 하지만 백천범은 손을 내저었다.

“물러서, 잘 봐.”

그녀는 기합을 한 번 크게 외치더니 그대로 펄쩍 뛰어내렸다. 그녀와 함께 저택에서 온 사람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별장 하인들은 하나같이 아연실색했다. 특히 여득귀가 가장 질겁하며 주춤거렸다.

초왕비의 화려한 업적은 그도 소문으로 들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이런 모습을 목격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방령안이 한 말을 이해했다. 초왕비는 애당초 골칫덩이였던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여득귀가 왕비께 인사를 올리라며 분부했다.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려 하자 백천범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저택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이름만 왕비일 뿐이니까 깍듯하게 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묵을 곳과 먹을 것만 있으면 돼요.”

방령안은 조금 민망함을 느꼈다. 함께 전투를 치른 사이인 만큼 그는 백천범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초왕이 그녀를 이곳에 보낸 것이 그도 못내 슬펐지만 어찌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비 마마, 소인의 임무는 왕비 마마를 이곳까지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소인은 돌아가 왕야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백천범도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똑같이 예를 갖추더니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배웅 고맙습니다, 방 총령. 그럼 나중에 또 보십시다.”

고개를 끄덕인 방령안이 친위병을 이끌고 성으로 돌아갔다.

별장을 둘러보니 의외로 저택만큼이나 근사했다. 외관이 화려하진 않아도 안채와 곁채 모두 예쁘게 칠해져 있었다. 별장의 붉은 벽과 푸른 기와의 대비가 제법 인상적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상에나,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훌륭했다. 불을 때어 공기도 따뜻했고, 한쪽 모퉁이에 놓인 구리 향로에서 은은하게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부만 본다면 남월각보다 훌륭했다. 한편에 놓인 장식장에는 각종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백천범은 그중 하나를 집어 여득귀에게 물었다.

“이거 가짜죠?”

“왕비 마마께 아룁니다. 이것은 진짜 청자이옵니다. 아주 진귀하지요. 이 색을 보십시오. 훌륭하지 않습니까? 너무 파랗지도, 그렇다고 초록빛만 돌지도 않습니다. 자색 빛이 섞이지 않은 호수처럼 맑은 푸른색이지요.

게다가 이 빙렬氷裂(유약을 바른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가 있는 상태) 좀 보십시오. 전부 균등한 데다 질감도 매끈하니, 단연 최고급 자기이옵니다.”

백천범이 청자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좋은 걸 왜 여기 둔 거예요?”

“이곳은 왕야께서 쓰시던 방입니다. 좋은 물건은 응당 이곳에 두어야지요. 왕야께서 기분이 좋으실 때 종종 이곳에 오셔서 며칠 묵으시곤 하셨습니다.”

“왕야의 방이었군요. 전 다른 방에서 묵을래요. 귀한 물건을 깨뜨리기라도 하면 전 책임 못 져요.”

“왕비 마마, 그리하시면 소인이 곤란하옵니다. 별장의 주인께서 머무실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이곳에 묵지 않으시면 적당한 곳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월규가 서둘러 그의 편을 들었다.

“왕비 마마, 방이 넓고 깨끗한 게 너무 좋습니다. 그냥 이곳에서 지내시지요. 오자마자 여 관리인을 난처하게 하면 안 됩니다.”

묵용감이 묵는 방이라니……. 백천범은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월규의 말처럼 관리인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그렇지. 일단 여기에서 묵을게요.”

월규와 월향은 저택에서 베개와 이불까지 챙겨왔지만, 막상 와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요와 이불 모두 새것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옷장에는 새 옷들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화장대에는 귀한 보석함까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월향이 잔뜩 들떠 말했다.

“왕비 마마, 저택을 나오긴 했지만 와서 보니 먹을 것과 옷, 하인들까지 예전과 똑같습니다. 왕야께서 정성껏 준비해 주셨나 봅니다! 왕비 마마께 미안해하시는 게 분명해요!”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하! 그럼 내가 좋아할 줄 알고?”

그녀는 새 물건들을 전부 상자에 넣어 두고 가져온 빗과 구리거울, 머리 꽂이, 비녀 등을 하나하나 꺼냈다. 그녀는 손에 익은 물건을 쓰는 게 편했고 보기도 좋았다.

월규와 월향도 서둘러 물건을 정리했다. 백천범도 거들었지만, 월향이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여득귀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며 별장의 지리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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