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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7)화 (276/1,192)

제277화

좌당중이 황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신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마마께서 눈 감으실 때까지 부디 곁을 지켜 주십시오.”

혼이 나간 표정을 보이던 황제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좌당중, 짐이 간곡히 부탁하네. 황후가 조금만 더 살 수 있게 해 주게. 필요한 게 있거든 말만 하게. 궁에서 구할 수 없으면 전국을 뒤져서라도 찾아오겠네. 이렇게나 젊은데… 제발, 제발! 황후가 몇 년만이라도 살 수 있도록 해 주게…….”

말을 마칠 즈음, 그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황제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황제는 초왕처럼 냉엄하진 않았지만, 평소에는 늘 너그럽고 고귀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혼이 나가 비틀거리며 흐느끼다니. 좌당중이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렇게 후회하실 거라면, 왜 그리하셨습니까!’

그가 곧장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신이 온 힘을 다해 마마의 건강을 되찾겠습니다!”

황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좌당중은 태의원에서 가장 뛰어난 의정이다. 그가 그리하겠다고 하니, 그의 말을 믿는 게 황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오랜 시간 병을 앓아 왔던 황후는 언젠가 황제에게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으므로.

황후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머지않아 그를 떠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가슴 속에서 뒤엉킨 두려움과 절망이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곧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후회가 그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 * *

황보주아는 줄곧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묵용감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맞이했다. 묵용감이 돌아오면 녹하의 일을 고자질할 작정이었지만, 그의 어두운 안색을 마주하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오라버니, 폐하께서 무슨 일로 오라버니를 부르신 것입니까?”

묵용감이 슬쩍 낯빛을 바꾸며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갔다.

“별일 아니었다. 그저 술 한잔하자고 부르셨다.”

황보주아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할수록 큰일이 난 게 분명했다. 그녀가 그를 방 안으로 끌어당기며 재차 물었다.

“오라버니, 어서 말씀해 주시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기홍이 다가와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묵용감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기홍의 뒤에서 녹하가 따뜻한 차를 들고 있었다. 황보주아를 힐끔 곁눈질한 그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왕야께 고자질을 했단 말인가, 안 했단 말인가?

기홍과 녹하 앞에서 계속 묵용감을 추궁할 수는 없다. 황보주아는 그가 얼굴을 다 닦고 자리에 앉자, 두 시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나가요. 두 사람이 이렇게 할 필요 없으니까.”

녹하는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곧 미미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저희가 나가면 누가 왕야의 시중을 들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떠나시기 전, 저희에게 왕야를 잘 모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돌아오셨을 때 왕야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도 하셨지요.”

황보주아의 얼굴이 대번에 붉으락푸르락했다. 녹하는 그녀의 체면을 깎으려고 왕비의 이야기를 꺼냈다. 왕비가 없다고 그 자리를 넘볼 생각 따위는 접으라는 압박이었다.

묵용감은 녹하의 말을 듣고 화를 내기는커녕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백천범이 그런 말을 할 리가? 다만 그도 녹하와 기홍의 마음은 잘 안다. 그간 자유분방하게 두었던 시녀들이니, 그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나가거라. 이만하면 되었다.”

기홍은 녹하가 또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서둘러 그녀를 끌고 나왔다.

두 시녀가 방을 나가자 황보주아가 입을 삐죽였다.

“오라버니의 시녀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시녀인지 주인인지 모를 정도네요.”

세세하게 고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묵용감처럼 엄격한 사람이 오만방자하게 구는 하인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묵용감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왕비와 줄곧 가깝게 지내서 그렇겠지. 저택에 널 남겨놓고 왕비를 내보내니 기분이 좋지 않았나 보구나. 그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일 뿐이니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그녀는 이 문제로 트집을 잡아 봤자 득이 될 게 없음을 눈치챘다. 어쨌든 백천범은 이미 저택을 떠났으니, 충분하지 않은가?

그녀가 정말 걱정한 건 방금 전 좋지 않았던 그의 안색이다. 그녀는 황제가 고작 술 때문에 부른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를 만난 일이 많진 않았지만, 황제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알았다. 황제는 자부심이 강한 동시에 열등감이 심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할지라도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오라버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폐하께서 다른 일로 부르셨지요? 저를 불안하게 하지 마시고 제발 알려 주세요.”

묵용감도 더는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네가 돌아온 걸 알고 계셨다. 널 넘기라고 하셨지.”

황보주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폐하께서 지켜보기만 하실 리가요.”

“병권을 가진 내가 너를 곁에 두었으니 폐하께서도 신경이 쓰이실 테지, 폐하께서는 군왕이시니 생각이 많아지시는 건 당연하다. 해서…….”

황보주아가 불길한 느낌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해서, 어찌하셨습니까?”

“…폐하께 내 호부를 드렸다.”

“뭐라고요?”

황보주아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오라버니의 호부를 폐하께 드렸다고요?”

“호부와 네 목숨을 맞바꾸겠다고 하니 폐하께서도 넘어가 주셨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편히 지내거라.”

황보주아가 얼이 빠져 그를 응시하다 한참 후에야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라버니, 어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언질이라도 해 주셨다면 절대 이리 되도록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그녀를 조용히 타일렀다.

“병권 대신 편안한 삶을 갖게 되었는데 안 좋을 게 무엇이더냐. 나라가 평안하여 평생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딨겠느냐?”

“…오라버니, 이런 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망연자실했던 황보주아는 조금씩 감정이 격해지며 혈색을 되찾았다.

“오랜 시간 폐하께서 오라버니를 견제하신 이유는 오라버니의 병권 때문입니다. 병권이 있는 한, 황제 폐하라도 오라버니를 건드릴 수 없으니까요. 이제 병권을 빼앗으셨으니 더는 오라버니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요. 언제든지 오라버니께 칼을 겨누고도 남습니다!”

“그간 폐하를 위해 전국을 누비며 전쟁을 치렀다. 내가 세운 공로는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그러니 나를 치실 일은 없다.”

“참으로 단순한 생각입니다, 오라버니. 폐하께서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으실뿐더러,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이지요. 그해…….”

“주아야, 그만하거라.”

묵용감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며 그녀를 막았다.

“네가 폐하를 증오하는 건 잘 안다. 그렇다고 어찌 황위를 모독하느냐.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다시는 그런 말 말거라.”

“오라버니!”

황보주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넘실댔다.

“그해 있었던 일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신 적 없으십니까?”

“지난 일이다. 모든 게 끝났으니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그 얘긴 이제 꺼내지 말거라.”

“오라버니께서는 얘기하기 싫으실지 몰라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황보주아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결국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삼백 명이 넘는 가족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어떤 광경이었는지 아십니까?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들의 피로 강을 이루었습니다……. 모두 제 가족이었는데, 제가 어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망할 황제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매 순간 생각해 왔습니다. 정말 지독한 사람입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흐느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묵용감이 한참 후에야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울지 말거라. 내 곁에 있는 한 네가 위험할 일은 없다. 조정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군왕이라면 무수히 많은 시체를 넘고 옥좌에 오르는 법이다. 역대 황조에서도 늘 있었던 일이지. 주아야, 네가 더는 옛일에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편안한 생을 보내길 바랄 뿐이다.”

황보주아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품에 안겨 목놓아 울었다. 한참 후, 그녀가 고개를 들어 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절 가장 아끼시지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뭐든 다 해 주겠다.”

“그렇다면 황제를 죽여 주십시오. 부디 황보 가문의 원한을 갚아 주십시오!”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풀어내더니 뒤로 물러섰다.

“주아야.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느냐?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거라. 그렇지 않으면 나조차 널 지킬 수 없다.”

황보주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물이 글썽이는 두 눈망울에 돌연 으스스한 기운이 서렸다. 그녀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 피맺힌 원한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오라버니가 도와주지 않으시겠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오라버니와의 연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향하자 묵용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

“이곳에서 나가면 네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원한을 갚지 못하는 일만이 두려울 뿐이지요.”

그녀가 앞으로 걸어가려고 발버둥 쳤다.

“주아야, 내가 널 도우려 해도 내겐 병권이 없다. 내가 어찌 폐하께 대적하겠느냐?”

황보주아가 흠칫 놀랐지만 이내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그래, 병권도 없이 어찌 황제에게 맞설 수 있을까. 묵용감은 온화한 말투로 그녀를 다독였다. 이번에는 그녀도 그를 떠봤을 뿐이니 심하게 몰아세울 수 없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가 손꼽아 기다린 날이 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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