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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6)화 (275/1,192)

제276화

유복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에 궁녀와 소태감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늘 침착한 유복이 왜 저리 급하게 뛰어간단 말인가?

뒷전으로 뛰어 들어간 유복은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황후에게 고했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폐하께서 초왕의 병권을 가져가셨습니다. 초왕의 호부를 손에 쥐셨습니다.”

황후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실이냐? 폐하께서 초왕을 겁박하여 호부를 빼앗으셨어?”

유복이 주변 궁녀들을 물리고 황후에게 다가가 조용히 고했다.

“방금 승덕전에서 들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초왕을 불러 술을 드셨는데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고승해를 부르셨고 밖으로 나오는 고승해의 손에 호부가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본 게 맞더냐, 정말 초왕의 호부인 게야?”

“폐하께서 자세히 살피신 뒤에 고승해에게 주셨을 테니, 진짜 호부일 것입니다.”

황후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셨단 말이냐? 초왕이 병권을 가지고 있어야 천하가 평안함을 아시면서…….”

“소인의 생각으로는 백 귀비와 백 승상이 꾸민 일 같습니다. 마마, 아직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마마께서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황후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본궁이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이제는 내 말도 듣지 않으시는 것을.”

“만백성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보고만 계시면 안 되는 일이옵니다!”

황후가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옷을 가져오너라. 폐하를 뵈어야겠다.”

유복이 서둘러 궁녀들에게 분부했다. 푸른 띠를 두른 금색 외투를 황후에게 입혀 주던 영춘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마마, 아직은 옥체가…….”

“걱정하지 말거라. 본궁은 견딜 수 있다.”

황후가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화장대 앞에 앉아 두 볼에 연지를 옅게 발랐다. 그녀가 영춘을 돌아보았다.

“봐줄 만하느냐?”

영춘이 시큰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 생기 있어 보이십니다.”

황후가 활짝 웃으며 영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승덕전에 도착한 황후는 문밖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따뜻했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의 품에 백 귀비가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황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시선에 황후가 들어오자 놀란 기색도 없이 웃음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귀비가 느긋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후는 백 귀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하여 초왕의 병권을 가져오셨습니까?”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을 보이던 황제의 안색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벌써 소식을 접하다니, 참으로 빠르구려!”

“폐하.”

황후가 구슬프게 그를 불렀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초왕이 병권을 가지고 있어야 천하가 태평합니다. 폐하께서는…….”

“무엄하다!”

황제가 버럭 호통을 쳤다.

“병권이 짐에게 있으면 천하가 혼란스럽단 뜻이오? 짐이 그리도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냔 말이오!”

“폐하,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후는 목으로 올라오는 비릿함을 삼키고 또 삼켰다.

“폐하께서는 어진 군주이십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계시지요. 신첩은 늘 폐하의 모습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분야에 월등히 뛰어난 인재가 있다면 그자가 도맡아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지요. 병권을 쥔 자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 일을 초왕보다 잘하실 수 있겠습니까? 조정을 둘러보아도 초왕보다 적합한 이가 없습니다. 초왕만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 폐하께서도 태평성세를 이루실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엄하다, 무엄하다, 무엄하다!”

분노가 극에 다른 황제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손가락질했다.

“짐이 초왕의 상대도 되지 않는단 말이오? 정녕 그대의 생각이 그렇소? 짐이 영원히 초왕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그대는 짐의 황후지만, 마음은 줄곧 초왕을 향하고 있었지. 짐에게 초왕을 곁에 두라고 한 것도, 초왕이 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짐의 눈앞에서 당당하게 초왕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오!”

“폐하!”

새하얗게 질린 황후가 더는 참지 못하고 선홍빛 피를 왈칵 뿜어냈다.

황후의 월백색 겹옷에는 커다란 모란이 수놓여 있었다. 그 탐스러운 꽃망울에 피가 흩뿌려지자 붉은 매화가 피어난 듯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잠시 넋을 잃었던 황제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황후, 어찌 된 일이오! 피를 토하다니. 여봐라,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서 태의원에…….”

옆에 서 있던 귀비가 몸을 살짝 굽히고 황후의 비참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이더니 음흉하게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시니 마마께서 고육책을 쓰시려는 듯합니다.”

황제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귀비를 돌아보며 낮게 소리쳤다.

“썩 물러나시오!”

백 귀비는 흠칫 놀랐다. 그간 온화하게만 대해 주던 황제가 처음으로 제게 흉포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지금이야말로 황후에게 더 큰 고통을 줄 기회다. 그녀가 계속 미적거리자 황제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썩 물러가래도!”

백 귀비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고성에도 태감과 궁녀들은 문 앞만 지킬 뿐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백 귀비가 고승해에게 눈짓을 보냈다.

“폐하께서 태의를 부르라고 하시네. 보냈는가?”

고승해가 곧장 알아듣고 몸을 숙였다.

“모셔 올 사람을 이미 보냈습니다.”

그때, 유복도 영춘에게 넌지시 눈짓했다. 영춘은 천천히 물러가 밖으로 몸을 틀었다.

커다란 방 안은 봄날의 오후처럼 따스했지만, 황제는 한겨울의 눈밭에 앉은 듯 온몸에서 한기를 내뿜었다.

그가 조용히 황후를 불렀다.

“춘아春兒, 춘아, 눈 좀 떠 보시오. 짐을 보란 말이오. 제발, 짐을 봐 주시오…….”

그의 울부짖음에 황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황제를 바라본 순간, 그녀의 눈망울에 또렷한 빛이 서렸다. 그녀가 입술을 힘겹게 꿈틀거렸다.

“폐하…….”

“짐이 여기 있소. 춘아. 어찌 된 것이오. 괜찮소?”

애써 온화한 얼굴을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떨려 나왔다. 그가 다시 밖을 향해 소리쳤다.

“태의는 아직이더냐!”

고승해가 문 앞에서 거듭 고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태의를 모셔 올 사람을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황후가 초조해하는 황제를 다독이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까지 치달았어도, 오랜 시간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이 아닌가. 황제의 마음에는 아직 황후의 자리가 있을 터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녀는 곧 생을 마감하겠지만, 황제는 더 오래 살아갈 테니. 죽음에 직면하면 진심을 말할 수 있는 법, 지금 하는 말이라면 황제가 귀담아들을지도 모른다.

“폐하.”

그녀가 피에 젖은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폐하를 향한 신첩의 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겠지요. 초왕은 동월국의 군신입니다. 초왕이 있는 한 외세도 우리를 넘볼 수 없습니다. 폐하, 신첩은 아마…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인명은 어쩔 수 없다지만, 신첩은 오직 폐하가 걱정입니다…….”

황제가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하얗게 질린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 황후는 죽지 않소. 짐이 그렇게 두지 않겠소. 황후의 병을 고치지 못하면 태의원의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묻어 버릴 것이오!”

“폐하. 잘 들으십시오. 초왕을 믿으셔야 합니다. 초왕은 폐하께 누구보다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도움이 있어야만 폐하께서 원하시는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습니다. 폐하…….”

그녀가 기침을 하자 또다시 피가 왈칵 흘러나와 입가를 물들였다. 피가 튀지 않은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질렸다.

“알겠소. 그만 말하시오. 짐도 다 알고 있소.”

황제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들짐승처럼 포효했다.

“태의는, 태의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소신, 지금 도착하였습니다.”

좌당중의 목소리다. 그가 서둘러 들어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소신이 늦었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어서 황후의 상태를 보거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벌을 내리겠다!”

그때 고승해가 좌당중을 보며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심부름을 보낸 소태감을 찾아보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좌당중이 침상에 옮겨진 황후의 맥을 짚었다. 그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떠한가?”

황제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황후는? 황후는 괜찮은 것인가?”

좌당중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소신, 거짓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마께서 오랜 시간 병을 앓으신 탓에 병인이 오장육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몸을 잘 다스리시며 겨울을 나셨다면 나아지실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다만이라니? 어서 말하거라!”

황제가 무서운 얼굴로 재촉했다.

“황후의 몸은 줄곧 네가 보살피지 않았더냐. 감히 거북한 말을 꺼내려거든 네 목을 베겠다!”

“폐하.”

그때, 황후가 눈을 뜨고 조용히 그를 불렀다.

황제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춘아, 몸은 좀 어떻소? 괜찮아진 것이오?”

“신첩이 변변치 못한 탓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어요. 의정은 늘 성심성의껏 제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의정이 아니었다면 신첩은 이미…….”

“허튼소리 마시오.”

황제가 그녀의 손을 힘껏 쥐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넣어 주었다.

“황후는 그저 편히 쉬시오. 다른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짐이 늘 그대의 곁을 지키겠소.”

황후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린 황제가 좌당중을 방 한쪽으로 데려갔다.

“사실대로 말하거라. 황후에게 얼마나 남았느냐?”

좌당중이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객혈을 하실 때부터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고심 끝에 처방을 내리고 마마께서도 노력해 주신 덕에 최근에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고 계셨습니다. 객혈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요.

다만 방금은 마마께서 화를 참지 못하신 탓에 기력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회생이 어려운 상태이지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황제의 얼굴은 혈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그가 얼이 빠진 채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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