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묵용감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보주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폐하께서 혹…….”
묵용감이 그녀를 위로하듯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이 시간에 부르신 걸 보니 나와 술 한잔 기울이고 싶으신 듯하구나. 그러고 보니 폐하와 한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다. 기다리지 말고 점심을 잘 챙겨 먹거라.”
황보주아가 문 앞까지 그를 배웅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라버니, 제가 했던 말씀 꼭 기억해 두시어요. 어찌 되었든 오라버니를 우선하셔야 합니다. 전 괜찮아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말거라. 아무 일 없을 테니.”
묵용감은 영구와 가동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반월문에 다다라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마쳤느냐?”
“예. 준비되었습니다.”
말에 올라탄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남월각 쪽을 잠시 응시했다. 이내 그는 아무 말 없이 고삐를 내리쳐 달려 나갔다.
기둥 뒤에 서 있던 녹하는 묵용감 일행이 떠나자 방으로 들어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왕야께서 떠나셨으니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두고 보라고!”
기홍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만만한 상대가 아니면, 더더욱 이 몸이 나서야지. 왕비 마마를 내보내 달라고 왕야께 청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니까. 여우 같은 계집, 제까짓 게 뭔데! 죄인의 딸이 왕비라도 되려고? 참나!”
그녀가 사발을 쟁반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무수리를 불렀다.
“이거 황보 아가씨한테 드려. 몸에 좋은 거니까 천천히 드시라고 하고.”
무수리가 쟁반을 들고 재빨리 황보주아의 방으로 향했다.
“아가씨, 몸에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황보주아는 사발에 담긴 새하얀 타락죽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묵용감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순간, 목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그녀가 왁 하고 죽을 게워 냈다. 이미 일부는 삼킨 터라, 뜨겁다 못해 내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다.
깜짝 놀란 무수리가 소리쳤다.
“아가씨, 어찌 이러십니까? 큰일 났습니다! 다들 와 보십시오!”
분주한 발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황보주아는 입을 가린 채 딱한 모습으로 문만 바라보았다. 녹하가 먼저 들어왔고 기홍이 뒤를 이었다. 몇몇 무수리도 뒤따라 들어왔다. 대놓고 고소하다는 녹하의 표정을 보자 황보주아는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녹하는 일부러 크게 놀라는 척했다.
“아이고,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왜 토를 하시어요? 설마?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 왕야는 아니실 테고. 이걸 어찌해야 한담. 우리 왕야께서…….”
아무리 죄인의 딸이라지만, 일개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입을 벌릴 수 없었던 그녀는 대신 매섭게 주먹을 날렸다.
가만히 맞고 있을 녹하도 아니었다. 녹하가 몸을 살짝 틀자 무수리들이 황보주아를 에워쌌다. 말로는 싸움을 말렸지만, 그녀가 녹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게끔 막고 있었다.
기홍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아가씨, 노여움을 푸시어요. 소인이 말씀을 드리지 못한 탓입니다. 이것은 유지를 굳혀 만든 차입니다. 표면에 생긴 막 때문에 김이 나지 않으니, 뜨거워 보이지 않아 입을 데이셨나 봅니다. 소인이 이렇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점심에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십니까? 사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입 안의 통증이 조금 가시자 황보주아가 쏘아붙였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 독을 넣을지도 모르는데.”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들었지? 네가 아무리 잘해 줘도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니까.”
기홍은 무수리에게 방을 정리하라 이르고 서둘러 녹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됐어. 이쯤 해 둬. 그보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넌 정말 큰일 났다.”
녹하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지어낸 말로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잖아? 가서 이르라지!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 말을 놓치지 않은 황보주아가 음침한 표정으로 녹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힘껏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 * *
묵용감의 예상대로 황제는 술을 마시기 위해 궁으로 불러내었다.
귀한 술과 맛있는 음식이 아낌없이 차려졌고, 악사와 아리따운 무희까지 부른 자리였다.
황제는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셋째야, 어서 오너라. 짐이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묵용감은 웃으며 인사를 올린 뒤 옆자리에 앉았다.
“폐하께서 이 시간에 궁에 들라 하시기에, 저도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참입니다. 예상이 맞았군요.”
“역시, 셋째 네가 짐을 잘 아는구나.”
황제가 크게 웃더니 직접 술을 따라 주었다.
묵용감도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폐하를 기다리게 하였으니 사죄의 의미로 먼저 잔을 비우겠습니다.”
황제는 그의 얼굴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진탕 마시고 싶으니, 느긋하게 마시자꾸나.”
“좋습니다!”
묵용감이 호탕하게 답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아우가 취할 때까지 들이켜겠습니다.”
“셋째야, 근래에 너와 서먹해진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폐하, 지난 일은 지나가게 두십시오. 저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셋째 너는 도리를 잘 아는구나. 짐의 도량이 좁은 탓이지.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에 마음을 써서 오해하다니…….”
“폐하, 그런 말씀 마시고 드십시오.”
묵용감이 그의 말을 끊고 술을 들이켠 후 그에게 권했다. 황제는 체면이 조금 깎이더라도 뒷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다만 말을 마친 뒤에는 언짢을지도 몰랐기에 가능하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묵용감도 속으로는 훤히 꿰고 있을 터였다.
“과연 셋째가 짐을 잘 아는구나.”
황제가 그를 칭찬하며 말을 이었다.
“황후의 말이 옳았구나. 이 세상에서 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짐이 곤란할 때마다 네가 도와주니 감격스러울 뿐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의 짐을 나누는 것이 제 도리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짐에게 요즘 번거로운 일이 하나 있구나. 셋째가 좀 도와주었으면 한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자 악사와 무희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황제가 웃는 낯을 유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짐이 누구를 좀 데려올까 하는데.”
묵용감이 담담하게 물었다.
“누구를 원하시옵니까, 폐하.”
황제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황보주아.”
묵용감은 동요하지 않고 술잔을 빙빙 돌렸다.
“폐하께서 실망하시겠군요. 그 애는 드릴 수 없습니다.”
“셋째야, 죄신의 딸이다. 지금 넌 죄인을 숨겨 두지 않았느냐.”
“저는 주아가 제 약혼자이자 연약한 여인이라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그건 옛일이 아니더냐. 지금은 초왕비가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주아가 초왕비를 싫어하여 이미 저택에서 내보냈습니다!”
황제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탄식을 내뱉었다.
“네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황보주아였단 말이냐. 초왕비의 상심이 크겠구나.”
자조를 흘리던 황제가 눈을 번득였다.
“그럼 짐을 적으로 삼겠다는 뜻이더냐?”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묵용감이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답했다.
“주아에게는 저밖에 없습니다. 주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가 씁쓸하게 웃더니 술을 들이켰다.
“하여, 짐을 실망하게 만들 작정이냐?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초왕이 중죄인을 공공연히 숨겨 둔다면 문무백관들이 어찌 나오겠느냐? 또, 백성들은 어찌 여길 테고? 대체 짐이 어찌하란 말이냐?
너는 짐의 수족이니 짐이 널 죽일 일은 없겠지. 셋째야, 짐을 대신해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병권을 쥐고 있는 네가 황보주아와 함께 지낸다면 신하들의 공분을 살 게 분명하다. 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짐에게 달려들 게 뻔하지 않느냐!”
가만히 듣고 있던 묵용감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려놓았다.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병권을 돌려드리겠습니다.”
황제가 눈앞에 놓인 호부虎符(구리로 범의 모양을 본떠 만든 군대 동원의 표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의심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정녕 병권을 넘기려 하느냐?”
“폐하께 주아가 돌아온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행동이 규율에 어긋난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해서 줄곧 마음먹은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안정적일 때 호부를 넘겨 드리면 폐하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입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군 생활만 해왔으니 이제는 조용한 날들을 보내고자 합니다.”
황제는 호부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표면에 새겨진 꽃문양과 윤곽을 매만지던 그의 마음이 어지럽게 엉켜 들었다. 이 호부가 있다면, 동월국의 천군만마를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줄곧 초왕에게 있었고, 줄곧 원했던 것이 지금 그의 손에 놓였다.
뒤를 지키던 천군만마가 사라지면 초왕은 일개 장군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초왕을 두려워할 필요도, 초왕의 속내를 겁낼 필요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이 나라의 진정한 천자가 되었다!
어찌 싫은 기색도 없이 이리 쉽게 병권을 넘겨주었을까. 황제는 믿기지 않는 마음에 몇 번이나 호부를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호부는 진짜였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황보주아를 위해서라면, 초왕은 뭐든지 포기할 수 있다!
황제는 고승해를 불러 호부를 잘 담아 두라고 명했다.
고승해가 방을 나가자 황제는 술병을 들어 묵용감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가 감격이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셋째야. 이리도 대의를 잘 아니 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 한잔하자꾸나!”
묵용감은 두 손으로 술잔을 잡고 공손히 잔을 맞춘 뒤, 살짝 손을 들어 올려 술잔을 비웠다.
“짐도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다. 황보주아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으니 그 애를 저택에 두거라. 다만 공공연히 초왕비로 들여선 안 된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 아우,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