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왕비를 농촌 별장으로 보낸다는 말에 저택이 떠들썩해졌다. 부녀자를 농촌으로 보내다니, 더 이상 그 여인을 거들떠보지 않겠다는 의미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내진 부녀자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가장 초조해진 사람은 기홍과 녹하였다. 그들은 왕비의 시녀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자매 같은 사이였다. 주인과 하인 사이의 정과는 견줄 수 없는 감정이 존재했다.
두 사람은 묵용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명을 거두어 달라고 거듭 빌었다.
그러나 묵용감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본왕이 결정한 일에 그리 말해도 소용없다. 이만 나가거라.”
기홍과 녹하도 묵용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번 마음먹은 일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 그들은 알면서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빌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밖을 나서기 전, 녹하는 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황보주아를 노려보았다.
황보주아는 녹하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돌려 묵용감을 바라볼 땐 연약하고 겁에 질린 표정을 내보였다.
그녀가 묵용감의 발밑에 웅크려 앉아 그의 다리에 고개를 기댔다.
“오라버니, 마음이 좋지 않으시면 왕비를 내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괜찮아요.”
“소란을 피우니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들 조용하게 지낼 수 있겠지.”
“오라버니께서 괴로우시잖아요.”
묵용감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조금 낯설구나. 며칠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황보주아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앞으로 제가 오라버니를 잘 모실게요. 영원히 곁에 있을게요.”
“그래.”
“하지만.”
황보주아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저는 죄인인걸요. 제 위치가 발각되면 오라버니께 짐이 됩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있는 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무섭지 않지만, 폐하께서…….”
황보주아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그땐 저를 폐하께 넘기십시오. 오라버니까지 죄인이 되는 것은 싫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네게 어떤 일도 생기지 않는다.”
묵용감이 온순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주아야. 난 네게 목숨을 빚졌다. 그자들이 내 시체를 밟지 않는 이상, 난 누구에게도 널 넘기지 않겠다.”
“오라버니.”
황보주아가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이더니 목이 메어 울먹였다.
“오라버니께서 제게 베푸시는 마음은 다음 생까지도 갚지 못하겠지요.”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그가 그녀를 가뿐히 일으켰다.
“가자. 두던 바둑을 마저 두어야지.”
“왕비를 데려다주지 않으십니까?”
“친위병을 붙였으니 그럴 필요 없다.”
* * *
처마 아래에 서 있던 가동은 녹하가 걸어오자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녹하는 눈을 치켜뜬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왕비의 일로 화가 잔뜩 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한테까지 화를 내고 그래. 왕야가 결정하신 일인데.”
치솟는 화를 풀어낼 길이 없던 녹하는 가동을 마주하자 곧바로 분노를 터트렸다.
“왕야께서 정신이 혼미해지셔도 넌 그러면 안 되지. 옆에서 타이르지도 않고 뭐 했어? 평소엔 말도 잘하면서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데? 왕비 마마의 사부면 당연히 제자를 챙겨야지! 사부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돼? 좋을 때만 가져다 붙이는 게 사부야?
네가 벌로 곤장을 맞았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약을 가져다준 사람이 누구인지 벌써 잊었니? 인정머리 없는 자식, 왕비 마마께서 기르시는 토끼도 너보단 인정과 도리를 알 거다…….”
한바탕 욕을 얻어먹은 가동은 혼이 쏙 빠져나갔다. 그가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건 다 왕야께서…….”
“왕야 얘기 꺼내지 마. 왕야도 똑같으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녹하는 거침없이 말을 뱉어냈다.
“그렇게나 왕비 마마를 끔찍이 아껴 주시더니, 옛 연인이 돌아왔다고 단번에 마음이 변하는 것 좀 봐. 몰인정하고 의리도 없는 게 소인배가 따로 없다니까……!”
녹하의 날 선 말에 가동은 말문이 막혔다. 녹하가 감히 초왕을 욕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는 어느새 그녀를 숭배하듯 바라보았다…….
기홍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천하제일의 충신 영구가 새하얗게 빛나는 검을 뽑아 들고 어느새 녹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녹하의 목소리는 헉 하는 소리를 끝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동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왕야를 모욕하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다.”
“녹하는 내 아내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영구가 여전히 검을 겨누자 가동은 화가 치솟았다.
“그렇게 잘났으면 나랑 붙어. 여인을 괴롭히는 게 사내가 할 짓이냐!”
“남녀 막론하고 왕야께 불경을 저지르는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봐, 영 씨. 녹하에게 손만 까딱해 봐. 가만 안 둘 거니까!”
그때 기홍이 영구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영구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는 기홍을 일으키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검을 거두었다. 물 흐르듯 일을 처리한 영구가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기홍 아가씨의 체면을 봐서 그만하지요.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영구의 손에 일으켜진 기홍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영구 무사님.”
가동은 얼떨떨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구에게 자신의 체면은 기홍보다 못하단 말인가? 두 사람은 늘 함께 먹고 자며 지냈다. 언제든 향을 꽂고 의형제를 맺어도 될 사이거늘, 자신이 말할 땐 거들떠보지도 않고 기홍에게는 물러난단 말인가?
녹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목을 쓸어내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체감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기홍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서둘러 그녀를 끌고 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 가동이 매섭게 검을 뽑아 들었다. 영구에게 받은 수모를 갚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영구는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요.”
가동은 영구의 뺨을 마구 날리고 싶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칼을 겨누다니. 그게 무슨 은혜란 말인가?
“무슨 말이야?”
“그 멍청한 머리로 생각이란 걸 좀 해 보십시오.”
“너야말로 멍청하거든!”
가동이 검 끝으로 그를 겨누며 말했다.
“어서 말해. 계속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영구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검을 밀어내며 가동을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큰소리를 치다니요! 이 년 전 맞붙었을 때도 형님은 승산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절 이길 줄 아십니까?”
그 말에 가동은 조금 멋쩍었다. 영구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넘치는 기개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이기지 못한다 해도 싸울 거야. 이번 일은 절대 넘길 수 없어.”
“미련하십니다.”
영구도 더는 못 참겠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나서지 않았으면 녹하 아가씨는 정말 끝이었습니다. 그 말이 왕야의 귀에 들어갔으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녹하를 베려는 게 아니었어?”
가동이 눈을 끔벅이다 칼을 거두었다.
“녹하를 구해 주려고 그런 거였구나.”
“형님의 처라고 하니, 형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화를 못 이겨도 물불을 못 가리면 조만간 큰일이 나고도 남습니다.”
“맞아, 맞아. 성격이 조금 불같긴 하지. 내가 잘 얘기할게.”
가동이 조금 쑥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영구야, 고맙다.”
* * *
한편, 몰래 두 사람을 지켜보던 기홍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큰일 났어. 가동 무사님이 검을 뽑아 들었어! 둘이 한 판 붙으려나 봐!”
녹하가 힐끔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걔는 영구 못 이겨.”
“영구 무사님이 정말 다치게 할 수도 있어. 넌 걱정도 안 되니?”
“그럴 리 없어. 영구처럼 원칙을 잘 지키는 사람은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하지 않아.”
녹하의 태연한 반응에 기홍이 살포시 웃었다.
“영구 무사님을 되게 잘 아는 듯이 말하네.”
“잘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네 체면이야말로 엄청나던데. 잠깐.”
문득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기홍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언제부터 영구한테 중요한 사람이 된 거야? 설마 너희 둘……?”
“허튼소리 하지 마.”
기홍이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영구도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맞닿자 두 사람은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 * *
황보주아는 바둑을 두는 동안 묵용감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 묵용감은 늘 과묵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쁨과 분노 따위의 감정도 내비치는 법이 없었다. 다들 그를 무서워했지만 그는 그녀만큼은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녀가 하는 부탁은 늘 들어주었다. 태자는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법이라, 묵용감의 약점은 황보주아라고 놀리곤 했다.
그녀는 늘 자신이 그에게 특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여인의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은 백천범이 버려진 딸이기에 드는 동정심이 분명했다. 그저 가여워서 마음을 쓰는 거라 믿었다. 그래도. 왜 하필이면 백천범이란 말인가?
사실 묵용감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만 따뜻한 모습을 내보였다. 그녀라든가 그의 수족들, 함께 고난을 이겨낸 벗들을 제외한 이에게는 냉랭하기만 했다.
그녀가 돌아온 데에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천범과 계속 다투는 모습을 보인 것도 묵용감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누구를 버리게 될까. 그녀는 십여 년간 쌓아온 관계를 한낱 계집아이 따위가 넘어설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역시 묵용감은 그간의 정을 외면하지 않았다. 백천범을 곁에 둔 것은 여느 여인에게서 볼 수 없는 색다름에 잠시 흥미를 느낀 데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녀는 서서히 승리감에 젖어들었다.
그때, 학평관이 발을 열고 들어와 고했다.
“왕야,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시어 궁에 들라는 명을 전하셨습니다.”
순간 손이 떨릴 만큼 깜짝 놀란 황보주아는 들고 있던 바둑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학평관이 서둘러 바둑알을 줍더니 두 손으로 공손히 탁자에 올려 두었다.
“무슨 이유인지도 전하셨느냐?”
“그저 입궁하라는 말만 전하셨습니다.”
“외투와 말을 준비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