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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3)화 (272/1,192)

제273화

황제는 묵묵히 향로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만 바라보았다.

“폐하. 주저하시면 안 됩니다. 초왕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의 호랑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진상품을 훔친 데다 황숙에게 주먹까지 날렸습니다. 궁을 출입할 땐 안하무인으로 규율을 무시하고, 궁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예왕의 일도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초왕은 친왕이라는 신분만 믿고 폐하께 불손을 저지르고 법도를 어겨 왔습니다. 내버려 두시면 큰 사달이 날 게 분명합니다, 폐하!”

황제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궁 안에도 그의 세력이 있으니 알아차리지 못하게 진행해야 하네. 그렇다고 성급하게 굴어도 안 되네. 승상이 직접 암암리에 일을 진행하되 수민에게는 알리지 말도록. 그는 워낙 고리타분한 성격이니 일을 그르칠까 싶네.”

“알겠습니다, 폐하.”

백여름이 얼른 공손히 답했다.

“폐하, 부디 마음 놓으시옵소서. 소신이 신중, 또 신중하게 진행하겠습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황제는 피곤함이 몰려오는 듯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만 물러가게. 아, 귀비의 몸이 편치 않으니 승상이 가서 살펴보게.”

“예. 소신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백여름은 예를 갖추고 천천히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고승해가 곧장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승상 어르신, 가마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귀비 마마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여름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소태감이 받쳐 주는 우산을 쓰고 가마에 올랐다. 가마는 빗속을 뚫고 분주히 서복궁으로 향했다.

서복궁에 도착하니 백 귀비가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백여름이 들어오자 그녀가 황급히 물었다.

“아버지. 폐하께서 뭐라 하십니까?”

“되었다.”

백여름이 웃으며 답했다.

“초왕을 신경 쓰신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그간 손 쓴 일로는 초왕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폐하께서도 다 아시는 게지. 이번에도 초왕을 끌어내리지 못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백 귀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간 아버지께서 모습을 감추셨던 게 헛되지 않았습니다. 초왕만 끌어내리면 우리 백 씨 가문의 날이 올 것입니다.”

“네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후궁의 숨통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접니다. 마음만 먹으면 염라대왕도 목숨을 가져가지 않고는 못 배기지요.”

“중대한 고비일수록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보여야 해.”

백여름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비가 말하지 않았더냐. 참고 기다리면 황후의 자리는 네 것이라고.”

* * *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백천범은 깊게 잠들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복도에 서서 비바람이 남긴 난잡한 흔적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솜옷을 껴입은 몇몇 무수리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분주히 낙엽을 쓸어냈다. 곳곳에 물이 잔뜩 고여 있어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신발에 물이 스며들곤 했다. 빗자루를 든 무수리가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았다.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왔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거 아니야?”

“그러게, 곧 새해인데 아직도 날이 흐리네. 또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날지도 몰라.”

“새해 전에 눈이 많이 내려서 좋았는데. 이번 비에 그간 내린 눈이 땅속으로 죄다 스며들었잖아? 정말 풍년이 오려나 모르겠다. 징조가 안 좋아.”

“누가 아니래. 얼른 날이 개기만 바라야지, 뭐.”

백천범은 잿빛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월향에게 이끌려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

월규와 월향은 어린 왕비가 걱정이었다. 어제 겪은 일이 왕비를 또다시 주저앉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어린 왕비는 여전히 잘 먹었고 표정도 온화해 보여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밥을 다 먹은 백천범은 새끼 토끼 한 마리를 긴 의자에 올려놓고 함께 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월향이 얼른 대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백천범이 토끼를 안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학평관이 서둘러 그녀에게 걸어와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리 허겁지겁 찾아오시다니요. 일부러 인사를 하려고 오신 건 아니겠죠?”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찾으십니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조정에 안 가신 거예요?”

“어젯밤 비가 너무 많이 온 탓에 왕야께서는 교외 제방에 가셨다가 방금 돌아오셨습니다. 조정에는 가지 않으실 듯합니다.”

백천범은 월향에게 토끼를 가볍게 넘겨주었다.

“어르신이랑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월규가 급히 나섰다.

“소인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냐.”

백천범은 어쩐지 홀가분하다는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황보주아를 때리고 왔으니 분명 책임을 물으려 할 테지.

그녀는 거리낄 게 없었다. 황보주아를 어떻게 한 것도 아닌데, 혼내려면 혼내라지. 말대답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침부터 먼 곳을 다녀왔으니 그도 많이 피곤할 터였다. 그녀는 그가 마음껏 화풀이하도록 가만히 듣고만 있을 생각이었다.

남월각 대문을 나선 뒤, 학평관이 걸음을 멈추고 몇 번이나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백천범이 미심쩍은 눈으로 학평관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왜 자꾸 절 보시는 거예요?”

학평관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소인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왕비 마마,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왕야께서…….”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백천범의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한참 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 전 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학평관은 왕비가 정말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세하게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주제넘게 나설 일이 아니니, 두 사람이 직접 해결해야 했다.

묵용감의 방에 들어서니 그는 황보주아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서로 마주 앉아 바둑알을 쥐고 있는 모습이 퍽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은 많이 닮아 있었다.

백천범이 단정하게 묵용감의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소첩,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이 바둑알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오래전 후원에서 사람이 죽어 상황을 살피러 갔을 때, 군중 속에 섞여 있던 그녀가 인사를 올리던 모습과 흡사했다. 눈을 내리깔고 단정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공손하면서도 어느덧 소원해진 사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 예를 갖출 것 없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앉으시오. 잠시 할 말이 있소.”

학평관이 의자를 가져와 그녀 곁에 놓아주었다. 백천범은 두꺼운 치맛자락을 들고 의자에 앉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묵용감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오늘 같은 날을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오직 그녀와의 행복한 날들만을 꿈꿔왔건만, 그는 어렵사리 얻은 행복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야 했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들 나가 있거라.”

학평관과 황보주아가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백천범이 묵용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왕야,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말씀을 마치시면 곧장 남월각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묵용감의 시선이 잠시 어지럽게 배회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대는 남월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하오.”

백천범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왕야, 절 내쫓으시려는 건가요?”

“아니오.”

묵용감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택이 소란스러우니 잠시만 밖에서 지내라는 것이오. 약속하오.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그대를 데리러 가겠소.”

“저택이 소란스럽다니, 저와 황보 아가씨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제가 아가씨를 괴롭힐까 걱정이 되어서요? 제가 또 아가씨를 때릴까 봐서요?”

이내 그녀가 경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큰 여인이 절 이기지 못하니, 제 탓으로 여기시는 것입니까?”

“…….”

“돌아온 뒤에 제가 또 아가씨를 때릴까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차라리 절 폐위하세요. 한 번에 처리하는 게 깔끔하지 않습니까?”

“허튼소리.”

묵용감의 얼굴이 까맣게 물들었다.

“혼인이 장난인 줄 아시오? 그대는 지금도 초왕비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대를 폐위하는 일 따윈 없소. 헤어질 일도 더더욱 없을 것이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백천범이 가볍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웃음이었다.

“마음속에 두 여인을 담고 있는데 피곤하지도 않으십니까?”

자신을 경멸하는 여인의 눈빛을 마주하자 묵용감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라 해도 손을 쓸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천범.”

그가 나지막이 그녀를 물렀다.

“…내가 미안하오.”

백천범은 차라리 그가 몰인정한 사람이길 바랐다. 그의 입에서 흩어지는 미안하다는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소리 없이 부서져 내렸다. 부서진 조각은 절대 붙일 수 없다는 듯 잘게 흐트러져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

“그대에게 진 빚은 훗날 배로 보상해 줄 것이오. 부디 이해해 주오.”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위태로운 웃음기가 만연했다.

“네. 그럴게요. 절 어디로 보내실 계획이세요?”

“농촌에 가 보고 싶다 하지 않았소? 겨울이라 풍경은 그리 좋지 않아도 넓은 곳이니 여기보다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오. 잠시 기분 전환을 한다고 생각하시오.”

“언제 떠나면 되나요?”

“…지금.”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지만, 서운한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당장 떠나라니, 단 하루도 그녀를 저택에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짐도 많이 챙길 필요 없소. 먹을 것과 옷, 필요한 물건들은 그곳에도 준비되어 있소. 월향과 월규도 왕비와 갈 것이오. 더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주저 말고 얘기하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이면 충분해요.”

백천범이 가볍게 일어났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준비할 게 많지 않아도 손에 익은 것들은 가져가야 하니까요.”

“알겠소. 한 시진 뒤, 처소 앞에 가마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묵용감은 밖으로 향하는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에 까닭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천범.”

백천범은 발걸음만 멈춘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더 분부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묵용감은 그녀에게 머뭇머뭇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싶었지만, 경멸로 점철된 얼굴이 떠올라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대를 보내는 내가 싫소?”

“싫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요.”

그녀는 줄곧 문 발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평생 기억할 뿐입니다. 왕야께서 다른 여인 때문에 절 내보내시는 것을요.”

그녀의 말은 묵용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내었다. 그는 그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일로 그녀가 원한을 품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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