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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2)화 (271/1,192)

제272화

덩그러니 남은 백천범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맞서 싸우면 그녀의 사랑을, 그녀의 지아비를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건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이 싸움의 결정권은 그녀도 황보주아도 아닌 묵용감에게 있었다. 그녀가 황보주아를 저택에서 내쫓아도 그녀는 묵용감의 유일한 여인이 아니다. 황보주아가 살아 있는 한,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황보주아의 자리가 있겠지. 그 자리는 그녀가 영원히 들어갈 수 없는 황보주아만의 장소였다.

멍하니 서 있던 월규는 그제야 사실로 만들 거라던 백천범의 말을 이해했다.

사실 그녀는 백천범을 나무라고 싶었다. 초왕 앞에서 황보주아를 때리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황보주아가 거짓을 고했다고 설명하면 될 걸 왜 이렇게까지 일을 벌인단 말인가?

그러나 월규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간 백천범의 곁을 지키면서 그녀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도, 분노도, 실망도 없었다. 지극히 애처로운 표정만이 작은 얼굴을 잠식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월규마저 코끝이 찡했다.

월규가 월향에게 눈짓을 보낸 뒤 함께 백천범을 부축했다.

“왕비 마마, 이만 돌아가시지요.”

* * *

침대에 누운 황보주아는 줄곧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묵용감은 시녀에게 다쳤다는 부위를 확인하라고 분부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며 힘껏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해서라도 백천범을 내보내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그가 악랄한 여인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런데 백천범이 직접 그녀의 수고를 덜어 줄 줄이야.

백천범이 세게 넘어뜨리진 않았지만 그녀의 연기로 모두를 속일 수 있었다.

출가를 하지 않은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 배를 보여 주는 건 퍽 난감한 일이다. 묵용감은 하는 수 없이 시녀들에게 따뜻한 물주머니를 그녀의 배에 올려 주라고 분부했다.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던 황보주아는 그와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가지 마시어요. 너무 무섭습니다.”

“겁낼 것 없다. 계속 아프거든 의원의 진찰을 받으면 된다. 배 속이 다친 거면 큰일이지 않겠느냐.”

“오라버니께서 곁에 계시면 무섭지 않습니다. 왕비의 손이 워낙 매서워야지요. 오라버니께서 안 계실 때 제 목숨을 해하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널 건드릴 수 없다.”

“오라버니께서 안 계시면요? 절 죽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황보주아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저한테 이런 짓까지 저지르는데도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까? 셋째 오라버니, 왕비를 내쫓아 주십시오. 왕비가 떠나면 다들 편안히 지낼 수 있습니다.”

“왕비는 엄연히 초왕비다.”

“이리 악독한 왕비도 있답니까? 사람을 때리고, 죽이겠다고 소리치는 왕비라니요. 아야!”

그녀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또 아픈 것이냐? 의원을 불러야겠다.”

“괜찮습니다.”

황보주아가 힘없이 말했다.

“너무 두려워서 그만 감정 조절을 못 했습니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다독였다.

“눈 좀 붙이거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마친 뒤에 보러 오마.”

그가 떠나려 하자 황보주아가 급히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도 생각해 보겠다.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라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황보주아는 마침내 한 가닥 희망을 잡은 듯했다.

“오라버니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묵용감은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의 심경만큼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복도에 서 있던 기홍이 천천히 다가왔다.

“왕야, 황보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왕비는?”

“처소로 돌아가셨습니다.”

묵용감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때려 놓고 그냥 가다니. 혼이 날까 무서워서 도망쳤군.”

“왕비 마마께서 떠나실 때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왕야께서 하지 않은 일로 훈계를 하셔서 아가씨를 때렸으니 빚은 다 청산한 셈이라고요.”

묵용감의 안색이 조금 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남월각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리 순서에 맞게 일을 처리하다니. 나무랄 데가 없구나.”

기홍이 자리를 뜨고 묵용감 홀로 복도에 남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평온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오가 막 지났을 뿐인데 주위는 저녁처럼 어두웠다. 하늘을 바라보니 먹구름이 손에 닿을 듯 낮게 드리웠다.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사방을 휩쓸자 마른 나뭇잎들이 맥없이 흩어졌다. 쓸쓸하고 스산한 광경이다.

고민에 잠긴 그에게 영구가 다가왔다.

“왕야, 이제 망설이지 마십시오.”

묵용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구야. 내가 탐욕이 너무 많은 것이냐?”

“왕야께서는 큰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묵용감이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구나.”

“소인,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 왕야께서는 만백성을 굽어살피셔야 합니다.”

묵용감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알겠다.”

* * *

오후로 접어들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궂은 날씨에도 묵용감은 영구와 가동을 거느리고 저택을 나섰다.

황보주아는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곁을 지키던 어린 무수리가 서둘러 물었다.

“아가씨,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왕야는 나가신 것이냐?”

“아가씨께 아룁니다. 그러하옵니다.”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셨느냐?”

“그것은 소인도 모르옵니다.”

황보주아는 무수리에게 옷을 입혀 달라고 했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던 탓에 바깥바람이 그리웠다.

그때, 무수리가 고민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배가 아프지 않으십니까? 의원이 아직 앞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괜찮다. 하인을 보내 의원에게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옷을 입은 황보주아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오자 밖에 있던 학평관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아가씨, 몸이 많이 좋아지셨다면서요.”

“네. 왕야께서는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까?”

“저녁을 드시지 않을 거라고만 말씀하셨을 뿐, 다른 이야기는 없으셨습니다.”

황보주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비가 아주 많이 올 것 같은데.”

그녀는 서재 입구에 다다르자 머뭇거렸다. 등 뒤에서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왕야께서 말씀하시길, 아가씨께서는 외부인이 아니시니 서재를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답답하실 땐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마음에 좋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말에 황보주아가 활짝 웃으며 서재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그녀가 몸을 돌려 그에게 물었다.

“오라버니께서 왕비 마마도 서재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셨나요?”

학평관이 허리를 굽히고 웃으며 답했다.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워낙 자유분방하시니,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다 가실 수 있으십니다.”

학평관의 모호한 대답에 황보주아의 궁금증이 사그라들었다. 알아봤자 속만 끓을 뿐이다.

“따라올 필요 없어요. 들어가서 잠시 서책을 읽을 거예요.”

학평관은 대답을 올린 뒤 공손히 물러났다.

* * *

오랜만에 퍼붓는 장대비였다. 콩알만 한 빗물이 기와와 반짝이는 유지油紙를 연신 때리니 수많은 말이 내달리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소음이 울려 퍼졌지만, 황제는 백여름이 내뱉는 말을 놓치지 않고 귀에 담았다.

그의 안색은 점점 잿빛으로 변했고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았다. 비바람을 몰고 온 어두운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늘어뜨린 두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옵니다.”

백여름은 허리를 굽힌 채 황제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신의 아내가 그 장신구 가게의 오랜 단골인지라 가게 주인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주인장이 초왕비라고 착각한 여인이 있었는데, 초왕은 그 여인을 주아라고 불렀다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노신老臣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주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다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삼 년 전, 황보주아는 현장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당시 이 일은 비밀에 부쳤지요. 초왕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초왕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소신이 암암리에 내막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초왕의 곁에 삼 년 전 도망친 황보주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친왕의 신분으로 감히 죄인을 숨겨 주다니!”

황제가 분을 못 이기고 호통을 쳤다.

“법도를 알면서도 그런 죄를 범하다니. 응당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백여름이 질겁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초왕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옵니다. 이번 일은 마땅히 신중하게 처리하셔야 합니다.”

황제가 어두운 시선을 올려 백여름을 바라보았다.

“승상은 어찌해야 한다고 보는가?”

“초왕이 외부인에게 황보주아를 보였으니, 이 일을 다른 이가 알아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초왕은 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이었지요. 백성들은 초왕은 알아도 군주는 모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가 이토록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는 건 병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왕을 처리하시려거든 병권부터 내려놓게 하셔야 합니다. 수하의 부하를 모두 넘겨받아야만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무슨 명목으로 병권을 빼앗는단 말인가? 소문을 듣고 초왕이 즉각 대응에 나서면 짐이 당하지 않겠는가?”

백여름이 간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소신에게 방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 보시지요.”

그가 또다시 앞으로 걸어가더니 허리를 숙이고 황제의 귓가에 조용히 읊조렸다.

황제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조금씩 옅어졌지만, 눈빛에 서린 음침한 기운은 더욱더 짙어졌다.

“맞네, 법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지만 인정을 중시하는 아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황보주아를 저택에 남겨두었겠는가. 다만…….”

그가 여전히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초왕이 고작 황보주아 때문에 병권을 넘기려 하겠는가?”

“한번 해 보시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왕은 황보주아에게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혼인도 하지 않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황보 가문의 멸망에 심한 죄책감을 느낄 테지요. 신의 생각에 이번만큼은 필사적으로 황보주아를 지키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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