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보주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더욱 세게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리 내어 보거라.”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소매를 걷어 올리자 시퍼런 멍이 드러났다.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 된 것이냐?”
황보주아가 말하기도 언짢다는 듯 말했다.
“왕비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왕비가 때린 것이더냐?”
“제가 밑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총으로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맞혀서…….”
묵용감이 멍 자국을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피가 살짝 맺혔구나. 이만 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들어가자. 약을 발라야겠다.”
* * *
백천범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기다란 꼬챙이로 아궁이를 쑤셨다.
“왕비 마마, 소인이 하겠습니다. 옷이 더러워지십니다.”
옆에서 월향이 허리를 숙이고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숨긴 거라 너는 못 찾아.”
그녀가 새까만 덩어리를 아궁이 밖으로 끄집어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봐. 하나 찾았다.”
때마침 들어온 녹하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하시는 겁니까, 왕비 마마. 연기에 그을리면 어찌하시려고요.”
녹하가 옆에 있던 월향에게 눈을 부릅떴다.
“왕비 마마 시중을 어떻게 드는 거야? 마마는 쪼그려 앉아 계시는데 넌 규수처럼 서 있다니?”
월향은 조금 억울한지 나직히 웅얼거렸다.
“소인이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왕비 마마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녹하가 서둘러 백천범을 일으켰다.
“말을 안 들으시면 일으켜 세워 드려야지. 무례일까 봐 겁먹지 마. 우리 왕비 마마는 다른 분들이랑은 전혀 다른 분이시니까.”
키가 큰 녹하가 번쩍 들어 올리니 백천범은 까치발을 들어 바닥을 딛고 섰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잿더미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참, 언니 잠깐만요. 내 계란.”
“깨끗하게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녹하는 월향에게 눈짓한 뒤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끌려 나온 백천범은 묵용감과 황보주아가 정원에 서 있는 광경을 마주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묵용감이 황보주아의 손을 잡은 모습까지 똑똑히 보였다.
무딘 칼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는 듯했다. 그녀는 녹하의 손을 뿌리치고 곧장 기홍의 방으로 들어갔다.
“보셨지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녹하가 인정사정없이 쏘아붙였다.
“잘만 지내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아무리 자극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방 안에 있던 월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녹하는 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직접 가서 봐.”
월규가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피다가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왔다.
“하마터면 왕야께 들킬 뻔했습니다. 두 분은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백천범도 묵용감의 마음에 황보주아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상상했던 모습이 직접 눈앞에 펼쳐지니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듯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묵용감과 황보주아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녀가 괴로운 한숨을 내쉬더니 탁자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제 생각엔…….”
월규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더 모질게 하셔야 합니다. 백 승상 댁에 계실 때 이 씨 부인이 마마께 했던 대로, 황보 아가씨한테 해 보십시오!”
백천범이 기겁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흉악한 사람이 되긴 싫어.”
월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악독한 표정을 지었다.
“모질지 않고서는 큰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약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기홍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 잔꾀는 꺼내지도 마. 월규 너 때문에 왕비 마마의 착한 심성이 변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백천범이 얼른 월규를 감싸고 들었다.
“언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말만 저리 하는 것이지 막상 손도 대지 못할걸요.”
월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을 참 잘 아십니다. 다들 그럴 재목도 되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지요. 왕비 마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기홍 언니가 아주 깜짝 놀랄 텐데요.”
기홍도 작게 웃어 보였다.
“왕비 마마께서도 모진 말씀을 하실 줄 아셔?”
녹하가 백천범을 토닥이며 부추겼다.
“기홍이한테도 한번 들려 주십시오. 얼마나 무서운지 보게요.”
백천범은 탁자에 엎드린 채 한쪽 눈썹을 잔뜩 치켜세우고 음흉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었다.
“황보주아. 감히 왕야께 시집을 오려 하면 본왕비가 가죽을 벗기고 근육을 끊어 놓겠다. 또한 네 살을 조각내고 손발을 잘라 개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다들 반응이 없다. 그녀가 전혀 무섭지 않단 말인가?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왜 아무도… 와, 왕야…….”
묵용감이 어두운 안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싸늘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참나, 그녀는 입으로 떠든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황보주아의 손까지 잡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화를 내려 하다니, 그녀는 화가 안 난 줄 알고?
한참이 지나서야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오늘 새총을 가지고 놀았소?”
“네.”
그녀는 곧 터질 듯한 폭죽처럼 목을 빳빳이 세우고 말했다.
“왜요?”
하, 잘못을 저지르고도 겁을 내기는커녕, 이렇게 당당하다니! 그는 침음을 흘렸다.
“왜 주아를 때린 것이오?”
백천범이 멈칫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당장이라도 부정하고 싶었지만 묵용감의 어두운 낯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의 입에서 사실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때린 게 뭐 어때서요. 다 들으셨잖아요. 가죽을 벗기고 근육을 끊어 놓는다고요!”
“주아가 그렇게 싫소?”
시녀들이 계속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묵용감에게 대적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백천범은 못 본 척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싫어요!”
“내가 그 애를 좋아해서?”
그의 말에 백천범의 눈이 한없이 커지다 빛을 잃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드디어 인정하시는군요.”
그녀가 드디어 터져 버린 폭죽처럼 소리를 질렀다.
“황보주아를 좋아한다고!”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치며 소리쳤다.
“제가 때렸으면 어쩌실 건데요. 왕야도 절 때리시려고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 백천범이 그대로 뛰쳐나갔다.
묵용감은 이를 꽉 깨물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가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네에 앉은 그녀는 멍하니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쓸쓸한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그녀를 힘껏 껴안고 입을 맞추며 다독여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한참 허공을 배회하던 그의 손이 결국 힘없이 내려갔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괴로워한들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기대도 줄 수 없다. 그날 밤처럼 그의 마음을 보여 주면 그녀는 다시 물불 가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겠지……. 그렇게 되면 그는 또다시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상처입힐 수밖에 없다…….
차라리 지금처럼 그를 미워하게 두는 편이 나았다. 희망이 없으면 실망도 하지 않을 테니.
* * *
상처받은 초왕비는 슬픔을 밥으로 풀었다. 그녀는 한 끼에 밥 세 그릇을 몽땅 해치웠다.
초왕은 어두운 낯빛으로 일관하며 끊임없이 냉기를 뿜어냈다. 방 안에 불을 땠지만 시중을 드는 하인들은 그가 뿜는 냉기에 벌벌 떨고 있었다.
황보주아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분히 밥을 먹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식성이 참 좋으십니다. 적당히 드시는 게 좋습니다. 자칫하다 뚱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분주히 젓가락을 놀리던 백천범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황보주아는 할 말을 잃었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백천범은 분명 묵용감에게 혼이 나서 이렇게 성이 났을 터. 백천범이 화나면 화날수록 그녀의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 지금은 묵용감이 옆에 있으니 그녀는 슬며시 미소만 머금었다.
“왕비 마마께 관심을 기울이는데 어찌 화를 내십니까? 화가 많으면 간이 상하는 법입니다. 화 때문에 병이 나면 안 될 일이지요.”
묵용감이 황보주아를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고 어서 먹거라.”
백천범은 밥그릇을 힘껏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월규와 월향이 서둘러 뒤를 쫓았다. 백천범이 홧김에 남월각으로 돌아갈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발걸음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왕비 마마, 황보 아가씨가 왕야께 거짓을 고한 게 분명합니다. 소인이 왕야를 찾아가 해명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으면 왕야께서 오해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냐.”
백천범이 정원을 서성이다 복도 기둥에 기대섰다.
“사실로 만들면 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천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내밀어 안채를 살폈다. 마침 황보주아와 묵용감이 나오고 있었다. 묵용감은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고 황보주아는 처마 밑에 서서 매화를 바라보는 듯했다.
백천범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질구레한 싸움은 재미없으니까 제대로 싸워요. 어때요? 언니가 이기면 내가 떠나고, 내가 이기면 언니가 떠나세요.”
갑작스레 퍼붓는 황당한 말에 황보주아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날 때리겠다고요?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 있단 말입니까?”
상당히 당황한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서재의 문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백천범은 재빨리 손을 뻗어 황보주아의 옷깃을 움켜쥐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때, 서재를 나온 묵용감이 불같이 성을 내며 소리쳤다.
“그만!”
황보주아는 당장 기절할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날 왜 때리려는 것입니까? 왕비 마마가 뭔데 사람을 때려요?”
백천범은 그녀를 붙잡고 있던 오른손 팔꿈치로 배를 떠받치고 가볍게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곤 두 발짝 물러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언니를 때렸다면서요? 그 말이 헛되지 않게 한 거예요.”
묵용감이 단숨에 걸어와 황보주아를 일으켰지만, 황보주아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의 품에 쓰러졌다. 묵용감이 그녀를 황급히 품에 안으며 물었다.
“어찌 된 것이냐? 어디가 아픈 것이야?”
“배가 아픕니다.”
황보주아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비 마마가 제 배를 걷어차서 너무 아픕니다…….”
그가 자상한 말투로 그녀를 다독였다.
“내가 방에 데려다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의원을 부르는 게 좋겠구나.”
그러는 동안 묵용감은 백천범을 보지도, 혼내지도 않았다. 꼭 그녀가 공기라도 된 듯했다. 그는 황보주아를 안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