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백천범이 회림각에 왔을 때 마침 황보주아는 아침 식사 중이었다. 백천범도 사양하지 않고 옆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황보주아의 손에 있는 죽 그릇을 힐끔 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홍 언니가 끓인 죽, 맛있죠? 아가씨는 이가 안 좋으니 죽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게 좋아요.”
황보주아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질리지도 않고 저 얘기란 말인가?
그녀는 백천범이 뭐라 하든 반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멍청한 계집과 말을 섞으면 자신도 멍청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오늘 뭐 할 거예요? 책 읽기? 아니면 붓글씨?”
“…….”
“같이 마조를 하는 건 어때요? 저도 배운지 얼마 안 됐는데 재미있더라고요.”
“…….”
“못 해요?”
그녀는 일부러 크게 놀란 척 요란스럽게 말했다.
“대갓집 규수들 중에 마조를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데.”
황보주아가 마침내 걸려들었다.
“왕비 마마는 백 승상 댁 규수가 아닙니까? 어째서 못하시는지요?”
백천범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저랑 말 안 하려는 줄 알았잖아요.”
“…….”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제가 조금 봐드릴 테니 판돈 좀 챙기세요.”
“…….”
“남한테 얹혀살고 있으니까 돈을 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거예요. 돈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
“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결국 황보주아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 좀 귀찮게 하십시오.”
그 말이야말로 백천범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귀찮으면 떠나면 되잖아요. 여길 떠나면 귀찮게 할 사람도 없어요.”
황보주아가 그제야 그녀의 속셈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였군요. 내 앞에서 날뛰고 재잘거리면 떠날 줄 알고? 내가 떠나려 해도 오라버니께서 못 가게 막으실 거예요. 하지만 왕비 마마는…….”
그녀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계속 소란을 피우다간 오라버니도 참지 못하시고 내쫓으시겠죠.”
“저는 초왕비예요. 왕야께서도 절 내쫓진 못하시죠.”
“폐위하면 그만인 것을요.”
“잘못한 일도 없는데 무슨 근거로 폐위하겠어요?”
“아들이 없지 않습니까?”
“왕야께서 그 일은 급하지 않다고 하셨어요. 몇 년 지나서 낳아도 늦지 않다고 하셨죠.”
“차라리 귀신을 속이세요. 오라버니께서 왕비 마마와 아이를 낳으신다니. 꿈도 크시지.”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백천범은 만두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음식을 먹는 속도가 황보주아의 말을 빠르게 받아친 것에 못지않게 빨랐다.
옆에 서 있던 기홍이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왕비 마마, 천천히 드십시오. 그러다 사레 걸리십니다.”
백천범은 콩국을 한 모금 들이켜 입 안에 있던 음식을 넘겼다. 황보주아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마조 해요.”
황보주아는 심호흡을 하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백천범이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안 하면 아가씨만 손해라고요!”
황보주아는 걸음을 더 빨리 옮겼다. 묵용감의 서재 앞에 선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붓글씨에 열을 올리던 황보주아가 별안간 깜짝 놀라며 문 앞을 바라보았다. 학평관이 기척도 없이 와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총 관리인이 어찌…….”
“주아 아가씨, 오늘은 왜 이곳에서 붓글씨를 쓰시는지요?”
학평관이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왕야께서 아가씨께 저쪽 곁채를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황보주아가 괴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가 성가시게 굴어서요. 이곳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니 잠시 숨어 있는 것입니다.”
“외부인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아가씨의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황보주아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총관리인의 눈에 제가 외부인으로 보입니까?”
“그것이…….”
학평관의 웃음기가 더욱더 짙어졌다.
“굳이 구분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 왕비 마마께서 왕야의 안사람이시니까요.”
황보주아가 참지 못하고 성을 내었다.
“백천범이 대체 뭘 해 줬길래 하나같이 그 애 편만 드는 겁니까? 이보세요, 관리인! 절 어릴 때부터 알았으니 제가 오라버니와 어떤 사이였는지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초왕비는 저였습니다. 백천범은 꿈도 못 꿨을 거라고요!”
“물론 소인도 아가씨와 왕야의 사이가 돈독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왕야께서는 인정이 많으시니 아가씨께서 그간 힘겹게 지내신 것을 아시고 지켜 주시는 게 아닙니까. 그렇다 한들 아가씨께서도 본인의 신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지내시면 왕야께 폐를 끼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황보주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오라버니 말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왕 오셨으니 마음 편히 지내십시오. 왕야께서도 아가씨를 지켜 드릴 방법을 찾고 계십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집에 머물면서 그 집의 안주인에게 대항하려 하시는 건 안 될 일입니다.”
황보주아가 억울해하며 말했다.
“어딜 봐서 제가 대항하려 한다는 것입니까? 왕비 마마가 제게 맞서려 하는 것입니다. 왕비 마마 때문에 이곳까지 숨어들어 왔거늘, 저더러 어찌하라는 것입니까?”
“왕비 마마께서 아이 같은 면이 있긴 하십니다. 부디 아가씨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
황보주아는 결국 묵용감의 서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복도에 선 그녀의 눈에 몇몇 시녀들과 눈사람을 만드는 백천범이 들어왔다.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황보주아는 손화로를 안고 가만히 서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백천범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줄곧 백천범을 업신여겼다. 그래 봤자 백 승상의 천덕꾸러기 서녀가 아닌가.
소문에 의하면 백천범의 친모는 백천범을 낳고 외간 남자와 도망쳤다고 하니, 그녀는 천한 여인이 낳은 천한 종자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백천범을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자신이 백천범을 얕잡아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 많은 하인들이 충심을 다해 떠받들어 준단 말인가. 심지어 묵용감마저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어린 계집이 대체 뭐라고 다들 충심을 다하는지 황보주아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어려서부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며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던 고귀한 존재가, 지금은 세상에 홀로 남고 말았다. 남에게 얹혀사는 것은 물론이고, 하인에게조차 불손한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세상은 왜, 왜 이렇게 불공평하단 말인가?
그렇게나 번영했던 집안이, 수백 명의 가족이, 드높은 영예를 누리던 가문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이 피맺힌 원한을 갚지 않으면 그녀는 원통함에 절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화단에 다다랐다. 눈망울에 계속 차오르던 눈물이 결국 손 쓸 틈도 없이 두 볼 위로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슬픔과 울분이 수문이 열리듯 한순간에 터지고 말았다.
“왜 그래요?”
그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 왔다.
“저 때문에 화난 거예요?”
깜짝 놀란 황보주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아른거리는 눈물 너머로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는 백천범이 보였다.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세우고 눈물을 닦았다. 이런 꼴불견인 모습을 보일 줄이야.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뭐 하러 오셨습니까. 비웃으시려고요?”
“그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온 거예요. 언니, 저 때문에 우는 거예요?”
눈물을 모두 닦아낸 황보주아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왕비 마마가 뭐라고 제가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백천범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 언니를 정말 내보내고 싶어요. 왕야가 저 말고 다른 여인을 생각하는 건 상상하기도 싫거든요. 전 왕야를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하지만 언니가 왕야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왕야와 언니는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못 하겠어요. 언니도 처지가 딱하잖아요. 떠나기 싫으면 계속 여기서 지내세요. 뭐, 언니랑 친구라도 해 볼게요.”
예상치도 못한 말이 백천범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황보주아는 잠시 넋을 놓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라버니 곁에 다른 여인이 있는 건 싫어요. 우린 친구가 되긴 어렵겠습니다. 저도 왕비 마마의 딱한 처지를 잘 압니다. 이곳에서 나간다 한들 친정에서도 받아 주지 않겠죠. 지난번에 얘기한 사 씨는 어디에서 일하는지요? 오라버니께 부탁해서 두 분을 이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친구가 없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말을 마친 그녀가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황보주아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까짓 게 뭔데 나더러 딱하대. 두고 보라지.”
* * *
묵용감이 돌아왔을 때 황보주아는 홀로 추운 눈밭에 서 있었다. 빨간 치마를 입은 터라 그녀의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긴 머리카락이 세차게 흩날릴 만큼 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멀찍이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느끼는 슬픔을 그가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느니 가족들처럼 죽임을 당하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변치 않았다고 했지만 묵용감이 보기에 그녀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았던 그는 그녀의 눈망울에서 낯선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한들 그녀는 유년 시절을 함께한 가족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하길 바랐다.
그가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주아야, 바람이 이리도 찬데 어찌 밖에 서 있는 것이냐. 춥지 않느냐?”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의 눈빛에 곧장 생기가 돌았다. 이내 그녀가 자조하듯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왕비를 피해 있었습니다.”
묵용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왕비가 또 성가시게 한 것이냐?”
“그뿐이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라버니께서 절 대하시는 게 예전과 같지 않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왕비가 절 너무도 심하게 업신여깁니다. 늘 저를 내쫓으려는 생각뿐이라 견디기 괴롭습니다. 차라리 제가 떠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녀는 슬쩍 제 왼쪽 손목을 감쌌다.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알아차린 묵용감이 물었다.
“손은 어찌 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