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저녁이 되자 두 여인의 전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묵용감이 서재에서 공무를 보는 동안, 백천범과 황보주아는 그의 침실 탁자에 앉아 투견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보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가십시오. 왕비 마마가 올 곳이 아닙니다.”
백천범도 지지 않고 말했다.
“나가야 할 사람은 아가씨죠. 여긴 왕야의 침실입니다. 저는 오늘 이곳에서 잘 겁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오라버니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그럼 왕야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그래요.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하시나 지켜보십시오.”
“전 왕야와 자고 싶습니다. 아가씨도 그러십니까?”
“…….”
“저흰 부부예요. 함께 자는 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아가씨는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입니다. 이렇게 왕야의 침소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
“대학사 가문의 딸이라면서 예의범절은 배우지 않았나 보죠?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시네요.”
황보주아는 이를 꽉 깨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처럼 단정하고 현명한 여인이 이런 어리고 못 배운 계집과 다투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뻔뻔한 백천범이 이곳에서 자겠다고 하면 그녀를 어린아이로 여기는 묵용감은 늘 그랬듯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둘 것 같았다. 황보주아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 없었다.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모르십니까? 오라버니께서 왕비 마마를 들이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은 접니다. 자꾸 이렇게 저희 사이에 끼어드시는 게 재미있습니까?”
“전 초왕비예요.”
“…….”
“왕야는 제 지아비시고 저는 왕야의 아내죠.”
“…….”
“저는 왕야랑 잘 거예요.”
“왜 이리 억지를 부리십니까?”
“전 초왕비예요.”
“…….”
“왕야는 제 지아비시고 저는 왕야의 아내죠.”
“…….”
“저는 왕야랑 잘 거예요.”
“…….”
잠시 뒤, 일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묵용감은 기 싸움을 벌이는 두 여인의 모습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주아야, 잠시 나가 있거라. 왕비와 잠시 얘기 좀 해야겠다.”
“오라버니,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십시오. 왕비 마마께도 좋을 게 없습니다.”
“알고 있다.”
황보주아는 백천범을 노려보다가 밖으로 향했다. 문 앞에 남아 둘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려 보니 녹하가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입술에 잔뜩 힘을 주고 웃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싫은지 당장이라도 뺨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방에서 멀리 떨어졌다.
꿈같던 그날 밤을 제외하고 백천범은 며칠 만에 묵용감과 단둘이 있게 되었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의 손은 건조하고 따스했지만 그녀의 손은 조금 축축해져 있었다.
“왕야께서 먼저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무슨 말을 해 줬으면 좋겠소?”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왜 갑자기 차갑게 대하시는 거예요?”
“일이 바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오.”
“핑계 대지 마세요. 아가씨한테 신경 쓸 시간은 있으셨잖아요.”
“…그 애는 다르오.”
“어디가 다른데요? 아가씨가 그렇게 좋으세요?”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녀의 손을 놓고 입을 열었다.
“가여운 아이오.”
“저보다 더요?”
“가족 중에서 주아 홀로 살아남았소.”
백천범도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가엽긴 하네요. 왕야께서는 그 이유로 계속 아가씨의 편을 드는 것이고요. 그렇죠?”
“하인들은 전부 그대의 편이 아니오? 주아의 역성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소. 설령 둘이 치고받고 싸운다 해도, 주아는 그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말다툼도 똑같소. 그대에게는 편을 들어주는 녹하와 월규가 있지만 주아에게는 나뿐이오.”
눈을 내리깐 백천범이 속으로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전 모든 사람과 왕야를 바꾸고 싶은걸요…….’
“게다가 주아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소.”
백천범이 잦아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 주었다 한들 몸과 마음을 다 내어 줄 필요는 없죠. 사 제독님도 절 구해 주셨잖아요.”
그 이름이 나오자 묵용감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그자를 생각하는 것이오?”
“왕야께서 먼저 제게 신랑감을 골라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이미 고르지 않았소? 그자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마시오.”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못마땅했다. 그를 골라 놓고 아직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다니!
“저한테는 말도 못 꺼내게 하시면서, 왕야는요? 혼사도 올리지 않은 약혼녀와 매일 껴안고 주무시기나 하고.”
묵용감이 놀란 눈을 깜박였다.
“누가 그러오? 그런 일은 절대 없소.”
“그럼 그 아가씨가 왜 왕야의 침소에 있는 건데요?”
“그대가 오니 주아도 같이 들어온 것이 아니오.”
“아가씨가 여기서 안 자면, 어디서 자는데요?”
“예전에 그대가 쓰던 방에서 자오.”
“하! 어떻게 제 방을 줄 수 있어요?”
“방 한 칸에 불과할 뿐이거늘, 인색하게 굴지 마시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디에서 묵어요?”
묵용감은 잔뜩 성이 난 그녀의 모습 앞에서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갖은 복잡한 일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녀와 장난스럽게 몇 마디 주고받은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드리운 먹구름을 걷어 내 주는 햇빛이었다.
“내가 들어오기 전, 그대가 주아에게 했던 말 기억하오?”
“무슨 말이요?”
“그대는 초왕비고, 내 아내고, 나와 함께 잘 것이라는 말.”
“그게 왜요?”
“그게 내 답이오.”
백천범은 골똘히 생각했지만,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어젯밤 정원 밖에 서 계셨던 건 제가 보고 싶으셔서 그런 거예요?”
“그렇소.”
“그럼 오늘은 왕야랑 잘래요.”
“안 되오.”
“왜요?”
“주아가 상처받을 것이오.”
백천범이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황보주아의 마음은 끔찍이도 생각하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걱정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만 돌아가시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주아를 적으로 여기지 마시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뇨. 아가씨가 저를 적으로 여기는 거예요.”
* * *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황보주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라버니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거절당하셨지요?”
백천범은 지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왕야께서 아가씨는 예전 제 방에서 잔다던데요.”
황보주아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도 전 왕야와 더 가까운걸요.”
“전 왕야 품에 안겨서 잔 적도 있어요. 그보다 가까워요?”
“…….”
이런 말싸움에서 황보주아는 영원히 백천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묵용감과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녀는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예의범절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명문가 규수들은 이런 일을 암시하듯 언급하는 경우는 있어도 대놓고 말할 엄두는 못 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정을 언급하다니. 기녀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부끄러움도 모르는 계집과는 말을 섞을 가치도 없었다. 황보주아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러나 백천범이 자꾸만 화를 돋우니 자신도 똑같이 유치하고 우스운 계집이 되고 있었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 된다. 계속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아직 목표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마음이 번잡해질 수는 없었다.
백천범이 떠난 뒤, 그녀가 묵용감의 침소 앞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에서 묵용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그녀가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녹하가 묵용감의 옥관을 풀고 있었다. 비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카락이 그의 등 뒤에 가지런히 드리워졌다.
문가에 서 있던 그녀는 조금 망설였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묵용감이 손을 저어 녹하를 내보냈다.
녹하가 황보주아를 지나치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서둘러 주십시오. 왕야께서는 아침 일찍 조정에 가셔야 하니까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녹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손히 예를 갖춘 뒤 방을 나섰다.
황보주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인들마저 어찌 하나같이 백천범처럼 꼴불견이란 말인가. 주인 앞에서 감히 저런 말을 하다니. 그저 가볍게 호통만 치는 묵용감의 태도 역시 이상하기만 했다. 그녀가 없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예전의 무섭고 위엄 있던 초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라버니, 아랫것들에게 너무 잘해 주십니다.”
“다들 오랫동안 함께 지낸 터라 조금 제멋대로일 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그가 그제야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황보주아가 빗을 집어 들고 조심스레 그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오라버니. 몇 년간 만나지 못했으니 제가 변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자꾸만 왕비와 다투니 유치하고 우습다고 여기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방금 일은 제 잘못입니다. 엄연히 왕비인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흐른 만큼 모든 게 변했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래도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저는 변함없이 과거의 그 주아입니다. 저는 그저, 그저 왕비와 오라버니가 함께 있는 게 싫을 뿐입니다…….”
묵용감이 그녀의 손에서 빗을 빼앗고 의자에 앉혔다.
“주아야. 너는 내게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한다. 오랜 시간 쌓아 온 우리 둘 사이의 감정과 네가 날 구해 준 일을 어떻게 잊겠느냐. 네 말이 맞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모든 게 변하는 법이지. 그렇다 한들 난 널 내치지 않겠다.”
황보주아를 향한 묵용감의 눈빛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너와 나, 태자, 여섯째, 그리고 위지문우尉遲文宇와 함께하던 시간들.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은 내게 소중한 추억이다. 고독하게 지내는 동안 모두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네가 내 곁에 다시 와 주었으니 널 누구보다 잘 돌봐 주마. 네가 무얼 하든 내겐 여전히 옛날의 주아다. 네 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