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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68)화 (267/1,192)

제268화

그녀가 마침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젯밤 눈이 많이 내렸는데 함께 눈사람을 만드는 건 어떠세요?”

황보주아는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제는 서로 얼굴을 붉혀 놓고, 오늘은 넉살 좋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다니. 대체 뭐 하자는 생각인지…….

그녀는 백천범처럼 한마디로 거절했다.

“전 그런 걸 싫어해서요.”

“그럼 눈싸움도 좋습니다!”

“…….”

“아니면 연못에서 얼음 썰매를 타는 건요? 쭉쭉 미끄러지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

“새총으로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맞히는 건 어떻습니까?”

“…….”

한참이나 떠들어도 그녀가 묵묵부답이니 백천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가씨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황보주아는 속으로 발끈하며 생각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누가 그런 걸 한단 말인가?’

“어릴 때 너무 둔해서 배우지 못한 거예요? 괜찮아요, 제가 가르쳐 줄게요!”

황보주아는 묵용감을 힐끔거렸다. 그는 책을 넘길 뿐 두 사람의 대화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나가 주시겠습니까?”

“왜요?”

백천범이 당당하게 말했다.

“여긴 제 집이니까요.”

황보주아는 선비가 병사를 만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다. 무지막지한 사람에게는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백천범 또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짜증 나는 계집 때문에 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다.

책장 앞에 서 있던 묵용감은 몸을 돌려세우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겨우 웃음을 참은 그가 황보주아를 대신해 말했다.

“왕비, 기홍에게 점심은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전해 주시오.”

백천범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은 월향이에게 시키면 될 걸 왜 저더러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라고 하면, 그냥 가시오.”

백천범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자 월규와 월향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황보주아가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셋째 오라버니, 제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왕비께 말씀 좀 해 주시면 안 되어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다. 왕비도 악의가 있는 게 아니니, 너도 왕비와 잘 지내려고 노력해 보거라.”

“전 왕비가 싫습니다. 백씨 집안 사람이지 않습니까.”

“왕비는 백여름과 다르다.”

황보주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정말 왕비를 좋아하시는 것입니까?”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왕비이지 않느냐.”

황보주아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녀는 묵용감이 저렇게 자그맣고 멍청한 계집을 좋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는 초왕비이니 어느 정도의 예의는 갖춰야 했다. 그래, 그게 다였다. 마음을 다잡은 황보주아가 다시금 물었다.

“오라버니, 정말 저보다 왕비의 글씨가 더 뛰어납니까?”

“물론 아니지.”

“그럼 왜 왕비의 말에 동의하셨습니까?”

“왕비는 글자도 잘 쓰지 못하는데, 어째서 왕비와 똑같이 하려 드느냐?”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굳이 백천범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문을 나서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자 월규가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앞으로 잘 모르시는 것은 절대 아는 척하지 마십시오. 들키면 비웃음만 사는 법입니다. 황보 아가씨는 초서를 흘려 쓰고 계셨습니다. 보통 실력으로는 아예 쓰지도 못하는 서체지요. 마마께서는 해서도 잘 못 쓰시는데 어찌 서체를 평가하십니까. 옆에서 보는 소인이 다 부끄러웠습니다.”

백천범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흠칫 놀랐다.

“그럼 왕야께서 왜 내 말에 동의해 주신 거야?”

“왕비 마마의 체면을 살려 주려고 그러셨겠지요. 왕비 마마가 난처하실 테니까요!”

백천범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이거 봐, 왕야께서는 날 더 좋아하시지?”

월규가 피식 웃더니 놀리듯 말했다.

“그럼요. 이런 심부름도 왕비 마마께만 시키지 않으십니까?”

이날, 묵용감은 오랜만에 그리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은방울처럼 회림각 곳곳에 울려 퍼졌다. 어디든 백천범이 있으면 떠들썩해지기 마련이었다. 다만 최근의 백천범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곤 했다. 그는 창문 앞에 서서 이따금 기홍의 방문 앞을 오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꽁꽁 얼었어요, 꽁꽁!”

신이 난 백천범이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황보주아가 짜증 난 표정을 짓더니 읽고 있던 책을 탁 내려놓았다.

“진짜 시끄럽네.”

고개를 숙인 채 서예를 하고 있던 묵용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조용한 걸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찌 참고 계십니까?”

묵용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왕비를 어린아이라 여기면 된다.”

탐탁지 않은 반응에 황보주아가 입을 삐죽였다.

“백여름의 집에서는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답니까? 열다섯이 저렇게나 작다니. 정말 어린아이 같습니다.”

“가여운 시절을 보냈다고 말해 주지 않았느냐. 네가 백여름을 증오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왕비에게 조금만 잘 대해 주면 좋겠다.”

황보주아가 오히려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마음이 너무 여리십니다.”

묵용감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백천범이 손에 쟁반을 들고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보 아가씨, 얼린 감 좀 드셔 보세요.”

새하얀 쟁반에 커다란 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커다랗고 탱탱한 감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황보주아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안 먹습니다. 가져가십시오.”

“얼마나 좋은 감으로 만든 건데요. 특별히 맛보라고 가져왔으니 드셔 보세요. 정말 달아요!”

“안 먹습니다.”

“왜요?”

백천범이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가 안 좋으세요? 그래서 차가운 음식을 못 드시나요? 나이도 많지 않은데 왜 이가 안 좋아진 거예요?”

백천범은 감 하나를 들고 보란 듯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저는 이가 튼튼해서 뭐든지 다 잘 먹어요.”

“…….”

백천범이 이번에는 쟁반을 들고 묵용감 앞으로 다가갔다.

“왕야, 하나 드셔 보세요.”

묵용감은 여전히 붓끝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거기 두시오.”

백천범은 감 하나를 그의 책상에 내려놓고는 다시 황보주아에게 향했다.

“보세요, 왕야께서도 드시잖아요. 아가씨는 정말 못 먹겠어요?”

황보주아는 한번 크게 심호흡한 뒤, 얼린 감을 하나 들고 작게 베어 물었다.

“이가 안 좋으니까 조심조심 드세요.”

“제 이는 멀쩡합니다.”

“그럼 아까는 왜 안 먹겠다고 했어요?”

“…….”

“어쨌든, 기홍 언니한테 아가씨 식사는 죽으로 준비하라고 해 둘게요. 언니가 죽을 참 잘 만들거든요!”

“…….”

“그럼 전 가 볼게요. 천천히 드세요.”

백천범은 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문을 나서며 말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으니 꼭 조심해야 해요. 이가 상하면 큰일이니까요.”

황보주아는 심호흡을 몇 차례나 더 해야 했다. 백천범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녀는 들고 있던 감을 힘껏 내팽개쳤다.

묵용감이 붓을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

“주아야.”

황보주아가 흠칫 놀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탓에 묵용감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녀는 얼른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저는 정말 왕비가 싫습니다. 제발 내보내 주십시오.”

* * *

문 앞에 서 있던 월향과 월규는 백천범이 밖으로 나오자 입을 가리고 숨죽여 킥킥거렸다.

월규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왕비 마마, 황보 아가씨가 왕비 마마를 정말 싫어하는 듯합니다.”

월향도 질세라 거들었다.

“왕비 마마, 이렇게 하면 정말 아가씨를 내보낼 수 있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답했다.

“안 나가면 내가 매일 찾아가서 성가시게 할 거야. 귀가 따갑도록 귀찮게 하면 안 나가고 버티겠어?”

월규와 월향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 왕비는 정말 평범한 구석이 없었다. 보통 다른 집 안주인이 새 여인을 내쫓을 땐 계략을 짠다거나, 지아비가 집을 비웠을 때 사람을 써서 멀리 보내곤 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이 방법은 어이가 없긴 해도, 무척 온건한 수준이었다.

* * *

점심 식사가 준비되자 세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묵용감은 때때로 황보주아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백천범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왕야, 제게는 안 덜어 주십니까?”

“기홍이 덜어 주고 있지 않소?”

“저는 왕야께서 덜어 주신 음식이 먹고 싶습니다.”

묵용감은 그녀를 응시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기 한 점을 그녀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황보주아가 언짢은 듯 말했다.

“셋째 오라버니, 자꾸 버릇을 들이시면 안 됩니다. 손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가씨도 손이 있으면서 왜 자꾸 왕야한테 덜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오라버니께서 덜어 주고 싶어 하시니까요. 왕비 마마가 무슨 상관입니까?”

“왕야는 제 지아비시니까요.”

“…….”

황보주아는 끓어오르는 화를 힘겹게 억눌렀다. 정말이지 가증스러운 계집이었다.

묵용감이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그만들 하고 어서 밥이나 드시오.”

백천범은 그릇에 남은 마지막 밥알을 입에 넣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 먹었어요.”

그녀가 황보주아의 밥그릇을 힐끗 보았다.

“아가씨는 먹는 게 어찌 이리 느립니까?”

황보주아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깜빡 잊었네요. 이가 안 좋으시지요. 그럼 천천히 드십시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황보주아는 연신 심호흡을 했다. 화가 끓어오르다 못해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묵용감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기홍과 녹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갔다.

묵용감의 시선은 줄곧 백천범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비로소 황보주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저지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에 원하는 대로 하게끔 두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고, 그다음은……. 그 또한 황보주아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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