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그녀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한 발 한 발 정원으로 내디뎠다. 투각된 벽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그랬다. 하늘에 별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어둠에 가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유난히 밝게 빛났다. 이토록 시린 겨울밤을 비추는 두 개의 별이 그녀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했다.
그녀는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만들어 낸 환영일까 싶어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멀어진 줄만 알았던 그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그의 두 눈에서 그리움과 뜨거운 감정을 읽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갈망과 같은 종류였다. 그래, 지금까지 이토록 그를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정말 그에게 사정이 있다면, 그 때문에 난처한 처지라면, 그녀는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오늘 밤만큼은 그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의 온기가 필요했다. 이제는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그가 정원 문을 열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익숙한 그의 품이 추운 겨울밤 얼어붙은 그녀의 몸을 녹이고,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꼼지락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이라면, 부디 깨지 않길 원했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곧 조금씩 힘을 주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의 품에 머물렀다.
그가 잔뜩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천범.”
“쉿.”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무 말 마세요.”
그녀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엉망으로 뒤엉켰던 마음이, 그의 품에서 천천히 풀려 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의지할 곳은 그밖에 없다. 그의 품은 그녀가 쉴 수 있는 유일한 쉼터였다.
어떤 대화도 없었다. 숨결이 뒤엉키는 일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그저 서로를 껴안고 온기를 나누었다…….
* * *
눈을 뜬 백천범은 유독 정신이 또렷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고는 장막을 걷어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스며든 환한 빛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백천범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바깥방에 있던 월향이 들어왔다.
“왕비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지금 몇 시진이야?”
“진시(오진 7시~9시)가 다 되어갑니다.”
진시라면 그가 곧 조정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녀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뛰어 내려왔다.
“밖에 눈이 왔지?”
“예. 아주 많이 왔습니다. 새해가 되기 전에 큰 눈이 여러 번 내렸으니 내년은 풍년이 되겠어요.”
백천범은 옷을 대충 걸치고 창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구경했다. 소복이 쌓인 눈으로 바깥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찬바람에 곧바로 몸이 덜덜 떨리더니 재채기가 났다. 월향이 안감에 솜을 덧댄 옷을 들고 다가왔다.
“어서 입으십시오. 감기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괜찮아. 마음은 아주 따뜻하거든.”
그녀가 눈이 안 보일 만큼 활짝 웃더니 얌전히 팔을 들고 옷을 입었다.
월향이 그녀를 응시하더니 또다시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지나서 월향이 또 한 번 그녀를 살펴보았다.
백천범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계속 보는 거야? 내 얼굴에 꽃이 핀 것도 아닌데.”
“마마께서 평소와 조금 다르신 듯해서요.”
“어디가 다른데?”
“조금 설명하기 힘듭니다.”
월향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가 달라지긴 달라졌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다. 황보주아가 저택에 온 뒤부터 시녀들은 그녀의 눈매에 서린 희미한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주 얇은 천이 그녀의 얼굴을 덮은 듯, 웃는 모습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웃음에 진심이 묻어났다. 잘 웃고 기뻐하던 예전의 어린 왕비로 돌아온 것 같았다.
“왕비 마마,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럴 일이 뭐가 있겠어.”
백천범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냥 기분이 좋아.”
“왜요?”
“눈이 왔잖아!”
첫눈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들떠 있다고? 월향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왕비 마마, 눈사람을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까? 이번에는 저를 눈 속에 파묻으시면 안 됩니다.”
백천범이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침 먹고 같이 회림각에 가자.”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월규가 그녀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어제 녹하 언니한테 돈을 잃었으니 오늘은 되찾아 올 차례입니다.”
백천범은 거울을 통해 머리를 빗겨 주는 월규를 바라보았다.
“결심했어. 황보 아가씨가 왕야한테 시집오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월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를 안고 마구 흔들어 댔다.
“아이고, 우리 왕비 마마가 드디어 깨달으셨군요! 암요, 그러셔야 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밀고 나가시면 왕야의 혼인도 막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질투 많은 부인이나 심술궂은 여인이라 불러도, 왕야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요!”
월향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왕비 마마께서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이시더니… 마음을 다잡으셨군요! 왕비 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식사를 차릴 테니 다 드시면 함께 회림각으로 가시지요.”
백천범은 어려움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그동안은 묵용감이 그녀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었지만, 이제 그 생각이 틀렸음을 확실히 알았다. 묵용감은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밤중에 그녀의 처소를 찾았겠는가? 그는 그녀가 그러하듯 너무 보고 싶어서, 그리움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그녀를 원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아직 그녀가 있다면, 백천범은 황보주아든 다른 여인이든 전부 돌려보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묵용감에게는 행동을 강요할 수 없었다. 예전에 황보주아와의 감정이 어떠했든 간에, 그의 목숨을 구해 준 것만으로도 그녀를 쉽게 내치지 못할 만큼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직 황보주아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천범이 느끼기에 그는 자신을 더 좋아했다. 그녀는 그의 눈망울에서 일렁이던 고통과 치열한 갈등을 보았다. 그러니 그녀는 악인을 자처할 생각이었다. 그는 계속 의리 넘치는 사내로 지내면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 황보주아를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녹하의 말대로 그녀를 관아에 고하면 빠르게 붙잡힐 테니. 하지만 그녀는 그런 방식을 쓰고 싶지 않았다. 묵용감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황보주아 스스로 이곳을 떠나게 하는 방법뿐이다. 왔을 때처럼 조용히 떠나는 것,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사람처럼 떠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는 월규와 월향을 데리고 씩씩하게 회림각으로 향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요동치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싸움을 피해 왔지 먼저 싸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것을 되찾아야 했다.
월규와 월향도 그녀의 기세에 전염되었는지 사나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개는 빳빳이 치켜세우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옆을 지켰다.
중문에 다다른 백천범이 문지기에게 물었다.
“왕야께서는 돌아오셨느냐?”
“왕비 마마께 아룁니다. 왕야께서 일각 전쯤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그녀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월향과 월규를 불렀다.
“들어가자.”
왕비와 두 시녀의 흉흉한 기세에 문지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왕비가 왕야와 싸움을 벌이려 한단 말인가?
백천범이 워낙 빠르게 걷는 탓에 월규와 월향이 잰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묵용감의 방 앞에 선 백천범은 문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묵용감이 황보주아의 손을 잡고 글씨를 쓰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그녀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던 모습과 똑같았다. 남월각에서부터 북돋아 온 기운이, 애써 끌어모은 용기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뒤에 서 있던 월규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황보주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왕비 마마, 조심하십시오. 넘어지십니다.”
백천범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왕야, 황보 아가씨에게 붓글씨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까?”
묵용감은 옅은 웃음기가 서린 눈으로 짧게 대꾸했다.
백천범은 책상 옆에 서서 글씨를 감상하는 척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황보 아가씨는 대학사 가문의 규수가 아닙니까? 어째서 글자도 쓰지 못하십니까? 어릴 때 배우지 않았습니까? 이 세로획을 보십시오. 아래쪽에 틈이 생겨 꼭 빗자루 같은 게 보기 흉하지 않습니까. 먹을 너무 적게 묻혔나 봅니다. 게다가 이 획은 뱀처럼 구불거려 소름이 끼치네요. 글자가 전부 삐뚤거리니 알아볼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제가 쓰는 것만 못하군요.”
황보주아는 귀신이라도 본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밑도 끝도 없이 찾아와 악평을 쏟아 내다니. 게다가 붓글씨는 알지도 못할 게 뻔한데 뭘 믿고 이리 조잘댄단 말인가?
월규는 회림각에서 묵용감의 먹 시중을 든 적이 있었기에 그래도 조금은 서예에 대해 아는 게 있었다. 그녀가 슬쩍 백천범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만하라는 뜻을 전했다. 황보주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러 오긴 했지만, 모르는 걸 아는 체하면 그녀만 더 우스워질 뿐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왕야, 안 그렇습니까?”
묵용감은 새어 나올 듯한 웃음을 참고 그렇다고 답했다.
놀란 황보주아가 황망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글씨가 백천범보다 못하다니. 그녀는 대학사의 딸이다. 붓글씨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연습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백천범이 뭘 믿고 이리 나오는지 보기 위해 붓을 내밀었다.
“얼마나 잘 쓰시는지 보고 배우게 몇 글자만 써 주십시오.”
백천범은 그녀의 손을 쳐다보지도 않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난 붓글씨를 싫어해서요.”
“…….”
붓글씨를 싫어한다는 사람이 남의 글자는 혹독하게 평가하다니,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월규는 슬슬 초조해졌다. 붓글씨는 어린 왕비의 약점이나 다름없었기에 계속 대화를 이어가다간 금세 밑천이 드러날 게 분명했다.
한편 백천범은 자신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믿었다. 대학사 가문의 딸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그녀의 패기가 점점 더 충만해졌다.
“왕야께서 예전에 붓글씨를 가르쳐 주셨는데, 제가 배우기 싫어하니 강요하지 않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