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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66)화 (265/1,192)

제266화

궁에서 나오던 묵용감은 마침 말에서 허둥지둥 내리는 진왕과 마주쳤다. 진왕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라 정말 급하거나 풍족한 생활을 과시할 때가 아니면 말에 오르지 않았다. 특히 이런 엄동설한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헐레벌떡 뛰던 진왕은 묵용감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폐하께서 형님을 급히 부르셨다길래 깜짝 놀라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뛰어왔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단 말이냐?”

묵용감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날 그 자리에서 처형하실까 봐?”

진왕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제가 폐하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봅니다. 정말 그럴 패기가 있으셨다면 저도 진작 이 세상을 하직했을 텐데요.”

묵용감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진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가시지요. 한 잔 들이켜면서 형님 때문에 놀란 가슴을 가라앉혀야겠습니다.”

묵용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자고 할 참이었다.”

진왕은 늘 술을 마시던 곳, 하당월색을 향해 내달렸다. 대낮인지라 기녀들은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저녁이 되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곳이었지만, 낮에는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조용한 자리를 원했던 진왕은 일부러 이곳을 찾아 온 것이었다.

그는 연당을 좋아했다. 다리와 연결된 입구를 제외하고는 세 면이 연못에 둘러싸여 누가 엿들을 걱정이 없었다.

진왕과 초왕은 좌식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진왕이 청색 도자기 병에 담긴 매화주를 초왕의 잔에 천천히 따랐다.

“셋째 형님, 새로 담근 매화주 맛 좀 보십시오. 어떠십니까?”

초왕이 작은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맑은 술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이 군자처럼 온화한 느낌이었다. 진왕이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그는 잔을 마저 비워 버렸다.

“조금 독했으면 더 좋았겠구나.”

진왕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께서도 고귀한 친왕이신데 풍류를 좀 즐기십시오. 거칠게만 행동하시면 여인의 환심을 얻기 힘든 법입니다.”

묵용감이 눈을 내리깔았다. 누군가의 환심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한 사람의 기분을 맞춰 주면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진왕은 그가 예왕의 일을 생각하는 줄 알고 표정을 바꾸었다.

“형님이 보기에 누구의 짓일 가능성이 큽니까?”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이리도 명확하지 않느냐?”

“백 귀비요?”

“백여름도 손을 썼겠지. 둘이 안팎에서 협력해야 이런 계략을 짤 수 있다.”

진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증거만 분명했어도 폐하께 그 부녀를 잡아다 바쳤을 텐데요.”

“폐하께서 모르시리라 생각하느냐?”

묵용감이 직접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슬쩍 일깨워 드렸으니 폐하께서도 꿰고 계실 터, 안 그랬다면 이렇게 좋은 기회에 날 풀어 주지 않으셨겠지.”

진왕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사건을 종결하시는 겁니까?”

“그래. 제대로 조사를 하자니 연루된 일이 너무 많은 게지. 체면이 오죽 깎이는 일이더냐.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예왕이 서복궁에서 묵은 일은 넘길 수 없겠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폐하를 두고 외도를 한 것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알고도 눈감아 주신단 말입니까?”

“백여름과 백 귀비의 목을 칠 수 없으니까. 그들을 이용해서 날 견제해야 하지 않느냐.”

진왕은 머리가 아픈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다니, 참 슬픕니다. 역시 한량처럼 지내는 게 좋네요.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게 참된 인생살이 아니겠습니까?”

묵용감이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다 입을 열었다.

“종종 극단적이시긴 해도 늘 천하와 백성을 위하시는 분이다. 태평성세를 만들어 좋은 황제가 되려 하시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폐하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듯하구나. 폐하 본인 역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끼어 괴로우시겠지.

압박을 받다 보면 시비를 구별할 때 착오가 생기는 법이다. 다만 언젠가는 폐하께서도 깨달으시리라 믿는다. 내가 정말 걱정되는 건 폐하도, 백씨 부녀도 아니다…….”

“누구입니까?”

“황보주아다.”

“황보주아요?”

진왕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주아가 왜 걱정이 되십니까?”

“그 애가 돌아온 시기가 너무 절묘하구나.”

“하지만 연약한 여인이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묵용감은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더니 실소를 흘렸다.

“나도 모르겠다. 그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뿐이니.”

그의 싱거운 말에 진왕도 웃음을 터트렸다.

“보아 하니 주아가 셋째 형님의 저택을 들쑤셨나 봅니다. 이 아우가 그런 일은 꿰고 있지 않습니까. 저택에 여인이 많을 때 생기는 후환은 누구보다 잘 알지요. 형님, 마음이 답답하시거든 이곳에서 즐거움을 찾아보십시오. 이곳의 여인들은 늘 즐거움만 줍니다.”

묵용감은 그의 가벼운 말을 못 들은 척 술잔을 부딪쳤다.

“자, 술이나 마시거라.”

* * *

그 시각, 성 동쪽에 있는 어느 기방 별실에서도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백여름과 황중원이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문득 황중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로 초왕을 끌어내릴 수 있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장기생 그놈이 배신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좋은 일을 그르치다니.”

백여름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가 음식을 느릿느릿 씹으며 말했다.

“초왕이 그렇게 쉬운 상대였다면 이 몸이 진작 끌어내렸을 걸세. 장기생은 올곧은 사람이지 않나. 늘 원칙대로 행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폐하께서도 그자를 제법 신뢰하고 계시네.”

“폐하께서는 사건을 빨리 종결하여 예왕이 편히 잠들 수 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어찌…….”

“폐하께서 그리하라 하시면 끝내야지.”

백여름은 꽤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찍 종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곧 명절이니 어쨌든 수고를 줄인 셈이지.”

“그래도 마마께서 어렵사리…….”

백여름의 안색이 곧장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황중원을 훑었다.

“황 대인, 화는 늘 입에서 나온다는 걸 기억하시게.”

“예, 예. 소관이 경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승상 어르신.”

간담이 서늘해졌다. 황중원은 소맷자락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먹구름이 순식간에 걷히듯 백여름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졌다.

“걱정하지 말게.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내 손엔 비밀 무기가 있다네. 폐하께 보여 드리는 순간 진노하실 만한 무기지. 그땐 아무리 초왕이라도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걸세.”

“그렇다면 아주 잘되었습니다.”

황중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승상 어르신께서 가지고 계신 비밀 무기가 무엇인지요?”

백여름이 그를 힐끔 바라보더니 조소를 흘렸다.

“비밀 무기인데 어찌 말할 수 있겠나. 때가 되면 자네도 알게 될 걸세.”

황중원은 조금 멋쩍어져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승상 어르신께서는 소관을 믿지 못하십니까?”

“자넬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네. 중대한 사안이라 신중을 기하는 것뿐이지.”

백여름의 얼굴에 음흉한 웃음이 드리웠다.

“이번에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걸세.”

백여름의 눈빛이 더없이 스산해, 황중원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졸였다.

* * *

한편, 황제는 주변을 물리고 홀로 천천히 봉명궁으로 향했다.

멀리서 궁문을 바라보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차마 앞으로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건의 진상은 그도 알고 있었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이유는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초왕을 대적할 구실. 그의 분노는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랜 시간 쌓여 온 불만에서 기인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황제가 되었거늘 왜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단 말인가? 어째서 그는 초왕처럼 굳건한 눈빛을 갖지 못한단 말인가?

가슴을 깊게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만질 순 없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고통이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고, 그를 잡아먹고 자라나 후회막심한 일을 저지르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잘못된 결정을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그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

* * *

백천범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건 아닐까 의심했다. 수원상에게는 묵용감이 없어도 잘 지낼 수 있다며 큰소리를 쳤고, 기홍에게도 적응하다 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한밤중에 잠에서 깬 그녀는 어두컴컴한 침대 꼭대기를 바라보며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방이 어둠에 잠긴 채 고요했다. 그녀는 따뜻한 이불 속에 오도카니 누워 넋을 놓았다. 가슴에 시리도록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심장에 크게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그가 없어도 정말 잘 지낼 수 있을까? 정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녀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그에게 의지하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그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그가 있을 자리는 그녀의 곁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받아들였다. 설령 다른 여인들과 함께 그를 바라봐야 한대도 그녀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대갓집이라면 부인 한 명만 있는 곳도 없었다. 황제도 황후를 사랑하지만 수많은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처럼.

그녀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스스로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마음이 꼭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이리저리 뒤엉켜 풀 수 없는 덩어리가 된 듯했다. 제 것이지만 쉬이 종잡을 수 없었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바깥에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꺾였는지 미세하게 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가 창호지를 뚫으면 바깥방에 있는 토끼들이 찬바람을 맞을 수도 있다. 결국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옷을 걸치고 조용히 바깥방으로 향했다.

탁자 위에는 자그마한 등불이 놓여 있었다. 바람이 들어와서인지 불빛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방 안에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조금 서늘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옷을 단단히 갖춰 입고 창문에 갈라진 틈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바람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내일 하인에게 잘 메우라고 할 생각이었다.

미세한 찬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맑고 찬 공기는 그녀의 정신을 선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어차피 잠도 잘 오지 않았으니 그녀는 아예 산책을 하기로 했다.

신발을 꼼꼼히 신고 두꺼운 외투까지 걸친 뒤 그녀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재빨리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 소리가 더욱 선명했다. 귓가를 휙휙 스치는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그녀는 외투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자그마한 얼굴만 내놓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 세상이 칠흑에 감싸인 듯 어두웠다. 별빛도, 달빛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겨울의 나무처럼 바람이 부는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바람 소리에 섞인 짧은 탄식을 들었다. 조용하고 낮은 소리였지만 그녀의 귓가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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