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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64)화 (263/1,192)

제264화

아까와 같은 일은 피하고자 녹하는 월향에게 망보기를 시켰다. 네 사람이 탁자에 앉아 턱을 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흘러나오는 한숨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별안간 백천범이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깜짝 놀란 세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택에 마조馬吊(마작과 유사한 옛날 도박의 일종) 있어요? 마침 네 사람이니까 같이해요!”

백천범의 말에 월규는 힘이 빠진 듯 탁자에 엎어졌다. 기홍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녹하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왕비 마마, 지금 마조를 하자는 말이 나오십니까?”

“그럼요?”

“왕야께서 우리를 어찌 처리하실지 생각하셔야지요!”

“맞습니다. 황보 아가씨가 왕야께 우리를 고자질할 게 분명합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왕야께서 화가 나셨다면 그 자리에서 욕을 퍼부으셨을걸.”

곰곰이 생각하던 녹하는 기홍의 말이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초왕은 화가 나면 상대를 발로 걷어차거나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그가 일을 덮어 두었다가 뒤늦게 혼내는 일은 극히 드물지 않던가.

“네 말이 맞아. 우리가 너무 깊게 생각한 것 같아. 벌을 내리시려 했으면 진작에 내리셨을 거야. 괜히 겁먹지 말자.”

백천범이 기회를 틈타 다시 말을 꺼냈다.

“괜찮아졌으니까 이제 마조나 해요. 예전에 남월각에서 본 적 있어요. 유모 제씨랑 유씨가 두고 갔거든요.”

기홍이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마조를 할 줄 아십니까?”

“배우면 할 수 있겠죠. 본 적은 있어요.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이던데요.”

“저는 할 줄 모르지만 녹하는 할 줄 아니 녹하에게 배우면 됩니다.”

녹하와 월규는 신이 나서 말하는 두 사람을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천범이 얼른 녹하를 바라보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언니,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그럴 시간 없습니다.”

“있잖아요. 왕야께서 낮잠을 주무시거나 집을 비우실 때 하면 되죠.”

“안 됩니다.”

“왜요?”

“가르쳐 드리기 싫습니다.”

녹하는 단호하기만 했다. 백천범이 잠시 숨을 들이마시더니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난 왕비다! 당장 가르쳐 주거라, 이건 내 명이다!”

깜짝 놀란 녹하가 가슴을 쓸어내리다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까는 뭐 하시다 지금에야 이렇게 겁을 주십니까? 제가 아니라 황보 아가씨한테 소리치셨어야죠.”

백천범이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그랬다면 왕야께서 절 쫓아내시겠죠…….”

상황을 보던 기홍이 수습에 나섰다.

“되었습니다. 그 일은 그만 말씀하십시오. 왕야께서 방에 계시니 큰소리를 내면 안 됩니다.”

그때 밖에 있던 월향이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

“왕야께서는 밖에 나가신 듯합니다.”

백천범이 환호를 질렀다.

“가서 마조를 가져올게요!”

월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비 마마, 소인이 가져…….”

“됐어. 내가 더 빨라.”

말릴 틈도 없이 백천범은 쏜살같이 뛰어갔다.

녹하가 백천범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니까. 우린 왕비 마마 때문에 애가 타는데, 마마는 깊게 고민하시는 법이 없으니.”

기홍이 한숨을 내뱉으며 녹하를 돌아보았다.

“너희는 왕비 마마 마음을 너무 몰라. 왕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가장 상처받은 사람이 누구겠어? 바로 왕비 마마라고. 마마께서 억지로 웃으시는 것도 못 느꼈니? 마조를 하자고 하시는 것도 다른 생각을 하고 싶으시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너희는 마마께서 상심에 빠져 계시길 바라는 거야?”

녹하와 월규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기홍의 말이 옳았다. 두 시녀가 백천범을 계속 부추기는 바람에 그녀는 모든 고통을 홀로 감당해 와야만 했다.

묵용감은 점심을 먹으러 오지 않겠다며 저택으로 전갈을 보냈다. 소식을 들은 녹하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 왕비 마마가 드실 것만 만들면 되겠다.”

기홍이 주저하다 말했다.

“좀 그렇지 않아? 어쨌든 황보 아가씨도 이곳에 있는데, 왕야께서 아시면 화내실지도 몰라.”

“겁낼 게 뭐 있어? 앞뜰 부엌에서 음식을 가져다주면 되잖아. 넌 왕야와 왕비 마마의 음식을 만드는 시녀라고. 아무나 네 음식을 먹을 순 없지. 당연한 거 아냐?”

기홍이 백천범을 바라보며 물었다.

“왕비 마마 생각은 어떠십니까?”

마조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백천범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언니한테 심한 말을 했으니 안 만들어 줘도 돼요.”

녹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왕비 마마께서 뒤끝 없는 분이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이렇게나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시는데요?”

백천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기홍 언니한테 한 말이라서 담아 둔 거예요. 제가 들은 말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예요.”

기홍이 여전히 난처한 기색이기에 녹하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대신 움직였다.

“맘 편히 앉아 있어, 네가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월규야, 나랑 황보 아가씨한테 다녀오자.”

기홍이 담담한 백천범의 얼굴을 보며 서둘러 물었다.

“왕비 마마, 저 애들이 일을 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왕야께서 지난번 일은 그냥 넘어가셨지만,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성을 내실지도 모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녹하 언니가 좀 무섭긴 해도 정도는 지키잖아요. 또 부딪힐 이유가 있는 일이면 왕야께서도 벌을 내리진 못하셔요.”

기홍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비 마마… 괜찮으신 거죠?”

백천범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앞이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마음이 정말 안 좋아요.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떡하겠어요.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왕야께서 누굴 좋아하든, 누굴 싫어하든 왕야의 마음인데…….

이번 일을 교훈 삼아 가슴에 새겨 두면 되죠, 뭐. 왕야께서 절 내쫓지 않으셨으니 할 일을 찾아서 시간도 보내고, 열심히 살려고요.”

기홍은 백천범의 말에 입을 벙긋거렸다. 어린 왕비의 생각이 너무나 깊지 않은가.

“왕비 마마, 정말 받아들이실 수 있겠습니까?”

“원상 언니는 못 받아들였죠. 그렇다고 지금 잘 지내나요?”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일들은 아무리 밀어붙여도 소용없는 법이에요. 그럴 땐 차라리 손을 떼는 게 낫죠. 아픈 건 잠깐이고 시간은 흐르니까요. 왕야께서는 잘 지내시는데 저라고 괴로워할 수만은 없죠. 어때요, 제 말이 맞죠?”

기홍이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신 건 잘하신 일입니다. 마마, 계속 이렇게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상황을 지켜봐야죠.”

백천범이 패를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마음의 준비만 하면 뭐든 무섭지 않아요.”

그 순간, 기홍의 눈에 백천범이 훌쩍 커 보였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왕비는 늘 유약한 존재라 누구보다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지금껏 어린 여동생이라 여기며 지켜 주었는데, 왕비는 어느새 누구보다 강한 마음을 가진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하와 월규가 돌아왔다. 그들은 황보주아에게 앞뜰 부엌의 음식을 가져다주니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두 시녀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반격 후에 느끼는 일종의 통쾌함이었다. 비수가 되어 날아왔던 초왕의 말과 침울했던 분위기도 웃음과 함께 말끔히 사라지는 듯했다.

기홍이 월향을 데리고 부엌으로 가 음식을 만들었다. 월규는 녹하에게 매듭을 배웠고, 백천범은 홀로 탁자에 앉아 새하얀 패를 세워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던 일에 흥미를 잃은 백천범은 부엌으로 향했다. 기홍이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구경하며 소일거리를 돕기 위해서였다. 기홍은 혹여 기름이 튈까 봐 방으로 돌아가라며 그녀를 타일렀고, 결국 백천범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녹하가 월규에게 매듭을 가르쳐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식사 시간이 되자 네 명의 시녀가 쪼르르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시녀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월규와 월향을 가리켰다.

“월향은 성격이 온화하고 음식을 잘 만드니 기홍 언니를 닮았고, 월규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바느질을 좋아하는 게 녹하 언니를 닮았네요. 신기하다! 꼭 짝을 맞춘 것 같아요! 성격이며 취향이 어쩜 그렇게 닮았지요?”

그녀의 말에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기홍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선발했답니다. 저희는 때가 되면 저택을 떠나야 하지요. 그래서 미리 후임자를 정해 놓습니다. 월규와 월향이는 학평관 어르신이 저와 녹하의 후임으로 뽑은 시녀입니다.

월향이는 저에게 음식을 배우고, 월규는 녹하에게 바느질을 배우지요. 성격도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왕야께서도 쉽게 적응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왕야께서 월규와 월향이를 왕비 마마께 보내실 줄은 몰랐지만요.”

백천범은 처음 듣는 사실이기에 깜짝 놀랐다가 곧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그렇게나 잘해 주던 그가 참 많이도 변했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대해 주었을 땐 그녀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금만 일찍 깨달았더라면 두 사람은 조금 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텐데.

* * *

예왕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얼추 잡아낸 묵용감은 급히 저택을 나섰다. 모든 증거가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막강한 권력자 초왕, 자신이었다.

그도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 짐작했다. 예왕은 백천범과 연루된 직후,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며칠간 예왕이 백 귀비의 처소에 숨어 있었다는 것까진 묵용감도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장강에게 그 사실을 폭로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 안에 그의 부하를 잠복시키는 것은 황제에게 있어 친왕을 죽이는 일보다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황제가 묵용감을 멀리하고 백여름을 다시 중용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황제가 줄곧 그를 두려워하고 있음은 그도 느끼고 있었다. 병권을 쥔 그에게는 조정을 뒤엎을 힘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황제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동월국에서 묵용감보다 전쟁을 잘 치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는 국가를 지키는 기둥이었다.

어진 군주가 되고 태평성세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평화로워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묵용감에게 의지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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