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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63)화 (262/1,192)

제263화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녀는 규율과 분수를 모르는 뻔뻔한 인간이 되고 만다. 고귀한 출신임에도 교양 없이 행동한다면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아닌가.

예전의 황보주아였다면 얼굴을 붉히고 순순히 응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황보주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잃어버린 모든 것과 피맺힌 원한을 위해서라도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묵용감을 확실히 손에 넣어야 그녀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며칠만이라도 고분고분하게 있으려 했건만… 벌써 성가시게 굴다니. 이제는 예를 갖추고 싶지 않아 그녀는 냉소를 보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조금 의아하군요. 대체 이 저택의 안주인이 왕비입니까, 아니면 두 사람입니까? 셋째 오라버니 곁에 오래 있다 보니 불순한 생각을 품게 된 건 아닌지요?”

그 말은 혼인을 하지 않은 여인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말이다. 지위가 높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염치도 없이 주인을 유혹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월규가 소리쳤다.

“황보 아가씨를 위해 드린 말씀인데 어찌 그리 사리 분별을 못 하십니까!”

월규보다 기량이 더 뛰어난 녹하는 덤덤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황보주아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얌전히 있는다 싶더니, 지금에서야 감추고 있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녀는 백천범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렇게 위험한 여인을 서둘러 내쫓지 않으면 화근이 되리란 의미였다.

황보주아의 오만한 모습에 백천범은 이씨 부인을 떠올렸다. 그녀도 황보주아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란 사실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황보주아는 묵용감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니 서로 체면을 구길 순 없었다. 더욱이 묵용감이 중간에서 난처해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됐어요. 황보 아가씨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만두어요.”

황보주아는 입꼬리를 올리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백천범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어쨌든 백여름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 만나 보니 큰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천범은 겁을 낼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월규가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한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녹하는 아예 대놓고 그녀를 탓했다.

“왕비 마마, 어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왕비 마마의 위엄은요? 이곳은 왕비 마마의 저택입니다. 안주인이 외부인도 어찌하지 못하면 어떻게 다른 이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백천범이 살짝 시선을 올리며 웅얼거렸다.

“가기 싫다는데 제가 어찌하겠어요?”

녹하 역시 월규처럼 원망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때, 기홍이 상냥한 목소리로 완곡하게 말했다.

“황보 아가씨, 부디 오해는 마십시오. 왕야와 아가씨의 사이를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거처를 후원으로 옮기려는 것은 아가씨를 위한 일입니다. 나라에 국법이 있듯 집마다 그 집안의 규율이 있습니다.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는 법이지요.

왕야께서는 공무가 바쁘시어 매일 아침 저택을 나가셔서 늦게 돌아오십니다. 돌아오셔서도 서재에서 정무를 보시느라 바쁘시지요. 아가씨께 신경 쓸 겨를도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후원으로 거처를 옮기시면 왕비 마마와 함께 지내시지 않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아가씨께 많은 걸 배우실 수 있겠지요. 아가씨와 왕비 마마께서 내실을 잘 관리하시면 왕야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황보 아가씨?”

황보주아는 네 사람 모두에게 그리 좋은 인상이 없었다. 기홍의 말은 구구절절 도리에 맞았지만, 그녀는 경멸이 담긴 눈으로 기홍을 훑어보았다.

“기홍 아가씨가 저들보다 말을 잘하는 줄은 몰랐네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이런 부류입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약아빠진 사람 말입니다. 저는 규율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으니, 더는 규율을 따져 묻지 마세요.

저는 셋째 오라버니의 약혼자입니다. 문제가 없었다면 진작에 혼사를 치렀을 사이입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저는 적왕비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겠지요. 여러분은 저와 셋째 오라버니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 모를 겁니다. 그러니 자꾸만 저를 후원으로 옮기려 들지 마십시오.

왕비 마마께서는 후원에 있는 측왕비를 보고 잘 배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측왕비는 분수를 알고 얌전히 후원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각자의 분수를 알고 선을 지켜야지요. 이리 소란을 피우시면 오라버니께서 죄를 물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땐 누구도 왕비 마마를 지키지 못하겠지요.”

백천범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자신을 모욕해서가 아니다. 기홍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기홍은 평소 모든 일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처리했고, 누구보다 진중한 사람이었다. 회림각의 모든 이들은 기홍에게 예를 갖춰 대했고, 묵용감마저 기홍을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 황보주아가 그 선을 넘고 말았다.

백천범이 웃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난 이들처럼 듣기 좋은 말은 못 합니다. 바로 물을게요. 옮길 거예요, 안 옮길 거예요?”

황보주아 역시 거리낄 게 없었다.

“옮기면 어찌 되고, 안 옮기면 어찌 됩니까?”

“간단하죠. 옮기겠다고 하면 하인들에게 짐을 옮겨 달라 하고, 안 옮기겠다고 하면 하인들에게 짐과 사람을 옮겨 달라 하겠습니다.”

백천범이 이리 난폭하게 나올 줄 몰랐던 황보주아는 흠칫 놀랐다.

“그럴 수 있으시겠습니까?”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황보주아는 그녀가 원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서둘러 웃음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보시든가요.”

녹하와 월규는 희색만면했다. 어린 왕비도 궁지에 몰리니 제법 세게 나오지 않는가. 잔뜩 흥분한 두 시녀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때, 줄곧 가만히 서 있던 월향이 입을 열었다.

“다들 그만하십시오. 밖에 왕야가 계십니다.”

월향의 말에 다들 안색이 변했다. 문 쪽을 바라보니 두꺼운 발 아래로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엿들은 것이고?

이 저택 안에서 공공연하게 남의 말을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은 초왕뿐이다.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기세 좋게 말하던 시녀들은 초조한 눈으로 백천범만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모든 일은 그녀가 책임질 생각이었다.

황보주아는 움츠러든 손을 소맷자락에 감췄다. 이제껏 묵용감 앞에서 한 번도 제 발톱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가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본성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는데, 저 천것들이 일을 망쳤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그의 반응을 지켜보면 될 일이다. 만약 묵용감이 화를 낸다면 그녀 역시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면 그만이었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묵용감이 마침내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태연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묵용감을 무서워하는 월규와 월향은 진작에 백천범 뒤에 숨어 있었다. 두 시녀는 감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황보주아가 저택에 들어온 일이 늘 불만이었던 녹하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왕야께 아룁니다. 왕비 마마께서 황보 아가씨와 함께 지내기 위해 후원의 처소를 정리하는 중이셨습니다. 하지만 황보 아가씨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마마께 불손한 말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약간의 언쟁이 있었습니다.”

묵용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래서 해결되었느냐?”

녹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해결이라니? 황보주아가 가지 않겠다는데 어찌 해결이 되겠는가?

“모두 한 가족이니 작은 일로 감정 상할 것 없다.”

묵용감의 시선이 백천범의 얼굴에 꽂혔다. 그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주아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회림각에서 지낼 것이오.”

그의 말에 황보주아의 얼굴에만 화색이 돌았다. 안색이 잿빛이 된 다른 이들은 조용히 눈만 굴렸다. 묵용감은 밖에서 그녀의 말을 다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쌓아온 오랜 정은 역시 백천범과의 풋내 나는 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걸까? 황보주아가 얼른 고개를 들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셋째 오라버니, 저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라버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나도 안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위로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되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내고 나가서 할 일들 하거라.”

모두들 눈을 내리깔고 줄지어 밖으로 나갔다. 대열의 맨 끝에 서 있던 백천범은 문 앞에서 멈춰 묵용감과 황보주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황보주아는 문 발 아래의 틈을 자세히 살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셋째 오라버니, 오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묵용감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았다.”

“제가 한 말을 듣고 실망하셨나요?”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가 지나친 말을 했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셋째 오라버니는 제가 어떤 날들을 보냈는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셋째 오라버니밖에 없습니다. 오라버니까지 뺏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묵용감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일 없으니 깊게 생각하지 말거라.”

황보주아는 그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혼인을 하셨어도 저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저를 대신해 누군가 셋째 오라버니를 챙겨 준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래도 왜 하필이면 백여름 그 작자의 딸입니까? 왜 하필…….

백여름은 제 가족을 죽였습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예전의 정을 생각하셨다면 그자의 딸과는 혼인하지 마셨어야지요.”

한숨을 내쉰 묵용감이 그녀를 의자에 끌어 앉히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주아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왕비는 백여름이 버린 딸이나 마찬가지야. 가여워서 나도 내쫓지 못했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열다섯이라 해도 몸집이 작지 않더냐.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키도 크지 않았다더구나. 왕비는 네게 악한 마음도 없다. 그러니 언니인 네가 좀 봐주면 안 되겠느냐?”

황보주아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압니다. 셋째 오라버니는 마음이 여리셔서 가여운 사람을 내버려 두지 못하신다는 걸요. 앞으로는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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