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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62)화 (261/1,192)

제262화

묵용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진왕이 그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폐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묵용감은 고개만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왕도 이곳은 이야기를 나눌 장소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는 묵용감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형님과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 아우의 체면을 봐서라도 좋은 곳에서 술 한잔하시지요.”

묵용감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술 먹을 기분이 나느냐?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한바탕 욕을 먹을 것이다.”

진왕이 목소리를 낮췄다.

“거긴 남의 이목을 가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어서요. 자리부터 옮기고 이야기합시다.”

두 형제는 서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진왕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셋째 형님을 바라보시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설마 형님이 예왕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묵용감은 손을 소매에 넣으며 어두침침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한데 모였구나.”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소문도 듣지 못하였느냐? 폐하께서 백 귀비만 총애하시니 황수께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계신다.”

“듣긴 했습니다.”

진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나 믿지 않았지요. 폐하와 황수는 정이 유달리 깊으신 분들이 아닙니까. 백 귀비가 갈라놓을 수 있을 만한 사이가 아닙니다. 누가 진심으로 폐하를 위하는 사람인지는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묵용감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한번 감정에 사로잡히면 많은 면이 변하는 법이지.”

진왕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니까 형님의 말씀대로라면 폐하께서 백 귀비를 은애하신단 겁니까?”

“은애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묵용감의 미간이 더욱더 좁아졌다.

“적어도 폐하께선 지금 백 귀비의 곁을 떠나지 못하신다. 듣자 하니 방탕한 시간을 즐기신다고 하던데, 백 귀비가 무슨 수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쉽게 현혹될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지금껏 미색이라고는 관심도 두지 않으시던 분이…….”

묵용감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백 귀비를 그간 과소평가했다. 백씨 집안 사람들 중엔 만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구나.”

그의 말에 진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초왕비도 포함해서 말입니까?”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묵용감의 안색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초왕비도 보통내기가 아니지.”

아직도 사장풍을 생각하고 있다니! 자신에게 지지 않으려고 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를 마구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진왕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형님, 폐하께서 형님을 오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나도 안다. 하지만 내가 병권을 쥐고 있으니, 폐하께서도 당장은 날 쉽게 건드리지 못하실 거다.”

그가 침음을 흘리다 겨우 말을 꺼냈다.

“그리고… 주아가 돌아왔다.”

“누구요?”

진왕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그에게 물었다.

“황보주아요?”

“그래.”

“죽은 게 아니었습니까?”

“그때 어떻게든 도망쳤다더구나.”

“지금 형님의 저택에 있습니까?”

“그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진왕이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셋째 형님, 정신이 나가셨습니까?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그 애를 저택에 들이실 수 있으십니까? 폐하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요! 불 난 데 기름을 끼얹는 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 벼르고 계신데 어찌 중죄인까지 저택에 숨겨 두십니까? 이 또한 중죄입니다!

형님, 어찌 스스로 골칫거리를 떠안으십니까?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어서 내보내십시오. 멀리 보내실수록 좋습니다.”

묵용감은 묵묵히 먼 곳만 바라보았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거리는 예년보다 더욱 떠들썩했다. 붉은 비단과 오색 천 장식이 넘쳐나니 다가올 명절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임안성은 천자가 있는 곳이다. 늘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이어져야 했다.

“주아를 내보낼 수는 없다. 그 애는 내 곁에 있어야 안전해.”

묵용감의 고집에 진왕은 더욱 초조해졌다.

“셋째 형님, 그 애는 안전할지 몰라도 형님께서는 위험해지십니다.”

묵용감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걱정할 것 없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예전이었다면 형님께서 그 애를 충분히 지켜 주실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진왕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이 일은 언급하지 말거라.”

묵용감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예왕의 일은 내가 나서기 어려우니 네가 잘 주시해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한숨을 내쉬던 진왕이 무언가 떠올린 듯 물었다.

“황보주아를 들이실 때, 초왕비의 원망은 신경 쓰이지 않으셨습니까?”

묵용감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영구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아 곧장 자리를 떴다.

그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얼굴에 날아드는 찬바람이 싸늘한 통증을 남겼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속도를 높였다. 한참 질주를 한 뒤에야 그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찬바람에 꽁꽁 언 얼굴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남월각에서는 월규가 백천범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왕비 마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마마께서는 이 집의 안주인이십니다. 마마께서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시지요. 황보 아가씨가 저택에 들어왔다 해도 어쨌든 마마의 아랫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응당 후원에서 묵어야 합니다. 아가씨가 후원에서 지내면 왕야께서도 늘 후원을 찾아주시겠지요.

우리 남월각이 가장 앞에 있으니 지리적으로 아주 유리합니다. 련이가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왕야께서 보이면 마마께 고하고, 마마께서는 왕야를 뵈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렇게 매일 왕야 앞에 나타나면 왕야께서도 마마를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백천범은 무기력해졌다. 싸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모든 상황이 기어코 그녀를 분쟁 속에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은 저택 후원을 지키는 가련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한참을 떠들던 월규는 왕비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성을 냈다.

“왕비 마마, 제가 한 말 들으셨습니까? 왕야께서 저택을 비우셨을 때 황보주아 아가씨의 거처를 후원으로 옮기십시오. 마마의 근처에 두셔야 합니다.”

백천범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노파심에 한참을 떠들던 월규는 왕비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결국 분통이 터졌다. 월규가 몸을 틀어 앉곤 힘껏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어쩌다 마마같이 태평한 주인을 모시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던 백천범이 깜짝 놀랐다.

“엥, 왜 우는 거야?”

“누가 울어요.”

월규는 성을 내며 등을 돌렸다.

백천범은 끈질기게 월규의 얼굴을 따라갔다.

“그럼 눈이 왜 이렇게 빨개?”

“바람이 불어서 그렇지요.”

“창문도 다 닫혀 있는데 어디에서 바람이 들어온다는 거야?”

월규는 그녀가 자신에게 질문할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상전을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입술을 깨물고 화를 삭였다.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부터 월규는 황보주아의 거처를 후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그녀를 설득했다. 어찌나 계속 말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백천범이 회림각에 다녀오지 않은 이상 월규는 절대 뜻을 접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어. 왕야께서 안 계시니까 다녀오자.”

그녀가 회림각으로 가는 것은 온전히 월규를 위해서였다. 월규는 황보주아가 온 후로 줄곧 불안에 떨었고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버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방법을 고민하고 백천범에게 늘어놓았다.

백천범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면 월규가 크게 서운해하리라.

그렇게 나섰지만 백천범은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저 월규를 달래기 위해 형식적으로 회림각에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정에서 돌아오는 묵용감과 마주치지 않게 최대한 빨리 다녀와야 했다.

회림각을 찾은 그녀는 황보주아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보 아가씨, 후원에 처소 한곳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거처를 옮겨 함께 지내는 게 어떠신지요?”

황보주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 마마의 생각이십니까? 셋째 오라버니의 생각이십니까?”

“제 생각입니다.”

황보주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마마의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지요. 전 셋째 오라버니가 정해 주시는 곳에서 지낼 것입니다.”

애초에 그녀가 쉽게 승낙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월규가 보는 앞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 백천범은 월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은 손쓸 방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월규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비 시녀로서의 기개를 내비쳤다.

“황보 아가씨, 아가씨께서 잘 모르시는 듯합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십니다. 내실에 관한 일은 마마께서 관리하셨지요. 왕비 마마는 아가씨와 왕야께서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셨던 사정을 생각하시어 회림각에 묵게 해 주신 것입니다.

왕야께서도 아가씨를 저택에 들이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혼사도 치르지 않은 사이에 왕야의 처소에서 지내신다면 규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게 뻔하지 않습니까? 왕야와 아가씨의 체면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니 황보 아가씨도 왕비 마마의 말씀을 듣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틀린 게 없는 말이다. 황보주아는 대갓집 규수였으니 규율과 예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만 일깨워 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도 남았다.

기홍과 녹하도 방 안에 서 있었다. 월규는 회림각에 도착하자마자 녹하를 찾아가 이 일을 상의했고, 문제 될 게 없다는 녹하의 말에 함께 황보주아를 찾아온 것이었다.

다들 백천범이 이 일을 홀로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시녀들은 왕비가 말을 꺼내면 나머지는 자신들이 책임지고 따질 작정이었다. 아무리 황보주아라 한들 네 사람의 입을 당해내진 못할 테니.

녹하가 놓치지 않고 옆에서 거들었다.

“황보 아가씨,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같이 지내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이십니다. 후원으로 가시면 분명 살뜰히 챙겨 주실 것입니다. 회림각은 왕야께서 묵는 곳인 데다 왕비 마마께서도 마음대로 지내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황보 아가씨께서는 고귀한 분이시니 이런 규율은 소인보다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두 시녀 모두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에둘러 말하면서도 그녀를 퍽 난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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