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한테만 해 주시던 건데…….’
줄곧 침묵을 지키던 기홍이 입을 열었다.
“황보 아가씨께서도 죽순을 좋아하시는군요. 소인이 잘 몰랐습니다. 이건 왕비 마마께서 좋아하셔서 만든 음식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한 녹하와 기홍은 호흡이 잘 맞았다. 녹하가 곧바로 죽순 요리의 절반을 떠서 백천범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왕비 마마, 많이 드십시오.”
황보주아가 백천범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왕비 마마, 많이 드십시오. 많이 드셔야 쑥쑥 크십니다.”
백천범도 자신은 키가 크는 중이니 많이 먹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 말을 황보주아에게 들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황보 아가씨. 그래도 저는 꽤 많이 컸답니다.”
황보주아는 조금 놀란 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럼 예전에는 얼마나 작으셨던 것입니까?”
입 안에 음식을 가득 욱여넣던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 발끈하여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뇨, 그렇게…….”
말을 내뱉는 순간, 입 안에 있던 음식이 그대로 뿜어져 나왔다. 황보주아는 얼른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날아드는 음식물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백천범과 황보주아에게 쏠렸다. 어떤 이는 놀랐고, 어떤 이는 고소하다는 듯 즐거워했고, 또 어떤 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사람은 물론 묵용감이었다.
“왕비, 주아에게 사과하시오.”
백천범도 잘못을 알고 있었고 마땅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사과를 할 참이었는데 묵용감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왜 하필 지금 나서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릇에 담긴 음식만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서 사과하시오!”
묵용감의 말투가 더욱 냉랭해졌다.
이제는 귀에 거슬리다 못해 배알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녀는 못된 성격은 아니었지만 초왕 때문에 아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보여 줘야지, 그녀가 무엇 하러 물러선단 말인가? 게다가 황보주아가 먼저 그녀에게 예의 없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되었습니다, 오라버니.”
그때 황보주아가 온화하게 말했다.
“노여움을 푸시어요.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린아이시니까요.”
백천범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아이는 무슨, 그녀는 옛날 옛적에 시집을 온 당당한 부인이다. 날마다 지아비와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수없이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어딜 봐서 그녀가 어린아이란 말인가?
“내 탓이다.”
묵용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내버려 두었더니 버릇이 나빠지는구나. 원래는 두 해 정도 돌봐 주다 신랑감을 찾아 주려 했었다. 그런데 성질이 이리도 고약해졌으니 아무도 원치 않을까 걱정이구나.”
백천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세차게 내려친 듯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불을 땐 덕에 방 안은 아주 따뜻했지만, 백천범은 홀로 차디찬 눈 속에 파묻힌 듯했다. 그녀의 발끝부터 천천히, 묵용감의 차가운 말이 타고 올라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황보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셋째 오라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왕비 마마께서 상처받으시겠습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초왕비는 만족을 잘하는 사람이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과 얼어 죽지 않을 옷만 있으면 쉽게 기뻐하지.”
할 수만 있다면, 백천범은 앞에 놓인 그릇을 그의 가증스러운 얼굴에 집어 던졌을 터였다. 그러나 후환을 생각한 그녀는 마음을 접었다. 힘겹게 화를 삼킨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저는 쉽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사실 절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나시거든 사 제독에게 한번 물어…….”
“그자는 제독의 자리에서 물러난 지 오래요. 한낱 순포에 불과하니 스스로는 먹고살지언정 가정을 꾸리고 처를 먹여 살리긴 벅찰 것이오. 다른 사람으로 골라 보시오.”
“절 먹여 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 먹고살 방도를 찾으면 되니까요. 더 고를 것도 없이 그분이 제격인 듯합니다. 적어도 그분은 제게 한결같았거든요.”
묵용감은 한참 동안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한번 물어보리다.”
밥을 먹은 뒤 백천범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황보주아에게 들키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묵용감에게만큼은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묵용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이렇게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곁눈질로 바라본 묵용감과 황보주아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릴 때 함께 놀았던 이야기, 여행을 갔던 일 등 수많은 추억들이 백천범의 귀를 괴롭혔다. 그녀는 연극을 보듯 덤덤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계속 자리를 지키며 체면을 깎이느니 후원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았다.
기홍이 쩔뚝거리며 그녀를 따라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왕비 마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왕야께서는 예전 일을 말씀하시는 것뿐이니 마마께서도 고집을 부리지 마시어요. 그래 봤자 화를 입는 것은 사장풍일 것입니다. 겨우 마무리된 일인데 다시 소란이 벌어지면 안 됩니다.”
백천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저를 사 제독에게 시집 보내도 늦지 않은 일입니다. 어쨌든 왕야와 진짜 합방을 한 사이도 아닌걸요.”
기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월문까지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왕비 마마, 돌아가셔서 푹 쉬시고 내일 다시 오십시오.”
백천범은 그저 웃으며 등불을 든 무수리에게 분부했다.
“언니를 잘 모셔. 다리가 불편하니까 천천히 가야 해.”
하지만 기홍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조금만 가면 되니 괜찮습니다. 어서 왕비 마마를 모셔다 드려.”
백천범은 밤길을 걷는 데 익숙했다. 더욱이 마음이 심란할 땐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전 필요 없어요. 어서 들어가요, 언니. 저도 갈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후원 쪽으로 향했다. 등불을 든 무수리가 뒤를 쫓았지만 몇 걸음도 가지 못해 백천범을 놓치고 말았다. 기홍은 어쩔 수 없이 무수리를 불러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한달음에 후원으로 돌아온 백천범은 비탈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등불이 환하게 켜진 남월각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나무에 기대섰다.
짙은 빛의 한겨울 밤하늘은 희뿌연 빛을 흘리고 있었다. 백천범은 나무에 기댄 채 가만히 눈물을 떨구었다.
유모가 보고 싶었다. 유모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한 번도 그녀를 속이지 않았고, 끝내 그녀를 버리지 않았던 사람. 그러나 유모의 명은 너무 짧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은 흐릿한 흔적만 남긴 듯 어둡게 빛났다. 저 중 어느 게 유모의 별일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별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하늘이 일렁거리며 흐릿하게 보였다. 눈이 시린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거두었다. 그제야 그녀는 저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알아차렸다.
외투를 걸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여자. 어둠 속에서도 두 눈에 서린 웃음기가 선명했다.
“왕비 마마, 어찌 홀로 울고 계십니까?”
평소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니 하필 지금 나타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삼고 있었다. 백천범은 서둘러 눈가를 닦아 냈다.
“울든 말든, 언니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원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신첩은 그저 궁금해서 여쭌 것입니다. 저택을 좌지우지하시는 분께서 무슨 일로 슬퍼하시는지요?”
그녀가 문득 떠올렸다는 듯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아, 새로운 분이 오셔서 그러시는군요. 왕야의 약혼녀였던 분이 회림각에서 지내기로 하셨다던데, 왕야께서 늘 그리워하셨으니 유달리 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백천범은 붉게 물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로 제가 괴로워할 거라 생각하셨나요?”
“괴로운 게 아니시라면, 어찌 이곳에 숨어 울고 계셨습니까?”
“그건 언니가 오기 전의 일이죠.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언니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에 담아 둘 일도 없어요.”
백천범이 고개를 치켜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
“도토리 키를 잴 바에야 언니 자신이나 신경 쓰는 게 좋겠네요.”
“…….”
수원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백천범은 야무지게도 말하곤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전 언제든 떠날 수 있어요. 바깥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저한테는 그리 나쁘기만 한 일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원상 언니는 평생을 이곳에 있겠죠.”
수원상도 자신은 백천범처럼 대범하지 못한 걸 알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자존심을 절대 놓을 수 없었으므로. 그렇다 해도 백천범의 저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은 꼴도 보기 싫었다. 백천범은 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녀는 할 수 없단 말인가?
백천범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에서 수원상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려 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왕야 없이 어떻게…….”
“왕야가 없어도 지금처럼 살 수 있어요. 아니,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어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비탈길을 올랐다.
남월각의 문을 여니 따뜻한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한 무수리가 다가와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오늘 토끼 두 마리가 서로 싸웠습니다.”
“그래?”
그녀가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내가 없으니까 이놈들이 소란을 피우지!”
* * *
오늘 아침 전해진 소식에 조정은 충격에 휩싸였다. 진노한 황제의 이마에는 핏대가 시퍼렇게 서 있었다. 그가 연신 어좌를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거라. 감히 종실 친왕을 해하다니, 반드시 잡아내야 한다. 짐이 그자의 구족을 멸하고 말겠다!”
황제의 분노에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묵용감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진왕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었다. 눈짓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다시 시선을 거두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형부와 대리사가 조사를 진행하라. 사흘 안에 반드시 짐에게 진상을 고해야 할 것이다!”
대리사경 장기생張紀生과 형부 상서 황중원黃中源이 서둘러 앞으로 나가 명을 받들었다.
“소신, 명을 받들어 사흘 내에 폐하께 진상을 고하겠습니다.”
다른 상주문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황제가 퇴조를 명했다. 떠나기 전 황제의 시선이 묵용감의 얼굴을 가볍게 스쳤다.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