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팔로 눈물을 힘껏 닦아 낸 뒤 햇살을 맞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니었다. 유모의 말처럼 생사를 넘나드는 이별이 아닌 이상 마음에 담아 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응하다 보면 금방 괜찮아질 터였다.
그때 처마 아래에 서 있는 가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제야 회림각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 가동에게 다가가 눈짓을 보냈다. 가동이 곧바로 그녀를 따라 연못으로 향했다.
“사부님은 예전에 황보 아가씨를 본 적 있어요?”
“몇 번 봤습니다.”
“왕야께서 아가씨한테…….”
막상 물어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묵용감은 이미 그녀에게 답을 주었다. 황보주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묵용감이 너무나 잘해 준 탓에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늘 그리워하던 약혼녀가 돌아오자 그의 마음도 돌아서고 말았다. 그녀의 표정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가동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듯 그녀를 다독였다.
“왕비 마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왕야께서도 고민이 크셨습니다. 황보 가문의 몰살은 백 승상이 처리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 왕야께서 백 승상에게 원한을 품으셨지요. 그런데 왕야께서는 원수의 딸과 혼인을 하셨으니, 돌아온 주아 아가씨가 왕야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주아 아가씨가 상처받을까 봐 왕야께서도 왕비 마마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가동이 말해 준 것은 그녀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품고 있는 고민에 비하면 이 서운함은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황보주아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게 다가올 수 없었던 것이라니…….
그때, 영구가 다가와 가동을 흘겨보았다.
“왕야의 마음을 함부로 추측하지 마십시오. 왕야께서 형님의 가슴을 걷어차실지도 모릅니다.”
가동이 입을 삐죽였다.
“요즘 워낙 바쁘셔서 내게 신경 쓸 겨를도 없으시거든.”
영구가 한숨을 쉬더니 가동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리 좀 비켜주십시오. 왕비 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동이 의아해하며 영구를 바라보았다,
“네가 왕비 마마께 무슨 할 말이 있어?”
“형님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비 마마의…….”
“녹하 아가씨가 어디 계시더라…….”
“부르지 마! 알았어, 갈게, 간다고!”
가동이 눈을 부릅뜨며 영구를 노려보더니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
“…할 말이 뭐예요?”
영구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할 말이 무엇일까. 백천범은 궁금한 마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영구는 핵심만 간결하게 말했다.
“황보주아 아가씨께서 예전에 왕야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백천범의 입이 벌어졌다. 그래서… 묵용감이 황보주아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 걸까? 설마 그 이유만으로 그를 이해해 달라고 했단 말인가?
백천범은 풀이 죽은 채 기홍의 방으로 들어갔다. 녹하와 이야기를 나누던 기홍은 백천범이 방으로 들어오자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의자에 앉더니 그대로 팔선상에 엎드렸다. 코와 입이 눌려 이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니, 먹을 거 있어요? 배고파요.”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찌 먹을 생각뿐이십니까!”
백천범은 엎드린 채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왜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녹하가 안채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아까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어젯밤 왕야께 차를 타 드렸다며, 직접 시중을 들었다 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백천범이 마침내 녹하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왕야가 황보 아가씨와 함께 잠을 청했단 말이에요?”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백천범은 눈을 내리깔고 탁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그녀가 손가락으로 탁자에 조각된 꽃무늬를 있는 힘껏 문질렀다.
녹하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탁자가 한 짓도 아닌데 뭘 그리 문지르십니까. 손톱이 부러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왕비 마마는 아직도 힘이 넘치시나 봅니다!”
그때 기홍이 주방에서 전병 두 개와 국화차를 가져왔다.
“방금 우려낸 차라 뜨거우니 데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바라보며 백천범은 또다시 넋을 놓았다. 기홍의 말이 맞았다. 그래, 이젠 어디에 살을 데어도 그녀를 걱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이제 황보주아의 곁에만 있겠지. 그녀도 수원상처럼 후원에 방치된 채 관심조차 받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빛을 한 채 전병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음식이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그녀는 유모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배만 부르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는 말.
그녀는 천천히 전병을 먹으며 마음을 억누르던 근심과 걱정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슬픔에 가득 찬 여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걱정이 가슴에 쌓이면 점점 더 커질 거라는 유모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그때 녹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괜히 걱정만 했습니다. 황보 아가씨의 신분을 생각해 보세요. 가문이 몰살된 죄인의 딸입니다. 도망치긴 했지만 죄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이 사실을 알리면 관아에서 잡으러 올 테니 그리 걱정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기홍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될 듯한데, 어쨌든 왕야께서 그, 아가씨를……. 게다가 왕야께서 지켜 주시는 한 관아에서 감히 잡으러 오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녹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폐하께 알려 드려야지. 폐하의 명은 황권이잖아. 왕야께서 지키고 계셔도 소용없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궁에 들어가서 폐하께 고할 수 있겠어?”
녹하가 눈을 잠시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다 방법이 있지.”
녹하는 이미 생각해 둔 계획이 있는 듯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때 백천범이 서둘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녹하는 그녀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요?”
백천범은 있는 힘껏 녹하를 잡아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황보 아가씨는 왕야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에요. 이렇게 하는 건 왕야를 몰인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밖에 안 돼요.”
녹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대체 그 아가씨가 무슨 능력으로 왕야의 목숨을 구해 주었단 말입니까? 지어낸 이야기 아닙니까?”
“영구 무사님이 한 말이에요.”
영구의 이름이 나오자 녹하는 더 묻지 못했다. 영구는 절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가 한 말이라면 사실일 터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녹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해도 마음을 다 주실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전 왕야가 이해돼요.”
백천범은 기홍이 건네준 물수건에 손을 닦았다.
“황보 아가씨와 왕야는 죽마고우였다가 정혼자가 되었잖아요. 왕야의 목숨을 구해 주기까지 했으니, 둘 사이의 감정은 남들보다 훨씬 더 깊을 거예요. 게다가 황보 가문이 몰살된 건 저희 아버지가 벌인 일이었대요. 그 일로 왕야께서 저희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게 되셨고요.
황보주아 아가씨도 힘들게 살아 돌아왔는데 왕야가 원수의 딸과 결혼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면 마음이 아프겠지요. 왕야께서도 아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클 거예요. 황보 아가씨의 기분이 상할까 봐 절 찾지 않으시는 거고요. …이해해요.”
기홍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 마마께서도 참으로 속상하시겠습니다.”
“괜찮아요.”
백천범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적응을 잘하는 편이잖아요? 잘 이겨낼 거예요.”
하지만 녹하의 신경은 오로지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잠깐만요. 정말 그런 이유라면 지금은 그 사건의 당사자가 돌아왔고, 황보 아가씨는 가족을 죽인 원수의 딸을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그렇다면 황보 아가씨는 그 화를 어찌 억누르겠습니까?
분명 마음속으로 왕비 마마를 증오하겠지요. 하지만 얼굴에는 그 증오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여인이 가장 무서운 법입니다. 왕비 마마,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자 백천범은 넋을 놓았다. 가족이 몰살당한 피맺힌 원한이라면, 황보주아가 그녀를 증오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왕야께서 이렇게 황보 아가씨를 지켜 주시면 그 아가씨는 앞으로 두려울 게 없겠지요. 그 점이 더 심각합니다.”
말을 내뱉으며 더욱 초조해진 녹하가 앞머리를 틀어잡았다.
“역시 밖에 알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황보 아가씨를 저택에 두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원래 세상살이는 선수를 치는 게 중요한 법입니다. 선수를 빼앗기면 큰 손해를 입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왕비 마마, 후환을 없애시려거든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기홍은 녹하를 낯선 사람 보듯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 큰일을 했을 텐데.”
그에 녹하가 우쭐해져 대꾸했다.
“여인은 큰일을 못 한다고 누가 그래? 여자 황제도 있었잖아?”
“우리 녹하 아가씨께선 포부도 참 크십니다!”
녹하가 손사래를 치며 화제를 되돌렸다.
“아, 괜히 딴말 말고, 황보 아가씨 얘기 중이었잖아. 왜 비꼬고 그래?”
그 뒤로 백천범은 후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기홍과 녹하에게 그대로 붙들렸다. 두 시녀는 가더라도 기필코 저녁은 먹고 가야 한다며 백천범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입을 모아 이 상황에서 왕비가 위축되면 황보주아에게만 이득이라고 했다. 초왕이 그간 백천범을 끔찍이 아꼈으니, 왕비가 조금만 분발하면 초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며 거듭 당부하기까지 했다.
* * *
따뜻한 방에 한가득 상이 차려졌고, 기홍은 백천범이 좋아하는 음식을 내어 왔다. 다리가 불편한 기홍을 대신해 오늘은 녹하가 백천범의 옆에 서서 음식을 덜어 주었다.
백천범은 늘 음식을 해치우듯 먹었기 때문에 그녀의 접시에는 금세 자그마한 산이 쌓였다.
반면 황보주아의 그릇에는 지극히 적은 양의 음식만 덜어져 있었다. 그녀는 먹는 모습도 참으로 고왔다. 치켜든 새끼손가락은 파의 흰 부분처럼 가늘고 길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곁눈질하던 백천범은 부러운 마음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자태와는 영 딴판이었다. 짧고 통통한 게 꼭 강아지풀 같았다.
역시 비교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비교를 하면 할수록 화만 날 뿐이었다…….
그녀는 황보주아에게 눈길을 거두고 밥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때 묵용감이 황보주아에게 음식을 덜어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널 위해 특별히 내어 온 죽순 요리다. 많이 먹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