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그가 전전긍긍하며 백천범에게 다가오더니 서둘러 예를 갖췄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소인이 정신이 없어 잠시 혼동을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백천범은 그를 일으키는 척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마음에 둘 것 없어요. 잘못 볼 수도 있죠.”
주인장은 초왕비의 살가운 말이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그가 굽실거리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어서 하나 골라 보시지요. 소인이 실수를 만회할 겸 마마께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백천범이 거절의 뜻을 밝혔다.
“개의치 말고 볼일 보시어요. 저는 구경하는 걸로도 족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낮추자 주인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주인장은 그녀에게 하나 고르라며 거듭 청했다.
그때, 묵용감이 성가시다는 듯 내뱉었다.
“고르라면 고를 것이지, 뭘 꾸물대는 것이오.”
기홍이 백천범을 살짝 밀었다.
“왕야께서 부르십니다. 어서 가 보시어요.”
아까부터 화를 억누르고 있던 녹하도 서둘러 웃는 낯으로 백천범을 끌어당겼다.
“왕비 마마, 그러지 말고 골라 보십시오. 마마께서 예쁘게 치장하시면 왕야의 위신도 더욱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학평관도 질세라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몇 개 골라 보십시오, 왕비 마마. 곧 다가올 명절에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황보주아는 깜짝 놀랐다. 백천범을 대하는 하인들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다. 그들은 백천범을 왕비가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친숙하고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다.
묵용감이 기홍에게 손짓했다.
“녹하와 너도 두 개씩 골라 보거라. 한 해 동안 바쁘게 일했으니 상으로 내리겠다.”
옆에 있던 학평관이 능글맞게 말했다.
“왕야, 그럼 소인도…….”
묵용감이 그를 흘겨보았다.
“사내가 장신구는 어디에 쓰려고?”
“허허.”
학평관이 조금 부끄러운 듯 목소리를 낮췄다.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냐, 다들 골라 보거라.”
다들 나무 상자 앞에 모여 귀한 장신구를 살펴보는데 황보주아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묵용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주아야, 어찌 고르지 않는 것이냐?”
황보주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왕비 마마께서 먼저 고르실 때까지 방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게 여러 가지 장신구를 맞춰 주려고 주인장을 부른 것이다. 저들은 단벌로 고를 것이니 네 것과 겹칠 리 없다.”
녹하와 기홍은 황보주아가 백천범을 얕볼까 봐 일부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묵용감이 저렇게 말하니 그들은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저 백천범이 황보주아에게 지지 않길 바라면서. 백천범은 초왕비가 아닌가. 마땅히 왕비인 그녀가 먼저 골라야 했다.
두 시녀가 탁자에서 물러나고 묵용감의 안색도 살짝 어두워지자 백천범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녹하가 팔로 그녀를 살짝 건드렸다.
“왕비 마마, 다 고르셨습니까?”
백천범은 황보주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귀한 손님께서 먼저 고르시지요.”
백천범은 한 문장으로 그녀의 신분을 명확히 구별 지었다. 황보주아의 얼굴은 금세 울긋불긋해졌고, 녹하와 기홍의 얼굴엔 희색이 가득했다. 역시 어린 왕비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이제 황보주아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볼 차례였다.
황보주아가 묵묵히 뒤로 물러서자 묵용감이 그녀를 끌고 백천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백천범을 내려다보았다.
“주아는 손님이 아니오. 이제는 모두 한 가족이오.”
그가 고개를 돌려 황보주아에게 말했다.
“왕비가 아직 어려 철없이 말할 때가 있다. 혹 우를 범하더라도 마음 쓰지 말거라.”
황보주아는 빙그레 웃으며 백천범에게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왕비 마마께서 많이 보살펴 주십시오.”
백천범은 침착하게 묵용감의 말을 곱씹었다. 이제는 모두 한 가족이라…….
그 말은 그가 아직 그녀를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쫓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백천범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황보주아는 무릎을 굽힌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녹하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지만 기홍은 묵용감과 백천범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백천범의 허리를 살며시 찔렀다.
백천범은 아직도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황보주아를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역시 대학사 가문의 딸이었다. 나무랄 곳 없이 훌륭한 자세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무릎을 굽히고 있는데 미동도 하지 않다니, 그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궁에서 규율을 배울 때 그녀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 늘 매를 맞아야 했는데……. 의연한 황보주아와 자신을 비교해 보니 그녀는 스스로가 동네 건달처럼 느껴졌다.
한참이나 무릎을 굽히고 있던 황보주아는 결국 참기 힘들었는지 묵용감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그는 복도에서 영구와 대화를 주고받을 뿐, 이쪽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남몰래 이를 꽉 깨물던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백천범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세요, 언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흐트러짐 없이 무릎을 굽히고 계실 수 있나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
초왕이 황보주아를 가족이라 했으니 백천범은 괴로워도 받아들여야 했다. 동월국에서 지아비의 말을 잘 들어야 좋은 아내라고 여겼다. 백천범은 묵용감에게 좋은 아내이고 싶었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후원에 측왕비도 있으니 황보주아가 고청접의 자리를 메웠다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후원의 일에 관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집의 안주인으로서 황보주아를 보살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내인 묵용감에게 맡기 두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을 터. 그녀는 황보주아의 장신구 정리를 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보주아는 스물이 넘었으니 백천범과 제법 나이 차이가 났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귀하게 자란 그녀에겐 대갓집 규수의 기품 있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그녀는 옆에서 연신 재잘거리는 어린 계집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녀가 에둘러 말했다.
“제가 어찌 왕비 마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하인들에게 시키십시오.”
“괜찮아요. 늘 하는 일인걸요.”
황보주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부지런하십니다. 다들 왕비 마마 같으면 하인들이 참 한가하겠습니다.”
“다들 평소에는 바쁘게 일하니 가끔 여유를 부리는 것도 괜찮지요.”
녹하는 황보주아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묵용감이 곁에 없으니 두려워할 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녹하는 황보주아가 자꾸 거슬렸다. 그녀의 온화한 모습은 어쩐지 가식적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면 계략을 꾸밀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청접과는 다르다. 황보주아가 정말 일을 꾸민다면 초왕이 이번엔 누구를 도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듯 뼈 있는 말을 내뱉는 황보주아의 모습에 녹하는 자신이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어린 왕비가 괴롭힘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백천범을 슬쩍 찌르며 말했다.
“밖에 찻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마께서 왕야께 차 한 잔 내어 드리는 게 어떠신지요.”
백천범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무슨 차를 드릴까요? 오늘 왕야께서 운정차雲頂茶는 드셨어요?”
황보주아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오라버니께서 새벽에 갑자기 깨셔서는 운정차에선 이상한 맛이 난다고 용정차龍井茶를 끓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용정차를 끓여 드렸어요.”
정보가 너무나 많았던 탓에 녹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죄신의 딸이, 대체 뭐 하자는 거람? 새벽에 갑자기 깼다니… 설마 왕야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단 말인가?
하지만 백천범의 신경은 오로지 찻잎에만 가 있었다. 그녀는 황보주아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용정차를 내어 드릴게요.”
묵용감과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그녀는 혹여 황보주아에게 이 기회를 빼앗길까 봐 서둘러 문을 나섰다.
백천범이 떠나자 방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던 녹하는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녹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보주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렇게 콧대가 높은 하인은 생전 처음이었다.
서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묵용감은 발소리가 들리자 공문을 하나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니 백천범이 조심스레 차를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예 공문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백천범이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가 아무런 반응도 없으니 결국 백천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야, 차 드시어요.”
묵용감이 짧게 대꾸했다.
“그냥 두시오.”
백천범은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바빠도 그녀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을 텐데. 지금 그는 낯선 사람처럼 그녀를 대했다. 어찌 하루 만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계속 자리를 지키자 마침내 묵용감이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소?”
백천범은 고개를 돌리고 살짝 위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묵용감이 가만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여쁜 속눈썹을 위로 치켜세운 채, 눈을 깜빡이며 미세하게 떨고 있는 모습이 가엽고도 애처로웠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왕비, 할 말이 있거든 말해 보시오.”
백천범은 그제야 몸을 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 절 화나게 하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지난 번 기방에서처럼요?”
묵용감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아니오…….”
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주아는…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오. 앞으로 함께 지낼 것이오.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소?”
“이해해요.”
백천범이 빠르게 답했다. 그녀는 눈에 힘을 줬지만 그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가 다시 한번 황보주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해 주는 순간 심장을 깊숙이 베인 듯 통증을 견딜 수 없었다.
“다 알아요.”
그녀는 조용히 대답을 마친 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묵용감이 그녀를 불렀다.
“천범.”
백천범은 문 앞에 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날 좀 이해해 주오.”
백천범이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왕야를 이해하면 제 마음은 누가 이해해 줄까요? 왕야, 이럴 거면 왜 날 흔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