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깜짝 놀란 월향이 입을 벙긋거리다 주변을 살폈다.
“너 미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왕야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날아갈 거야!”
월규도 말을 하자마자 후회에 잠겼다.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묵용감과 백천범이 잘 지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다른 하인들 역시 새 왕비가 오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 천성이 따뜻한 백천범을 모시는 것이 좋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초왕과 초왕비의 사이가 이렇게 틀어지는 건 또 그것대로 가슴이 아팠다.
순탄치 않은 여정 끝에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초왕과 초왕비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까!
넋을 놓고 있던 백천범은 크게 한 모금 들이켰던 차를 왁 하고 다시 쏟아냈다. 그녀는 갓 내온 차가 뜨겁다는 당연한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
월향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와 입을 자세히 살폈다.
“소인에게 입 안을 보여 주십시오. 많이 데이셨습니까?”
백천범은 얼른 입을 가리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다친 백천범을 보자 월규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예전에 왕야께서 왕비 마마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해도 무조건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이 곧장 가서 왕야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월규가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고통을 참아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 절대 가면 안 돼!”
월규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안 됩니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마마께서 입을 덴 걸 아시면 분명 보러 오실 텐데요.”
백천범은 회림각에서 겪었던 일을 두 시녀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체면이 서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 시녀도 자신처럼 괴로워할 게 싫었다. 두 시녀는 가라앉은 백천범의 표정을 보고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말해 주지 않아도 왕비의 표정과 행동을 보니 얼추 짐작이 갔다. 월규가 가서 고한다 한들 묵용감은 오지 않을 것이다. 혹여 온다 할지라도, 이런 고육책을 써 가면서 그를 부르는 것은 그녀의 콩알만 한 자존심이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벌려 두 시녀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 봐, 괜찮다니까. 왕야가 아무렇지 않은 걸 보시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여기실 거야.”
“소인들이 잘 설명하면 되지요.”
“그럴 필요 없어.”
지금 그에게는 오직 황보주아뿐이라 그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월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세우고 투덜거렸다.
“왕야께서도 참. 언제는 그렇게 쫓아다니시더니, 마음을 얻었다고 이렇게 내팽개치시고…….”
월향이 얼른 그녀를 꾸짖었다.
“그게 네가 할 말이니? 분수를 알아야지.”
월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 탓에 좀처럼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왕비 마마 때문에 속이 터져서 그렇지.”
“나한테 감정을 못 숨긴다더니, 지금 넌 어떻고? 아직 정확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그리 호들갑이야? 왕비 마마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훈수나 두고. 만약 우리 생각이 틀렸으면? 왕야께 사정이 있으신 거라면 네 행동이 일을 그르치는 거라고!”
성격이 온순했던 월향이 드물게 조목조목 따지자 월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향을 피웠다.
둘의 대화를 듣던 백천범이 월향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사정이 있으셔서 쌀쌀맞게 대하시는 걸까?”
“소인 생각에는… 그런 듯합니다.”
“대체 무슨 사정이실까?”
“그것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홍 언니와 녹하 언니한테 물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두 분은 왕야를 오랫동안 모셨으니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두 분도 모르시면 가동과 영구 무사님에게 여쭤보십시오. 두 분은 왕야 곁에 더 오래 계셨으니 분명 아시겠지요.”
순간 구름이 걷히고 해가 뜨는 것처럼 백천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말했다.
“그게 좋겠다. 오후에 다시 찾아가서 사부님한테 물어볼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니 마음속의 근심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생기를 되찾은 그녀가 기다란 깃털을 들고 토끼 우리 앞에 앉아 새끼 토끼를 간질였다.
월향이 자그마한 의자를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왕야께서 자꾸 쪼그려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날 때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런 작은 부분까지도 살뜰히 그녀를 챙기던 그였다. 여인들보다 세심하게 돌볼 정도라 시녀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알아차리곤 했다. 백천범은 늘 그가 진심을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오늘 보았던 묵용감의 시선은… 칼로 그녀의 살을 베어 내기라도 할 듯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 분명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백천범은 그렇게 믿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결 기분이 가벼워진 그녀가 월규를 올려다보았다.
“배고파, 점심은 조금 빨리 먹자.”
월규는 대답하고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배가 고프긴, 얼른 회림각에 가고 싶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 * *
한편 추문은 수원상에게 밖에서 들은 소문을 낱낱이 고했다.
“마마, 저택에 곧 큰 변화가 생기려나 봅니다. 오늘 초왕비께서 회림각에 가셨는데, 소박을 맞고 망신을 당하셨답니다. 소인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왕야께서는 그저 왕비의 새로움에 호감을 가지셨던 거지요. 그러니 시일이 지날수록 질릴 수밖에요. 마마, 이 고생도 이제 끝인가 봅니다!”
흥분한 추문과는 다르게 수원상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끝이긴, 황보 아가씨가 오지 않았느냐? 왕야의 죽마고우이자 약혼녀였다던데, 누군들 비교가 되겠느냐? 아마 왕야께 백천범보다 더 중요한 여인일 테지. 괜히 떠들썩하게 굴지 말거라. 우린 분수에 맞게 조용히 있으면 될 일이다.”
“아이참, 마마.”
추문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어찌 그 생각을 안 해 봤겠습니까? 지금 황보주아 아가씨가 어떤 신분입니까? 죄신罪臣의 딸입니다. 황제 폐하나 백 승상께서 그 아가씨가 살아 있는 걸 아신다면 가만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도망친 죄신의 자식들을 용서해 준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사옵니다.
설마 폐하께서 화근을 남겨두실까요? 우리가 소문을 내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 드리면 황보주아 아가씨도 이곳에 머무를 수 없을 겁니다. 그땐 저택에 마마만 남으시겠지요. 그러니 고생 끝 아니겠습니까!”
수원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황보주아가 백천범을 내쫓길 기다렸다가 그 후에 황보주아를 처리하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방도를 짜서 둘을 싸우게 해야죠. 그 후에 우린 편히 앉아 구경만 하면 됩니다. 어부지리가 될 겁니다.”
수원상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예전 일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만약 황보주아가 분수를 지키지 않을 생각이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먼저 손을 쓰겠지.”
* * *
백천범은 일부러 묵용감이 낮잠을 자는 시간에 맞춰 회림각으로 향했다. 그에게 정말 사정이 있는 거라면 오전과 같은 일은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괴로움을 겪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막상 도착한 회림각은 오전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가게에서 온 일꾼들이 예쁜 나무 상자를 들고 질서정연하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사치스럽게 차려입은 가게 주인장이 학평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보아하니 황보주아에게 좋은 걸 선물하려는 모양이었다. 백천범은 발걸음을 늦춰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문 앞에 서 있던 기홍이 행렬의 뒤에 있는 백천범을 발견하고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다가오려 했다.
백천범도 기홍을 발견하고 멀리서 소리쳤다.
“언니, 움직이지 말아요. 제가 갈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용감이 발을 걷어 올리며 나타났다. 그는 가게 주인장에게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직접 찾아오게 하여 미안하오. 번거로웠을 터인데.”
“아닙니다.”
주인장도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도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가 뒤쪽을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소인이 좋은 것들로 가져왔으니 직접 보시지요.”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가져오시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주인장이 급히 말을 이었다.
“왕야,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밖에서 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햇살 아래에서 보면 촛불 빛으로 보는 것보다 선명합니다.”
묵용감은 학평관에게 자리를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정원에는 순식간에 팔선상이 놓였고, 일꾼들이 상에 나무 상자를 내려놓았다. 나무 상자를 여니 보물 창고가 열린 듯 황금빛 향연이 펼쳐졌다.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이 반짝이며 저마다 빛을 뿜었다.
나무 상자가 연이어 열리자 백천범은 주인장이 왜 정원에서 열어 보자고 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귀한 장신구들을 내보이며 으스대고 싶었으리라!
밖으로 나와 귀한 장신구를 바라보던 황보주아도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묵용감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보거라. 곧 새해를 맞이하니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초왕이 애처가라는 소문을 들었던 가게 주인은 초왕이 이런 말을 할 사람은 분명 초왕비라 생각했다. 그가 곧장 그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상인의 인사에 난감해진 황보주아는 웅얼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어두워진 백천범은 소매에 가려진 두 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옆에 서 있던 기홍이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
“왕비 마마, 노여움을 푸시어요. 아무래도 주인장이 노안 때문에 눈이 침침한 듯합니다. 그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아니다. 백천범이 화가 난 건 가게 주인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난 이유는, 묵용감의 태도다. 왜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왜 저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냔 말이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까맣고 큰 눈으로 묵용감을 노려보았다. 그는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오히려 학평관이 큰소리로 웃으며 사실을 바로잡았다.
“잘못 보셨습니다. 우리 왕비 마마는 저분이십니다!”
그가 손을 뻗어 백천범을 가리켰다.
주인장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장사꾼들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해야 했다. 그런 그가 초왕비를 못 알아보았으니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한 셈이었다. 그는 애당초 백천범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왕비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주인장은 시녀들 사이에 있는 여자에게 눈길을 줄 만큼 여유롭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