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얌전히 남월각에서 기다리겠다고 결심한 그녀였지만, 자고 일어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눈을 뜨자마자 그가 보고 싶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질투가 심한 부인인 모양이다.
머릿속에 묵용감과 황보주아가 밤새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떠올랐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묵용감이 황보주아의 머리를 빗겨 주고, 연지를 발라 주다 붉은 입술을 머금고…….
그녀는 힘껏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장면들을 떨쳐 냈다.
사랑에 눈을 뜨지 못했을 땐 그가 다른 여인에게 다정하게 굴어도 그저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그녀의 마음에 들어오고 난 뒤로는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가 그녀의 심정을 알기나 할까!
잔뜩 성이 난 그녀가 발을 몇 차례 구르자 나무 침대에서 탁탁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월규가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왕비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시무룩하게 답했다.
“안 일어났어.”
월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잠꼬대를 하시는 거군요.”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우스웠기에 백천범은 이불을 내리고 일어나 앉았다.
“몇 시진이나 됐어?”
“진시辰時(오전 7시~9시)입니다.”
월규가 그녀를 바라보며 뼈 있는 말을 내뱉었다.
“마마께서는 정말 마음이 넓으십니다. 지금까지 편히 주무시다니요.”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가 어쩌겠어?”
왕비의 모습에 월규는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분명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터. 어찌 이리 미적지근한 자세로 나온단 말인가?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어제는 갑작스러워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오늘은 마마께서 무슨 대책을 세우셨을 줄 알았습니다.”
“…주인이 있던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있으니 왕야께서도 고민이 크실 거야. 난, 난 그저 왕야를 더 번거롭게 하기 싫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십시오. 나중에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기억이나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월규는 들고 있던 옷을 그녀에게 내던지고 따뜻한 물을 가지러 갔다.
백천범은 꾸물대며 옷을 갖춰 입은 뒤, 토끼 우리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이제 막 털이 자라난 새끼 토끼를 보며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왕야께서 날 잊진 않으실 거야, 절대로. 날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에휴. 하지만 내가 계속 안 찾아가다가 왕야께서 정말 날 잊어버리시면 어떡해. 안 그래도 공무로 바쁘신 분이 주아 아가씨까지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맞다, 기홍 언니의 발은 괜찮아졌을까? 가서 괜찮은지 봐야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왕야를 성가시게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멀리서 얼굴만 보고 오려는 거야.”
아침을 먹은 뒤,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월규에겐 회림각에 다녀오겠다고 일러 두었다.
그때 월향이 다가왔다.
“소인이 왕비 마마를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냐. 기홍 언니한테 약만 주고 돌아올 거야.”
월규가 월향을 잡아끌었다.
“가지 마. 곧 밥을 해야지.”
월규는 월향에게 넌지시 눈치를 주었다.
월향은 월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네가 하면 되잖아. 련이한테 도와달라고 해. 왕비 마마께서 혼자 가시면 내가…….”
“마마께서는 네가 만든 음식만 드시잖아. 그리고 놓겠다던 수는 다 놓은 거야?”
월규는 막무가내로 월향을 뒤쪽 부엌으로 끌고 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왕비 마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점심을 들게 되시면 하인을 보내 저희에게 알려 주셔야 합니다!”
백천범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밖으로 향했다. 대문을 넘어서자 따뜻한 햇볕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고개를 들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생각했던 것만큼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반월문에 들어서자,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어찌어찌 긴 복도를 꺾어 들어가니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제법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조용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발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두꺼운 솜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방에서 나온 학평관이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왕야께서는 무얼 하고 계세요?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던데.”
학평관이 조심스레 답했다.
“의복점에서 옷을 보내서 주아 아가씨의 옷을 고르고 계십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황보주아는 빈손으로 저택에 왔으니 준비해야 할 물건도 많았다. 그녀는 이런 것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기홍 언니는 안에 있어요?”
“기홍 아가씨에게는 왕야께서 휴가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녹하 아가씨만 안에서 시중을 들고 있지요.”
기홍이 안에 없으니 안에 들어갈 핑곗거리가 없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는데, 학평관이 발을 걷어 올리더니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흠칫 놀란 백천범은 급히 고개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묵용감은 학평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옅은 미소를 띤 채 도홍색 웃옷을 황보주아에게 가져다 댔다.
“이 옷이 좋을 듯하구나. 입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
황보주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도홍색을 좋아하는 걸 잊지 않으셨군요. 입어 볼 필요도 없지요. 이 옷으로 하겠습니다.”
“여러 벌을 골라 보거라.”
묵용감이 탁자 앞에 서서 상의와 이어진 하늘거리는 치마를 들었다.
“이것도 괜찮구나. 입으면 옅은 색 깃이 보여 예쁠 듯한데.”
황보주아가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여인에게 옷도 골라 주실 줄 알고, 혼인을 하시니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묵용감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옮겼다.
백천범은 왜 자신이 문 앞에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학평관이 묵용감에게 고했지만 묵용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황보주아도 아랑곳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그저 녹하만이 그녀에게 응원의 눈빛을 보내며 들어오라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이 콩알만 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다.
그때 묵용감의 시선이 그녀의 몸 위에 닿았다. 순간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백천범은 문턱에 서서 그의 말만 기다렸다. 어서, 언제나처럼…….
묵용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같진 않았다.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백천범은 한겨울의 호수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분명 그녀를 봤으면서 어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줄곧 그녀를 애지중지하던 그가… 다정히 아껴 주던 그가… 누구보다 사랑해 주던 그가 어찌 한순간에 그녀를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문을 향해 돌아섰다.
방 안에 있던 녹하의 시선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걱정과 분노가 담긴 눈빛이었다. 문 앞에 있던 학평관도 영문을 알 수 없는지 눈만 굴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아무리 황보주아가 돌아왔다고 해도 마음이 이리도 빨리 변할 수 있단 말인가! 학평관조차도 초왕이 너무하다는 생각에 입을 벙긋거렸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백천범은 반월문을 나온 뒤에야 자신이 아직 약병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가 난 나머지 기홍에게 약을 주는 것도 잊은 것이었다. 다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되었다. 회림각에 더 좋은 약이 많을 텐데 그녀가 가져온 약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햇살이 내리쬐었지만 전혀 따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길에 놓인 돌멩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묵용감, 날 찾아오기만 해 봐라,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 * *
백천범의 인생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처럼 괴로운 적은 없었다.
회림각에서 돌아온 그녀는 오후 내내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 새끼 토끼들만 노려보았다.
월규는 그녀가 회림각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뾰로통한 얼굴을 보니 짐작하고도 남았다. 초왕과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월규가 그녀에게 차를 올리며 말했다.
“왕비 마마, 노여운 일이 있으시거든 소인에게 털어놓으십시오. 무엇 하러 죄 없는 토끼들을 그리 노려보십니까. 겁을 먹어 덜덜 떠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백천범이 찻잔을 받아 들고는 언짢은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언제 노려봤다고 그래, 추워서 떠는 거지.”
“방 안이 이렇게 따뜻한데 어찌 추울 수 있겠습니까.”
월규가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왕비 마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분이셨습니까? 예전, 고청접은 서왕비 신분으로 마마께 감히 손을 댔습니다. 그러다 어찌 되었습니까? 마마는 왕야의 정비이십니다. 뒷배도 없는 황보 아가씨를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가 아닙니까?”
월규의 말에 백천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나더러 그 사람을 죽이란 말이야?”
“…제가 언제 죽이라 하였습니까? 소인의 말은 이곳에서 내보내면 된다는 겁니다.”
백천범이 가슴이 답답한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쫓고 싶어. 하지만 나는 계략 같은 건 잘 모르는걸. 해 본 적도 없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월향이 월규를 흘겨보았다.
“왕비 마마께 그런 잔꾀나 알려 드리고, 참 잘하는 짓이다. 왕야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겁 날 게 뭐 있어?”
월규가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왕야께서 설마 왕비 마마께 죄를 물으실까? 마마, 제가 볼 땐 이 방법이 좋겠습니다. 기회를 보시다가 왕야의 속마음을 떠보십시오. 만약 왕야께서 화를 내시며 왕비 마마를 내보내려 하신다면, 왕비 마마에 대한 마음이 모두 거짓임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왕비 마마를 향한 마음이 거짓인 부군과 함께 지낼 이유가 있습니까? 연을 끊고 사 제독을 찾아가는 게 낫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