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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56)화 (255/1,192)

제256화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습니다.”

영구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여인이든 신분은 전부 왕야께서 내리십니다. 우리는 왕야께만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가동은 지지 않고 계속 입을 놀렸다.

“왕비 마마는 내 제자란 말이야. 마마께서 마음 아파 하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영구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 내내 모두 각자의 시름에 빠졌다. 가마꾼들도 무언의 압박을 느꼈는지 아까보다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중문에 도착했지만 학평관이 보이지 않았다. 가마에서 내린 백천범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가마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기홍을 부축하던 녹하가 얼른 말했다.

“뭘 그리 겁내십니까, 어서 가시지요.”

그래, 겁낼 것 없었다. 여긴 그녀의 집이 아닌가!

백천범은 한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기홍을 부축하며 천천히 회림각으로 들었다.

복도에 도착하자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야, 황보 아가씨를 어느 처소로 들여야 할지…….”

묵용감의 침착한 음성도 들려왔다.

“후원이 아닌 이곳 회림각에 묵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왕비를 보거든 남월각으로 돌아가라 이르거라.”

백천범이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그녀를 안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회림각에 묵으라고 했던 그다.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여느 사내들처럼 단번에 변하다니…….

기홍과 녹하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옛 연인이 돌아왔다고 지금의 부인을 버리려 한단 말인가?

백천범은 기홍의 팔을 감쌌던 손을 풀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녹하가 얼른 그녀를 붙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왕비 마마, 왜 가시려고요? 남월각에서 묵는다고 해도 식사는 드셔야지요. 이곳에서 식사하지 말란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백천범이 그녀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남월각에서 먹으면 돼요.”

“왕비 마마!”

녹하가 애석하다는 듯 외쳤다.

“예전의 그 용기는 어디 가셨습니까? 왕비 마마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십니다. 안주인이 한낱 외부인을 무서워하시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들더니 녹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야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이제 막 만났는데 하고 싶은 말도 많으시겠죠. 두 분이 옛날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뒤에 올게요.”

그녀가 묵용감을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너무나 사려 깊은 모습에 녹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묵용감은 방에서 나와 영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순간, 반월문에 자그마한 몸집형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곧장 시선을 거두고 녹하에게 다가갔다.

“들어와 주아의 치수를 재고 의복 가게에서 옷을 몇 벌 맞춰 오너라.”

기분이 조금 언짢았던 녹하는 핑계를 떠올렸다.

“기홍이 발을 다쳤습니다. 우선 기홍을 방에 데려다주고 가겠습니다.”

묵용감은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녹하는 입을 삐죽거리며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기홍이 목소리를 낮추고 녹하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때문에 그러는 건 알겠는데, 왕야께 맞서려고 하지 마. 어쨌든 우리 나리시잖아.”

녹하는 지금껏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왠지 가동이 곁에 있기 때문에 자꾸만 이런… 비통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만약 가동이 그녀를 배신한다면 그녀는 곧장 칼을 집어 들고 화근을 잘라 내어 그를 태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묵용감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가 고프겠구나. 간식거리를 가져다달라고 해야겠다.”

황보주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셋째 오라버니,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 우는 것이냐. 다시 만났으니 잘된 일이지.”

묵용감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어서 닦거라.”

황보주아가 손수건을 받아 눈가를 닦아 냈다.

“셋째 오라버니, 장가를 가신 것입니까?”

“그래.”

“조금 전의 그분이십니까?”

“그래.”

묵용감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후원에 한 명 더 있다.”

황보주아가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까맣게 잊으셨나 봅니다.”

“잊은 적 없다.”

묵용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안색이 다소 어둡게 가라앉았다.

“친왕인지라 나도 손 쓸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압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백여름의 딸과 혼인을 하셨겠습니까.”

황보주아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일들이 아니었다 한들, 셋째 오라버니께서는 응당 혼인을 하셨어야 합니다. 저 때문에 오랜 시간을 허비하셨잖습니까. 가정을 꾸리신 모습을 보니 저도 참으로 기쁩니다.”

묵용감은 침묵을 지키다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말해 보거라.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어째서 날 찾아오지 않은 것이야? 그때는 왜 그리 도망을 쳤고?”

황보주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시자마자 내리신 명이 황보 가문의 몰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제자들도 대부분 연을 끊었지요. 괜히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몇 분이 끝까지 의리를 지켜 몰래 서신을 보내 주었습니다.

서신을 받은 아버지께서는 저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며칠 동안 도망치셨고, 숙부들을 만나 금광사金光寺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하셨지요. 가던 길에… 어디에서 정보가 새었는지 모르겠지만, 병사들에게 쫓기게 되어 그만, 제 두 눈으로 직접…….”

그녀가 결국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어린 동생의 가슴에 검이 꽂히는 걸 보고 말았습니다. 피가 제 얼굴에 튈 정도였어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동생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검에 찔렸다면 좋았을 텐데…….

저는 숙부께서 필사적으로 지켜 주신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이름을 숨기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냈지요. 나중에 오라버니께서 임안성에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뵙고 싶었지만, 숙부께서 반대하셨어요. 오라버니도 어쨌든 묵용씨라고…….

그러다 작년에 숙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홀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오라버니를 찾아오는 방법 외엔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셋째 오라버니, 아직도 제가 필요하십니까?”

묵용감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지. 앞으로 이곳이 네 집이다.”

* * *

백천범이 남월각에 돌아오자 월규와 월향이 허겁지겁 뛰어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왕비 마마, 왕야께서 웬 여인을 데려오셨다면서요?”

백천범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응. 황보주아라는 분이야. 왕야의 예전 약혼자.”

월규와 월향의 얼굴이 멍해졌다. 오래전부터 회림각에서 일했던 두 시녀는 묵용감에게 황보주아가 어떤 존재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아끼고 총애하는 사람은 왕비다. 황보주아가 돌아왔다고 해서 옛사랑을 그리워할 리 없었다. 그게 이치에 맞지 않는가?

잔뜩 가라앉은 백천범의 모습을 알아차린 월규가 서둘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왕비 마마, 마음 놓으십시오. 옛말에 새사람의 웃음만 들을 뿐, 옛사람의 울음은 듣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왕야는 왕비 마마의 부군이십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백천범이 입을 잔뜩 오므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옷은 새 옷이 좋고, 친구는 옛 친구가 좋다는 말도 있잖아.”

월향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야께서는 품마다 사랑이 있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월향이 서둘러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왕야께 왕비 마마가 있는 한 다른 여인을 만났다고 해서 다른 연정이 생길 리 없다는 거죠. 예전에는 그분을 은애하셨는지 몰라도 지금은 왕비 마마가 계시니… 어쨌든 왕야께서 지금 은애하시는 분은 왕비 마마가 아니십니까. 제 말은…….”

“됐어. 설명 못 하겠으면 하지 마. 더 복잡해지니까.”

월규가 언짢은 표정으로 월향을 한번 바라보고는 백천범을 끌고 들어갔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식사는 하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마지못해 물었다.

“오늘은 뭘 먹을 건데? 월향이 만든 음식?”

이 와중에도 반찬을 묻는 그녀의 모습에 월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 울고불고 슬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백천범은 먹는 걸 좋아하고 월향은 요리를 좋아하기에 묵용감의 허락을 받아 남월각에 작은 부뚜막을 설치했다. 이젠 매일 앞뜰 부엌에 가지 않아도 왕비에게 언제든 따뜻한 음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편이 남월각 하인들에게도 나았다. 백천범이 회림각에 가 있을 땐 하인들끼리 부엌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맑은 성격의 백천범은 괴로운 감정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월향의 요리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남월각은 규율이 없는 게 규율이었다. 대문만 닫으면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남월각 하인들도 백천범의 영향으로 서로를 평등하게 대했다. 백천범과 월향, 월규는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덜어 주었다. 평소보다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조용하고 따뜻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다른 하인들이 원한다면야 함께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입이 많아지면 혹여 밖으로 새어 나가는 말이 있을까 봐 월규는 늘 세 사람의 음식만 차렸다.

밥을 다 먹은 후, 백천범은 토끼 우리에서 새끼 토끼 한 마리를 꺼내 평상에 기대어 가볍게 쓰다듬었다. 얼핏 보기에는 토끼를 돌보는 듯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녀의 유모는 늘 걱정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고 했었다. 유모는 평소 마음속에 걱정을 오래 담고 있으면 걱정이 점점 더 깊어지고 기분도 무거워진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껏 유모의 말대로 해 왔다. 생사의 이별이 아닌 이상, 쉽게 잊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역시나 유모의 말을 따르니 그간 홀가분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다.

이번 일도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별로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초왕이 이제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황보주아의 거취를 해결하고 나면 그녀를 보러 올 터였다. 괜한 말썽을 일으키는 대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 그녀의 사려 깊음을 칭찬해 주겠지.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째서 계속 가슴이 답답한 걸까?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유모는 울고 싶지 않을 땐 고개를 들어 올리라고 했다. 그럼 눈물이 뱃속으로 들어갈 거라면서.

그녀는 울지 않는 대신 괴로운 마음은 다 남겨 두기로 했다. 그가 왔을 때 그녀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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