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55)화 (254/1,192)

제255화

녹하가 기겁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가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녹하의 손에 입을 맞췄다.

“겁낼 게 뭐 있어. 난 겁쟁이가 아니라고.”

녹하가 재빨리 손을 뺐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네가 제일 겁나.”

“내가 왜 겁나는데?”

가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잖아.”

녹하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그를 가리켰다.

“다른 사람이 널 잡아먹을까 봐 겁난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동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녹하는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입이 귀에 걸릴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녹하의 뒤를 쫓았다.

* * *

묵용감은 자신이 행복한 만큼 곁에 있는 이들이 행복하길 원했다. 게다가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동과 녹하를 데려가기로 했다. 녹하만 데려오자니 기홍에게 불공평한 처사인 듯하여 아예 다 데려와 버렸다.

하지만 그와 백천범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지 누가 붙어 있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기홍을 영구에게 맡겼다.

기홍은 저택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시녀였기에 귀한 대접을 받아 왔다. 이곳은 길이 잘 닦여 있지 않아 사내가 곁을 지켜야 마음이 놓일 듯했다.

기홍과 영구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긴 했지만 친분은 깊지 않았다. 영구가 워낙 말수가 적은 데다, 평소 차가운 표정만 짓고 있으니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탓이었다. 낯짝 두꺼운 가동은 붙임성이 좋아 누구와도 쉽게 친해졌지만, 영구는 말을 나누는 이도 극히 적었다.

그러다 보니 기홍과 영구가 대화를 나눈 일도 손에 꼽았다. 하필 두 사람을 한데 엮어 놓았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기홍은 절대 따라나서지 않았을 터였다.

“가시죠.”

한참이나 하릴없이 서 있던 기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떠나신 지도 한참이 지났으니 멀리 떨어지면 안 될 듯합니다.”

영구는 아무 말도 없이 앞으로 향했다. 기홍은 서둘러 뒤를 따랐지만 걷는 속도가 느린 탓에 금세 거리가 벌어졌다. 영구는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이렇게 하길 수차례, 기홍은 조금 미안한 마음에 조심히 말을 건넸다.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따라갈게요.”

영구는 가만히 서서 답했다.

“왕야께서 아가씨를 맡기셨으니,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순간 기홍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매화 숲속은 온통 진흙투성인 데다 눈까지 내려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발이 푹푹 빠져 걷기 힘들었지만, 영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서둘러 발을 내디뎠다.

그러다 그만 발이 미끄러졌고, 그대로 넘어질 듯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영구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은 덕에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다시 일어나려던 기홍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발을 삐끗한 것 같아요.”

영구가 그녀의 다리를 훑어보더니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업히십시오.”

“아,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기홍은 지극히 내성적인 아가씨였다. 사내에게 업히다니, 부끄러워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영구는 조금 성가시다는 듯 재촉했다.

“어서요!”

그가 얼굴을 굳힐 땐 정말 초왕과 닮은 면이 있었다. 잔뜩 주눅이 든 기홍이 머뭇거리다 그의 등에 업혔다. 영구는 조금 마른 체격이었지만 그녀를 가뿐하게 업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어깨에 기댄 기홍의 얼굴은 만개한 매화꽃보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묵용감은 백천범과 손깍지를 끼고 천천히 숲속을 거닐었다. 아름다운 절경에 두 사람은 조용히 앞으로 향했다. 활짝 핀 홍매화와 흩날리는 눈꽃 아래, 그의 곁에는 그녀가, 그녀 곁에는 그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맞추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사실 행복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 어디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문득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 있는 매화나무 아래에 누군가 서 있었다. 잘 보니 여인이었다. 큰 키에 높게 묶어 올린 머리, 붉은 옷까지……. 꼭 매화꽃과 한 몸인 듯 신비한 모습이었다.

백천범도 그 여인을 발견한 듯 중얼거렸다.

“저 사람, 정말 이상하네요.”

정말 이상한 것은 묵용감의 표정이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여인을 응시하던 그가 백천범의 손을 놓고 천천히 걸어갔다. 백천범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데없이 밀려온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묵용감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마지막에는 거의 내달리다시피 했다. 여인의 앞에 도달한 그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백천범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아비가 눈앞에서 다른 여인을 품에 안다니…….

그녀는 그의 곁에 다가가 자신이 초왕비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뼈에 사무치도록 차가웠다.

눈송이가 자그마한 칼로 그녀의 살을 베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두려웠다. 감당하지 못할 재앙이 닥쳐올 것만 같았다. 묵용감이 다른 여인을 안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기녀들과 다정한 척 거짓 연기를 선보인 적도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잃어버렸던 연인을 찾기라도 한 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애틋하기 짝이 없는 둘을 바라보자니 가슴이 턱턱 막혔다. 야속하게도 발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통에 그녀는 바보처럼 서 있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과 녹하가 찾아왔고 두 사람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여인을 놓아주고는 고개를 돌려 가동과 녹하에게 분부했다.

“왕비를 데리고 돌아가거라.”

겨우 정신을 차린 백천범이 허공에 흩날리는 눈꽃보다 가녀린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는 안 돌아가세요?”

그가 단 두 글자로만 답했다.

“가오.”

그가 여인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세 사람은 그들 곁을 지나 점점 멀어지는 묵용감과 여인의 뒷모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녹하가 겨우 입을 뗐다.

“대체 누구야?”

가동이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분명 황보주아 아가씨야.”

백천범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황보주아라면 이미 죽었다던 묵용감의 약혼녀가 아니던가? 묵용감이 평생 홀로 살아가려 했던 것도 그 여인 때문이라고 들었다. 어쩐지 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렇다면 이제 그녀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죽은 줄 알았던 약혼녀가 돌아왔으니, 그녀는 이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저택을 나서기 전, 초왕이 그녀를 버린다면 크게 걱정될 거라고 말했던 그녀였다.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그럴 일이 없다던 초왕이 자신을 두고 가다니.

녹하 역시 놀란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곁눈질하던 녹하가 창백한 안색의 왕비를 위로했다.

“왕비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분은 왕야의 옛 친구에 불과합니다. 설마 저분이 왕비 마마를 몰아내고 자신을 그 자리에 앉혀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녹하의 말은 백천범의 걱정을 무겁게 할 뿐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묵용감이 어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저 여인과 자리를 떴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에 세 사람은 영구와 기홍을 만났다. 영구의 등에 업혀 있던 기홍이 내려오겠다며 발버둥을 쳤지만 백천범이 그녀를 말렸다.

“언니, 조심하세요. 다 제 탓이에요. 출발하기 전에 바닥이 두꺼운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말해야 했는데.”

녹하는 백천범이 의아하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이더니 어느새 온 신경을 기홍의 발에 쏟고 있었다. 당장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깊게 고민하는 법이 없으니, 그들의 왕비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이미 세상이 떠나가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텐데 말이다.

솔직한 성격의 백천범은 매화 숲에서 있었던 일을 기홍에게 전부 말해 주었다. 기홍은 서둘러 백천범을 잡아 세우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역시나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음이 불편해진 기홍은 서둘러 그녀를 위로했다.

“왕비 마마, 녹하의 말이 맞습니다. 그저 왕야의 옛 친구일 뿐입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으니 왕야께서도 크게 놀라시어 왕비 마마를 신경 쓸 여유가 없으셨을 테지요. 황보 아가씨의 일을 잘 처리하시면 왕비 마마와 다시 예전처럼 지내실 것입니다. 왕야께서는 절대 변하실 분이 아닙니다.”

백천범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알아요. 저도 왕야를 믿어요.”

말로는 그를 믿는다고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다. 지금처럼 같은 마음을 헤집는 괴로움과 쓰린 감정에는 도무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볼까 봐 소맷자락으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기홍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백천범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는데, 우는 모습보다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숲을 빠져나오자 그녀가 타고 왔던 가마와 함께 가동, 영구의 말이 보였다. 묵용감의 말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황보주아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갔다는 생각에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질투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이젠 알 것 같았다. 만약 그녀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었다면 황보주아를 말에서 끌어 내렸을 터였다. 그것도 있는 힘껏. 그곳은 누구도 앉을 수 없는, 그녀만의 자리였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백천범은 새장을 빠져나온 새처럼 기쁨으로 가득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시든 풀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기홍과 녹하도 그녀를 계속 위로해 줄 수만은 없었다. 옆에서 아무리 재잘거려도 그녀에게는 부질없는 말에 불과했으니.

가마 뒤를 따라가던 가동은 영구가 침묵을 고수하자 조금 답답해졌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제 어떡해?”

영구의 시선이 가마 꼭대기를 스쳐 먼 곳으로 향했다. 그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왕야의 일은 되도록 참견하지 마십시오.”

“네가 왕야의 모습을 못 봐서 그래. 황보 아가씨를 보자마자 왕비 마마는 안중에도 없었다니까. 황보 아가씨는 왕야의 약혼녀였으니까 남다른 사이였겠지.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폐위하시고 황보 아가씨를 초왕비로 삼으신다면, 왕비 마마께서는…….”

영구의 차가운 시선이 가동을 향했다.

“왕야께서 황보주아 아가씨와 혼사를 치르신다면 그분이 초왕비십니다. 우리가 모셔야 할 주인이시고요. 그 점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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