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54)화 (253/1,192)

제254화

결국 묵용감은 별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내내 사건의 실마리를 추측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새 가동이 그의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헤헤 웃으며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왕야, 내일 휴가를 내도 될까요?”

묵용감이 가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얼 하려고?”

“성 밖 매화 숲에 매화가 만개했다고 합니다. 무척 예쁘다던데, 소인도 구, 구경을 가려 합니다.”

“혼자서?”

“아… 음… 그게, 노, 녹하를 데려갈 생각입니다.”

“녹하의 휴가까지 네가 청하려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녹하는 총관리인 어르신에게 청할 것입니다.”

가동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 묵용감은 왠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은 이렇게나 고뇌하는데 호위 무사란 놈은 여인과 매화 구경을 가겠다니, 꿈도 야무지지!

“안 된다!”

그의 단호한 말에 가동이 급히 말을 이었다.

“왕야, 두 시진이면 됩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말이 많구나!”

“왕야, 왕비 마마께서 아시면…….”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을러댔다.

“맞고 싶어 몸이 근지러운 것이더냐?”

가동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영구가 먼 산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늑대가 양의 탈을 썼다 한들, 늑대는 늑대인 법이지요.”

“무슨 말이야?”

영문 모를 말을 들으니 가동은 짜증이 솟구쳤다.

“너 또 한 번만 못 알아듣는 말 해 봐! 그땐 너랑 나 사이도 끝인 줄 알아!”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왕야께서 한동안 잘 대해 주셨다고 어찌 일개 호위 무사가 그런 청을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벌로 채찍을 내리지 않으신 걸 다행이라 여기십시오.”

가동이 작게 투덜거렸다.

“왕비 마마와는 매일 즐겁게 지내시면서 왜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건데… 배부른 자는 굶주린 자의 고통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어쨌든 난 왕비 마마의 사부인데 말이야.”

영구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모자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도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묵용감이 저택에 돌아와 중문에 다다르자 학평관이 나와 맞이했다. 말에서 내린 묵용감은 고삐를 하인에게 건네며 물었다.

“왕비는?”

“기홍 아가씨가 만든 간식을 드시는 중입니다.”

묵용감은 짧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안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한 차례 심호흡을 내쉰 뒤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곧장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다녀오셨어요, 왕야.”

그녀는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리고 눈이 반달 모양이 될 만큼 활짝 웃었다. 그러곤 손에 든 떡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어서 드셔 보세요. 기홍 언니가 방금 만든 건데 아주 맛있어요.”

묵용감은 사양하려 했지만 그녀가 그의 입에 쑤셔 넣는 통에 일단 받아먹었다. 그녀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맛있죠?”

아무렴, 그녀가 먹여 주는 음식은 뭐든 다 맛있었다. 그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맛있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홍과 녹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내내 괴로운 일들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지만, 그녀를 보니 흐르는 물에 씻겨나가듯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직접 외투를 벗고 벽에 걸었다. 백천범이 자신의 차를 그에게 내밀었다.

“많이 추우셨죠, 왕야. 이거 드시고 몸 좀 녹이세요.”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는데도 따뜻한 햇볕 아래 있는 듯했다. 그녀가 곁에 있었으니까. 아무리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고는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어찌 종일 기쁠 수 있소? 걱정 같은 것은 없었소?”

“기쁘지 않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백천범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배불리 먹을 음식도, 따뜻한 옷도 있는걸요. 게다가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왕야도 있잖아요. 모든 게 이렇게 완벽한데 뭐 하러 걱정을 해요!”

만족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족을 알아야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 매우 쉬운 이치였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듯 욕망이 끝도 없었다.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음식도, 옷도 없고 시중을 드는 사람도 없다면?”

백천범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래도 걱정할 거 없어요. 이미 겪어 본 일이니까요. 사실 별것도 아니에요. 손도 있고 발도 있는데, 알아서 먹고살 방법을 찾으면 되죠.”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안쓰러움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 걱정되는 건 왕야밖에 없어요. 왕야께서 절 버리시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매일 밤을 걱정으로 지새울 거예요. 정말로요.”

묵용감은 심장을 세게 꼬집힌 듯 짜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요.”

그가 그녀를 나무랐다.

“내가 어찌 그대를 버릴 수 있겠소. 늘 그대가 날 버리려 하지 않았소.”

백천범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죠. 지금은 달라요.”

“그럼 날 한 번 불러보시오.”

“서방님.”

“…부인.”

“서방님.”

“부인!”

“서방님!”

“부인!”

실없는 장난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놀이보다도 즐거웠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마를 맞대고 코끝을 비볐다. 곧 그의 입술 위로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이 다가왔다.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달콤함게 물들었다. 묵용감은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요새 들어 그녀는 이따금 먼저 입을 맞춰 왔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는 부드럽게 숨결을 빨아들였다.

입술을 떼자 백천범은 묵용감의 품에 안겨 만족스럽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실 묵용감만 곁에 있으면 그녀는 아무 걱정도 없었다.

묵용감이 그녀의 포동포동한 손을 토닥였다.

“날씨가 좋으니 매화를 보여 주겠소. 꽃구경도 하고 밖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돌아옵시다.”

그 말에 백천범이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로 가는데요?”

“듣자니 성 밖에 매화 숲이 있다고 하오. 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다고…….”

“왕야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백천범이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묵용감이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시오. 이 일은 우리 둘만…….”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밖에서 큰소리로 자랑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왕야께서 성 밖 매화 숲에 데려가 주신대요!”

묵용감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바보 같은 가동이 마구 성질을 부려 댈 게 뻔했다.

그가 조용히 문 앞에 다가가 발을 걷어 올리자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처마 아래에 서 있던 가동이 잔뜩 성난 얼굴로 영구에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하여튼 늘 백성들만 억압받는 거라니까. 난 안 되고, 왕야는 되고. 정작 거긴 내가 알려 드린 곳인데!”

영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을 가려 하십시오. 왕야께서 안에 계십니다. 그리 할 말이 많으면 안에 들어가서 하십시오.”

가동은 화가 가시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녹하한테 점수 좀 따겠다고 겨우 찾은 곳이라고. 근데 점수는커녕 왕야께 좋은 일만 했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영구가 그를 흘겨보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보니 사장풍과 참 닮으셨습니다. 그쪽 지역 출신은 다들 이렇게 고집불통이랍니까?”

묵용감은 방 안에서 실소를 터뜨렸고 밖은 곧장 조용해졌다.

* * *

성 외곽 변두리에는 정말 매화 숲이 있었다. 평범한 홍매화에 규모도 그리 크진 않았지만, 멀리서 바라보니 노을이 지듯 넘실대는 붉은 물결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내고 있었다.

가마에 타고 있던 백천범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신이 나서 소리쳤다.

“와, 예쁘다!”

때마침 휘날리는 눈꽃이 그녀를 더욱더 기쁘게 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눈송이가 겨울의 정령처럼 아름답게 내리고 있었다.

붉은 매화에 새하얀 눈이 내려앉은 광경이 더없이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가마 내려 줘요, 어서요.”

잔뜩 흥분한 백천범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녹하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왕비 마마, 체통을 지키십시오!”

백천범이 혀를 내밀고 기홍의 팔을 잡아끌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사부님한테 얼른 녹하 언니 좀 데려가라고 해 주세요.”

그녀와 바짝 붙어 있었던 녹하가 못 들을 리 없었다. 녹하는 몇 차례 코웃음을 치다 입을 열었다.

“마마가 원하시는 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소인은 계속 마마 곁에 붙어 있을 작정이거든요.”

“사부님 때문에 왕야께서 언니도 함께 가자고 하신 거잖아요. 왕야의 마음을 저버리시면 안 되죠.”

그녀의 말에 녹하는 그만 말문이 막혀 입술만 벙긋거렸다.

“…….”

기홍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됐어, 됐어. 너 가동 무사님 못 봤어? 웃느라 입을 못 다물던데. 얼른 가 봐. 왕비 마마는 내가 모실 테니까.”

녹하는 말을 타고 앞으로 향하는 묵용감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모시지 못할걸. 왕야께서 계시잖아.”

가마가 땅에 닿자 기홍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발을 걷어 올려 백천범을 부축했고, 녹하가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고개를 들자 가동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묵용감은 바보처럼 웃는 가동을 보고 있자니 영 눈꼴이 사나웠다. 그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되었다, 넌 네 사람이나 데려가거라. 멀리 갈수록 좋다.”

백천범이 얼른 한술 더 떴다.

“가서 둘만의 가정을 꾸리고 즐겁게 살아요. 돌아올 필요 없어요!”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늘 당차던 녹하가 부끄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녹하는 빨개진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몸을 돌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동이 그녀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아이참, 같이 가!”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자 녹하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 그녀는 휙 돌아서더니 화난 표정으로 가동에게 주먹을 날렸다.

“누가 너랑 꽃구경 간대? 참 잘됐네. 다른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사고.”

녹하에게 몇 대 얻어맞고도 가동은 기분이 좋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탓하려거든 내 담력을 탓하라고. 어때, 멋지지? 영구였다면 분명 말도 못 꺼냈을걸? 걱정하지 마. 왕야께서 왕비 마마의 체면을 봐서라도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실 거야. 휴가를 허락해 주지 않으셨지만, 내가 화난 줄 알고 우리를 이렇게 데려와 주셨잖아.”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너, 낯짝이 아주 두껍구나? 왕야께서 너그러우신 거야. 네가 화 좀 냈다고 무서워서 그러신 걸까 봐? 네가 뭔데?”

“난 왕비 마마의 사부잖아.”

가동이 녹하를 바짝 끌어당기더니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왕야보다 윗사람인 셈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