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황제의 말뜻을 알아들은 고승해는 모퉁이에 놓인 서양 자명종을 바라보았다.
“폐하께 아룁니다. 초왕이 들어간 지 반 시진이 되어갑니다.”
황제의 음성은 담담하기만 했다.
“두 사람이 안에서 무얼 하고 있을 것 같으냐?”
고승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대화를 나누시겠지요.”
황후의 몸이 좋지 않으니 다른 걸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대화를 나눈다 해도 어찌 이리 오래 나누는가? 둘은 시동생과 형수 사이다. 의심을 받을 일은 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단 말인가?
그는 화를 억누르며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초왕이 언제 밖으로 나오는지 끝까지 지켜보려는 듯했다.
* * *
황후와 만나고 나니 모든 정황이 뚜렷해졌다. 태비의 탄일 밤, 각기 다른 궁녀와 태감이 그와 황후에게 석가산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했다. 다만 어두운 밤이라 말을 전한 궁녀와 태감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느 누가 황후와 초왕에게 장난질을 하리라 예상했겠는가.
여기까지는 묵용감의 추측대로였다. 이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예왕을 잡아들이면 낱낱이 밝혀질 일이다.
다만 묵용감이 염려하는 것은 황후의 건강이었다. 그녀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새하얀 손수건을 물들인 붉은 피는 그가 보기에도 충격적이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어렵게 입을 뗐다.
“황수, 많이 괴로우시겠습니다.”
황후는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괴롭지 않습니다. 이런 몸 때문에 폐하까지 힘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시고 황수께서는 회복에만 집중하십시오. 모든 걸 예전처럼 돌려놓겠습니다.”
황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도 없으니 초왕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도 겁나지 않았다. 황후 또한 일을 해결해 달라 부탁하기 위해 묵용감을 부른 터였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끌었으니 분명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 테지요. 다만 이번 해를 넘기지 못할까 봐…….”
묵용감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수, 그런 말씀 마십시오. 태의원에서 황수의 병을 고치지 못하면 제가 그자들의 목을 모조리 베고 말겠습니다!”
“셋째, 조급해하지 말고 제 말을 끝까지 다 들어 보세요.”
황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떠나는 것은 큰일이 아니지만, 폐하가 걱정입니다. 셋째도 폐하를 잘 알지 않습니까. 성격이 무르고 우유부단해 대신들의 말대로 휘둘리기 쉽지요. 제가 있을 땐 폐하께 주의를 드리지만, 제가 떠나면… 콜록콜록, 누가 진심으로 폐하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황수…….”
황후가 손을 내저었다.
“셋째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셋째의 성도 묵용입니다. 폐하와 피를 나눈 친형제이지요. 그러니 폐하를 위해 이 나라와 사직을 잘 돌봐 주어야 합니다. 야망이 큰 백씨 부녀에게 절대 권력을 주어선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많은 것들을 억누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참다 보면 터져 나오기 마련이지요. 폐하께서 셋째에게 화를 내신다 해도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나이는 셋째보다 많지만, 마음은 셋째만큼 진중치 못한 분입니다. 셋째가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뒷일을 부탁한다는 투로 말하는 황후를 보는 게 묵용감은 너무나 힘들었다. 초조하고 답답한 기분이 밀려들어 와 그의 가슴을 틀어쥐는 듯했다.
“황수, 다른 것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폐하께서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황후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폐하께는 길을 인도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잘못된 길로 가시겠지요. 셋째, 폐하를 이끌어 줄 사람이 되겠다고 이 황수에게 약조해 주세요.”
묵용감은 황후에게 그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약속을 절대 지키지 못하리라는 건, 이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봉명궁을 나온 묵용감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뒷짐을 지고 앞으로 걸어갔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는 한두 개의 잎만을 간신히 매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잎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람에 나부끼다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묵용감은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인간의 목숨도 한낱 나뭇잎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손에 쥔 것들을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했다. 황제는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묵용감이 시선을 올리자 나무 옆에 선 황제가 보였다. 황제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묵용감에게 말했다.
“네 황수를 보러 갔었느냐?”
“예.”
그가 두 손을 맞잡으며 예를 표했지만 어두운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며칠이나 황수를 찾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황수의 병환이 심각한데 폐하께서는 걱정도 되지 않으십니까?”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가 짐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구나.”
“폐하께서 찾아 주시질 않으시는데 황수께서 뵙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황제와 말을 나누고 있자니 묵용감은 점점 화가 끓어올랐다.
“혹 폐하의 마음이 이미 다른 이에게 간 것은 아닙니까?”
“무엄하다!”
황제가 눈에 띄게 얼굴을 굳혔다.
“네가 감히 짐을 가르치려 들어!”
묵용감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천위天威에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황제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황후의 병이 심각하다 하였느냐?”
“예. 아무래도 폐하께서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를 뵈면 황수께서도 기뻐하시어 빠르게 회복할 것입니다.”
황제는 봉명궁을 힐끔 바라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별일 없거든 그만 돌아가 보거라.”
묵용감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발걸음을 돌렸다. 모퉁이에 들어선 그는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봉명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묵용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맞대면 금세 사이가 좋아질 터였다.
그가 알고 있는 황후와 황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면 아무리 큰 오해라도 곧 풀리리라.
* * *
황후는 평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태감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폐하 납시오!”
영춘이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황후가 힘겹게 평상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황제가 문턱을 넘었다.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으시오.”
애정 어린 말투가 황후에게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을 안겨 주었다. 황후는 정신을 가다듬고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께서 오늘은 어찌 발길을 주셨습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여 잠시 보러 왔소.”
황제가 평상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운 듯한 얼굴이구려.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소?”
“아무 일도 아닙니다. 폐하께서 평안하시면 신첩은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황제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초왕에게는 속상한 일을 말하면서, 짐에게는 말하지 못한단 말이오?”
이제 막 따뜻해진 그녀의 마음에 별안간 한파가 불어닥쳤다.
“폐하, 신첩을 못 믿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초왕을 못 믿으시는 것입니까?”
“짐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성을 내는구려.”
황후는 안색이 창백해질 만큼 화가 나 있었다. 황제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꾹 참았다.
황후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
“폐하께서 신첩을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초왕은 믿으셔야 합니다. 초왕은 형제이자 폐하께 충심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소인배들의 참언을 믿어 초왕을 오해하시면 절대 아니 될…….”
또 시작이다. 황제는 속으로 무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초왕을 어찌할까 봐 두렵기라도 하단 말인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수도 없이 들은 말에 황제는 결국 짜증이 밀려왔다.
“짐도 이미 알고 있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 없소.”
황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지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단 며칠 만에 두 사람 사이에 큰 벽이 세워진 듯했다. 보기에는 가까워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벽이 너무 높았다.
“…폐하께서 알고 계시니 신첩도 기쁩니다.”
황후는 입을 가리고 한 차례 기침을 한 뒤 손수건을 황급히 움켜쥐었다.
“신첩이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신첩은 몸이 편치 않아 폐하를 모실 수 없지만, 귀비가 대신 폐하의 시중을 들어주니 마음이 놓입니다. 다만 폐하께서도 옥체를 살피시옵소서. 날마다 그리하시면 옥체가…….”
“당신이!”
황제가 대뜸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의 밤일까지 참견해야겠소? 예전에는 그러지 않더니 지금은 어찌 이리 질투가 심해졌단 말이오?”
황후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질투라니. 그녀의 진심 어린 충언이 어찌 질투가 되어 버린 걸까.
분을 못 이긴 황제가 옷소매를 뿌리치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황후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슬픔에 젖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제는 정말 그녀와 멀어져 버렸다. 이젠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을 만큼이나.
* * *
기이하게도, 묵용감은 어디에서도 예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예왕의 저택에 다녀온 후 묵용감은 예왕의 저택에 보초병을 매복해 두었다. 한데, 많은 시일이 지났는데도 예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궁을 나가고도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다니, 대체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예왕은 방탕한 생활을 즐긴 탓에 집이 한두 채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도 않고, 저택에 있는 이들도 그를 찾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어쨌든 그도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곧 새해를 맞아야 하니 집안일도 적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종실 친왕의 저택은 보통의 집안에 비해 더욱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도 가장이 집을 비워 두다니…….
묵용감은 다시 예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예왕비와 총관리인 모두 모른다고만 답할 뿐이었다. 게다가 예왕의 행방에는 관심도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번 소동으로 예왕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예왕이 갈 곳은 차고 넘쳐난다며 저택의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총관리인도 억지웃음을 보이며 저택 밖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대꾸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