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묵용감이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다른 사내들과 입을 맞추면 안 되는 건 맞소. 다만 입을 맞춰서 아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오.”
백천범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기가 생기는 거예요?”
“남녀가 옷을 벗고 한 침대에 누워서…….”
“저도 알아요.”
백천범이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걸 말씀하시는 거죠? 씨름 같은 거요.”
“…….”
씨름 같은 것이라니?
그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다리에 대고 몇 차례 쿵쿵 내리찧었다.
“이렇게 말이에요. 저도 본 적 있어요.”
“…….”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단 말인가…….
그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그녀의 허리를 잡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이 농익은 과실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먼저 들어가시오. 난 좀 더 있다 들어가겠소.”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더우세요?”
백천범이 걱정스레 묻는 말에도 묵용감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지셨어요?”
“어서 들어가래도!”
그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무슨 계집이… 이렇게나 도발을 하고도 시치미를 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뱃속에서 일렁이는 불씨에 억누르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어째서 그녀는 이리도 더디게 자란단 말인가…….
백천범은 그의 안색을 살피다 더는 묻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침소 앞에서 발을 걷어 올리더니 묵용감을 향해 소리쳤다.
“왕야, 이불 데워 놓고 있을 테니까 얼른 오셔야 해요!”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만 휘저었다. 두꺼운 발이 내려가는 소리에 비로소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한참이 지난 뒤,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뱃속은 가라앉았지만 가슴이 간질거렸다. 천하에서 그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존재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만이 모든 걱정을 잊게 했다.
그래, 그 일들은 내일 다시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왕비와 잠을 청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를 위해 이불까지 데워 준다는데 체면은 세워 줘야 하지 않겠는가!
침소에 드니 백천범이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그가 단추를 풀며 물었다.
“어째서 아직도 잠들지 않은 것이오?”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만약 우리가 침대에서 씨름을…….”
묵용감이 다급히 말을 끊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또 그 이야기를 꺼내다니, 어찌 평온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씨름을 한다고 해도 분명 제가 이길 거예요!”
* * *
승덕전에서 돌아온 이후, 황후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가끔 보이던 객혈도 점점 잦아졌다. 그녀의 맥을 짚은 좌당중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마, 외람되지만 소신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마마의 병환은 근심이 쌓여 악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근거 없는 말은 소신도 듣긴 했지만 마마께서는 현명한 분이시니 소문이 난 원인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마께서 그런 일에 마음을 쓰시면 간악한 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맙니다. 소신이 처방해 드리는 약은 몸의 병만 치료할 뿐, 마음의 병은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황후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의의 뜻은 잘 알았네. 그대는 약을 처방하는 데만 신경 쓰게. 하면 본궁도 스스로의 몸을 잘 돌볼 테니. 그리고 본궁이 피를 토하는 것은 부디 자네만 알고 있어 주게. 소문이 나면 더 성가신 일들이 생길까 걱정일세.”
좌당중이 허리를 숙이고 정중하게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신 다른 것은 당부드릴 게 없지만, 마마께서 마음을 넓게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간혹 순리에 맡겨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지요.”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복을 불렀다.
“본궁 대신 어의를 모시거라.”
좌당중이 떠나자 영춘이 입을 열었다.
“마마,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부디 그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시어요. 건강이 회복된 뒤에 처리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건강만 되찾으시면 백 귀비가 저리 나올 일도 없을 것입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구나.”
황후가 손수건에 남은 붉은 핏자국을 바라보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초왕을 만날 방법을 마련해야겠다.”
영춘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마마, 병세가 이리 심하신데 어찌 만나시려고요? 조금 나아지신 뒤에 만나십시오.”
황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간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서 유복을 들라 하거라.”
영춘은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 * *
묵용감은 어좌에 앉은 황제를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 안색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종종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가 백 귀비를 총애한다지만, 백 승상을 대하는 태도는 변함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많은 일을 대학사 수민에게 의지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기에 문무백관들은 황제에게 일일이 지시 사항을 물었다. 황제는 조리 정연하게 지시를 내렸고 그중 두세 개의 일을 묵용감에게 맡겼다. 묵용감은 맞잡은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공손하게 명을 받들었다.
조회가 끝난 뒤, 황제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뒤쪽으로 향했다. 그때 고승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자는 마마의 궁에 있는 유복이 아닙니까? 유복이 어찌 이곳을 찾아왔단 말입니까?”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유복이 맞았다. 금수교金水橋 옆에서 초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황제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고승해가 혼자 중얼거렸다.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셔서 초왕을 찾으시는 듯한데…….”
황제가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눈앞의 승덕전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앞으로 가면 황후의 봉명궁이었다. 그에게 가장 익숙한 길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낯설었다. 며칠이나 그녀를 찾지 않으면 그녀가 그를 찾아와 잘못을 인정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가 찾지 않으니 그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실망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황제는 까닭 없이 두려움을 느꼈다. 황후와 다투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서로 금방 마음을 풀었기에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그도 황후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때문에라도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밀어내듯 조금씩, 그녀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그가 완전히 믿을 수 있었던 일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 드문 일에 황후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황후를 은애하고 황후가 자신을 은애한다고 믿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니 결코 속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믿음조차 흐릿해졌다. 대체 그녀는 언제부터 초왕과 그리 가까워졌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의 그는, 황후에게서 멀어진 만큼 백강벽의 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매일 밤 서복궁을 찾았다. 백 귀비를 황후처럼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백강벽과 몸을 뒤섞는 게 좋았다. 백강벽이 그렇게 솜씨가 뛰어난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활처럼 휜 허리로 그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다양한 기교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린 풋내기처럼 그녀에게 몸을 맡겼고, 매일 밤 하늘을 찌를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했다. 그는 자신을 섬기고 복종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황후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으므로.
승덕전에 발을 들인 그가 서둘러 남서방으로 향해 창가 앞에 섰다. 그곳에서 봉명궁으로 가는 길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왕이 유복을 따라 급히 봉명궁으로 향했다.
황제의 마음을, 어두운 의심이 덧칠해 나갔다. 자신을 찾기는커녕 초왕을 부르다니. 그녀에게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지 명백하지 않은가. 백강벽은 그의 귀비이니 총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황제의 눈이 닿는 황궁에서, 이리도 공공연하게 외도를 저지르다니!
그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간 황후를 피하며 그의 뜻을 알렸건만, 황후도 이런 식으로 뜻을 알릴 줄이야.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체 왜 초왕이란 말인가? 질끈 감았다 뜬 그의 눈망울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다. …초왕이 그보다 강해서?
그도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를 겨루던 세 황자 중 태자는 가장 총명했고, 초왕은 담력과 지혜를 겸비했다. 그는 어땠던가. 그는 셋 중에서도 평범했다. 그래도 근면과 성실함은 절대 두 황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는 그들보다 더 좋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욕망을 억누르고 성질을 가라앉혔다. 충언과 간언도 빠짐없이 귀담아들었다. 그는 언제나 신하들처럼 인시에 일어나 술시에 잠들었다.
그간 부지런하게 살아 온 일생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떳떳했다. 그러나 늘 마음 깊은 곳에 박혀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그 가시가 초왕이라는 사실은 그만의 비밀이었다. 줄곧, 초왕을 두려워했으므로.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눈앞에 둔 것도 그를 더욱 잘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마저도 날마다 눈에 거슬리다 보니 금세 질렸다.
겉으로는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였겠지만, 속마음도 그랬을까? 그는 초왕을 경계했다. 어쩌면 초왕도 그를 경계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황후가 그를 나무랄 때마다 꺼냈던 말이 가장 괴로웠다. 초왕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천하를 이루지 못했을 거라던 황후의 말.
그는 자신이 참 미련했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황후의 마음은 오로지 초왕에게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황후는 그와 초왕을 두고 저울질을 했을 테지. 한번 기울어진 마음은 가파른 의심을 타고 확신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을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초왕의 외모와 재능은 그보다 월등했다. 병사들을 인솔하여 전쟁을 치를 수도 있었고, 성에서 능력을 발휘할 일도 충분히 많았다.
옆에 있던 고승해가 조심스레 황제의 안색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폐하, 너무 오래 서 계셨습니다. 잠시 앉으시지요. 옥체가 상하십니다.”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물었다.
“얼마나 지났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