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황후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점심 식사를 드시기 전인데 어찌 주무신다는 것인가?”
“폐하께서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드셨고, 오늘 일찍 기침하신 탓에 피로가 쌓여 잠시 누우셨습니다.”
고승해가 불진을 들고 웃으며 물었다.
“마마, 무슨 일이 있으신 거라면 소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소인이 전해 드리겠습니다.”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폐하를 뵈러 왔네. 주무신다니 본궁도 방해하지 않겠네. 폐하를 잘 보필하시게.”
그녀가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부푼 마음이 실망으로 완전히 꺼져 버렸다. 다만 황제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것은 사실이었다. 닷새간 장복이 매일 그녀에게 황제가 줄곧 서복궁을 찾아 매번 두 차례씩 일을 치렀다는 기록을 전했으므로.
황제는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니 그 점을 탓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밤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 감당하지 못했을 터.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황제도 이 도리를 알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한숨을 내쉬던 황후가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고 몇 차례 기침을 했다. 그때, 뒤에서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어찌 그냥 가십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백 귀비가 승덕전에서 나오고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얇은 옷차림이었다. 양지옥羊脂玉 단추가 달린 도홍색 상의만 입고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백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허리에 매달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맑은 소리를 냈다. 그녀의 차림은 늘씬한 자태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고, 그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여뻤다.
황후는 문득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추운 날씨 탓에 겹옷에 솜을 댄 겉옷까지 몇 겹을 껴입은 데다 외투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키가 컸으니 다행이지, 작았다면 둥근 공처럼 보였을 터였다.
백 귀비가 아무리 오만하게 군다 한들 황후의 앞에서 마땅히 갖춰야 할 예는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를 취하기는커녕 여유가 넘쳤다. 그녀를 지켜보던 영춘과 유복은 가슴에 불이 나는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후는 그래도 평온한 말투를 유지했다.
“폐하 곁에 있었던 것인가? 폐하께서는 편히 주무시는가?”
백 귀비는 부끄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옷에 잡힌 주름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무시긴요. 간밤에 신첩이 폐하를 잘 모시지 못했는지, 폐하께서 또 부르시는 통에… 이 대낮에……. 태후 마마께서 계셨다면 자안궁慈安宮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뻔했습니다.”
더듬거리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의미는 너무나 명확했다. 황후도 더는 감정을 억누르기 버거운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마, 어디 불편하십니까?”
백 귀비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안색이 어찌 그리 좋지 않으십니까? 어의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황후는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비릿함을 힘겹게 억누르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걱정할 것 없네. 밖에 오래 나와 있어 그런 듯하니 본궁은 이만 돌아가야겠네.”
“그렇군요. 마마, 몸이 편치 않으실 땐 되도록 밖에 나오지 마십시오. 폐하께는 신첩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첩이 폐하를 잘 모시겠습니다.”
황후는 기세등등한 백 귀비를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드디어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황제는 어찌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충심과 불충,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단 말인가?
“마마, 조심히 가십시오. 신첩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라 그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을 찾으실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백 귀비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꼴불견!”
영춘이 나지막이 그녀를 욕했다.
유복은 황후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마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옵소서. 백 귀비는 일부러 마마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것입니다. 마마께서 노여워하시면 백 귀비의 계략에 빠지시는 것입니다.”
황후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녀가 힘겹게 겨우 몇 걸음 내딛는데 목이 심하게 간질거렸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몇 차례 심한 기침을 내뱉었다.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 정도로 심한 기침이었다.
영춘이 새하얀 손수건에 묻어난 붉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했다.
“마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황후는 영춘이 볼 수 없게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선홍빛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결국 피를 토한 것이었다.
유복도 기겁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마, 지금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그리 조급해할 것 없다. 난 괜찮다.”
그녀가 애써 가슴을 펴고 평온하게 말했다.
“그저 피 한 모금일 뿐이다. 본궁은 아직 죽을 순 없다.”
* * *
밀서를 읽던 묵용감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역시 추측대로 예왕은 궁에 숨어 있었다. 다만 예왕의 은신처는 백 귀비의 서복궁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지만, 이는 두 사람이 내통했다는 의미였다.
예왕은 천성이 방자한 사람으로, 재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백 귀비도 제 몸뚱이 말고는 그와 거래를 할 무기가 없었을 터.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아닌가. 설령 예왕이 천하의 모든 부녀자를 유혹한다 해도, 황제의 여인을 탐하는 것만큼 그에게 자극적인 일은 없었으리라.
묵용감의 신경이 곤두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예전이라면 간단히 넘겼을 테지만, 황제가 닷새째 서복궁을 찾았다면 백 귀비에게 마음이 생긴 게 분명했다. 유달리 정이 깊었던 황제와 황후 사이에 까닭도 없이 거리가 생길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백 귀비와 예왕이 내통을 했다면 서태비의 탄일 밤, 예왕이 백천범을 희롱한 일은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와 황후가 만난 것도… 그와 황후는 의심을 살 일을 하진 않았지만, 그날 밤 황후가 석가산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다소 의문스러웠다. 게다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황제가 그들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때 황제의 눈에 냉기가 스치던 것을 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황후를 찾아가 이 일에 대해 물으려는데 또다시 황제가 찾아와 말을 꺼내지 못했다. 황제는 평소처럼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대했지만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설마……. 그의 심장이 불길한 박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황제가 오해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날 밤 석가산에서 만나자고 한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여러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본 그는 계획의 배후에 백씨 부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강의 일로 백여름에게 크게 실망한 황제는 그의 권력 일부를 수민에게 넘겼다. 얌전히 물러날 백여름이 아닌 만큼, 백 귀비를 황제에게 접근시켜 다시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이 뻔했다.
황후에 대한 감정이 남다른 황제가 어찌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었을까? 황제와 황후 사이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왜 이번 일에 묵용감을 끌어들였는지는 명확했다. 그와 백여름은 철천지원수였고, 묵용감의 막강한 권력과 존재감은 황제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는 등갓을 열고 밀서에 불을 붙인 뒤, 화로 속으로 던졌다. 하얀색 종이는 곧바로 불에 휩싸이더니 이내 까만 재로 변해 버렸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던 묵용감의 미간이 또다시 좁혀졌다. 그렇다면 황제가… 정말 그와 황후의 사이를 의심한단 말인가?
그때, 마른 몸집을 한 여인이 뛰어나와 묵용감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왕야, 왜 아직도 안 주무셔요?”
겹옷만 입은 백천범이 그의 앞까지 걸어왔다. 살짝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왕야께서 이불 안을 데워 주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어찌 옷도 걸치지 않고 나온 것이오. 춥진 않소?”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제법 따뜻했다. 그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여인이 사내를 위해 이불을 데워 준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사내가 여인을 위해 그리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구려.”
“이불을 데워 주는 것도 남녀 구분이 있단 말이에요?”
그녀가 눈꼬리를 올리고 그를 흘겨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등불 빛을 받아 맑게 빛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날마다 그녀를 보는데도 묵용감은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새카만 두 눈동자와 높게 솟은 콧대, 자그마한 진홍색 입술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생각을 잊고,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왕야, 제게 입을 맞추고 싶으신 거예요?”
세상에, 부부는 마음이 통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묵용감은 밀려오는 벅찬 기쁨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도 원하오?”
또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자그마한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었다.
“당연히 원하죠.”
정말이지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원한다고 말해 주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그의 인내심은 곧바로 함락되었다. 그는 곧장 고개를 숙여 그녀의 조그만 입술을 머금었다. 그리곤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두 입술이 살며시 맞닿았다. 그림을 그리듯 그녀의 입매를 따라 천천히 입술을 맛보자 보드라운 감촉, 따뜻함과 그녀의 향기가 전해져 왔다. 그동안 그녀도 제법 발전이 있었다. 처음엔 겁을 먹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더니만, 시간이 지나자 수줍어하면서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에게 배웠는지 입 안에 혀를 넣고 가볍게 훑기까지 했다. 아무런 기교도 없는 풋풋한 동작이었지만 그는 혼이 나갈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스스로를 억제하기 힘들 때쯤 입술을 떼었다. 그러자 백천범이 어미젖이 부족한 어린 짐승처럼 그의 입술에 달려들어 그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두 사람은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그도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마음을 다해 입을 맞추고 나니 왠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녀의 포동포동한 손만 만지작거렸다.
“왕야.”
그녀가 손을 빼더니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입을 이렇게나 많이 맞췄는데 왜 아직 아기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묵용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을 맞추면 아기가 생긴다고 누가 그러오?”
“유모가 그랬어요. 사내가 입을 맞추려고 하거든 피하라고요. 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