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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50)화 (249/1,192)

제250화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묵용감의 머릿속에 언뜻 야릇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림도 없지. 잘 알면서도 묵용감의 마음이 요동쳤다.

“…할 수 있겠소?”

“제가 등을 잘 밀거든요. 유모 등도 종종 밀어 줬는데 얼마나 많이 칭찬을 들었는지 몰라요.”

그녀의 얼굴은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묵용감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녀의 앞에서 지아비의 체면은 자주 길을 잃곤 했다. 그가 마지못해 허락하는 척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백천범이 짧게 환호성을 내지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내 그녀가 기홍에게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오늘은 제가 왕야의 목욕 시중을 들게요. 언니는 가서 쉬세요.”

묵용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다 밖으로 향했다.

목욕간 안은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로 가득했다. 커다란 욕탕에서는 새하얀 김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묵용감은 홀로 씻는 것이 익숙했기에 평소 목욕 시중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천천히 옷을 벗고 욕탕에 들어가자 따뜻한 물이 몸을 에워쌌다. 평소라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할 온도가 지금은 입술을 바짝바짝 마르게 했다. 그가 몇 번 심호흡을 내쉰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오.”

밖에서 기다리느라 좀이 쑤셨던 백천범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목욕간에 가득한 수증기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두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목욕간에도 불을 때 두었기에 안의 공기가 제법 후끈했다. 그녀는 겹옷만 입은 채 소매를 걷으며 다가갔다.

물안개 사이로 묵용감의 형체가 언뜻언뜻 보였다. 목욕통 안에 앉아 있는 그에게서 꼭 단단한 바위처럼 위용이 넘쳐흘렀다.

백천범은 입술을 한 번 할짝였다. 어쩐지 목이 조금 말랐지만, 물을 마시러 갈 시간이 없으니 잠깐 참기로 했다.

그녀는 목욕 수건을 들어 그의 등을 닦아 나갔다. 그의 몸은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고 단단했다. 골격은 누구보다 우람했고, 어깨도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탄탄한 근육이 아래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완벽한 선을 그려 내었다.

정말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녀는 그의 근육을 꾹꾹 누르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할짝댔다.

그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손을 뻗어가며 열심히 그의 등을 닦았다.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왕야, 세기는 괜찮으시죠?”

묵용감의 대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그는 말 한마디도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상태였다. 혹여 자제력을 잃고 충동적으로 행동할까 싶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가 얼마나 힘겹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지는 그만이 알 터였다.

그녀의 손길은 신비한 힘이 담겨 있는 듯 스치는 곳마다 긴장이 풀렸고, 그 자리에 갈망의 불씨를 심어 놓았다. 작은 불씨가 아랫배를 불사르는 듯한 느낌에 그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끊임없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으니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아플 지경인 가슴을 가만히 문지르며 묵용감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 백천범이 더한 말을 꺼냈다.

“왕야, 돌아앉아 보세요. 앞쪽도 닦아 드릴게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단 말인가! 그는 절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절대 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그녀를 목욕간에 들인 걸 더없이 후회하는 그였다. 이게 어딜 봐서 목욕 시중이란 말인가,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아니, 차라리 포로로 잡혀서 고문을 당해도 이보다는 마음이 편할 듯했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됐소. 그만 나가보시오.”

하지만 백천범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저는 도중에 그만두는 건 딱 질색이에요.”

그가 몸을 돌리지 않으니 그녀가 직접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묵용감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백천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왕야, 어디 불편하세요?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지셨어요?”

그가 욕통 모서리를 있는 힘껏 붙잡았다.

“조금 덥소.”

“저도 조금 더워요.”

그녀가 겹옷의 앞자락을 들썩이며 부채질을 하자 백옥처럼 하얀 허리가 드러났다.

묵용감은 얼른 자신의 몸을 물속 깊이 숨겼다. 마음이 끓어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 바람에 백천범의 몸에도 물이 튀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지 툭툭 털어내고는 다시 목욕 수건으로 그의 가슴을 문질렀다.

“조금만 더 일어나 보세요.”

“…아, 아니. 됐소. 그만…….”

“아이참, 사내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어서요.”

그녀가 그를 나무라더니 그의 가슴 근육을 콕콕 찔렀다.

“와, 정말 단단하네요!”

“…….”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니 정말 아래쪽이 단단해져 있었다……. 마치 용 한 마리가 물속에 매복한 채 승천할 때만 기다리는 듯했다.

그는 숨을 쉬는 방법마저 잊고 말았다. 그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그녀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 큰 사내가 이 꼴이 되다니, 정말……. 온몸에 진땀이 났다. 그가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그녀와 일을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나 작고, 마르고… 그를 믿고 있지 않은가.

묵용감은 통증을 참으며 온 힘을 다해 욕망을 억눌렀다. 이곳에선 절대 안 될 일이다. 이 순간에 일을 치르는 것도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두 사람의 진정한 합례는 서로의 동의 후에 좋은 날을 골라, 아름다운 곳에서 치러야 했다. 갖은 핑계와 이유를 댄 끝에 그는 마침내 아랫배에서 타오르는 불씨를 제압할 수 있었다. 다 큰 사내라면, 응당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한참 후에야 그가 눈을 뜨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의 몸을 이리저리 찔러 보다니, 아녀자가 부끄럽지도 않소?”

백천범이 시선을 올리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데요, 뭘. 왕야는 제 서방님이시잖아요!”

금세 묵용감의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지아비였다. 그녀가 드디어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기쁨으로 여유를 찾은 그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대 몸에도 물이 튀었는데 함께 씻는 건 어떻소? 어쨌든 우린 부부니 이상할 것도 없지 않소.”

백천범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꿈도 꾸지 마세요!”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물어봤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다간 또다시 스스로 발등을 찍을 뻔했다. 묵용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백천범이 다 쓴 수건을 물에 씻기 시작했다.

“다 닦았어요. 그만 일어나세요.”

“먼저 나가시오. 나머진 내가 하겠소.”

고개를 끄덕인 백천범은 수건에 손을 닦고 자신의 옷을 집어 들었다. 곧장 나가는가 싶던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대뜸 물속으로 작은 손이 들어와 있는 힘껏 그의 엉덩이를 때렸다.

묵용감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때 백천범의 눈에 공중에서 무언가가 곡선을 그리더니 빠르게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가 황급히 물속에 몸을 숨기고 붉어진 얼굴로 잔뜩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시오. 나가면 가만 안 둘 테니!”

백천범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벗어 두었던 겉옷을 걸치고 태연하게 훌쩍 자리를 떴다.

* * *

황후는 닷새째 황제를 만나지 못했다. 그와 혼인한 이후 이렇게 떨어져 지낸 일이 없었다. 황후는 복도 기둥 옆에 서서 처마 끝만 올려다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황색 지붕이 눈부시게 보였다. 그녀가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황제의 승덕전과 그녀의 봉명궁 사이에는 자그마한 춘궁전春宮殿이 있을 뿐, 그리 멀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도 일각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토록 가까운 거리임에도 황제는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찾아오지도,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이토록 냉정한 모습은 불만이 가득한 그의 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와 초왕의 소문은 유언비어일지라 해도 황제의 나약한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폭설 이후 줄곧 맑은 날이 이어진 덕분에 그녀는 제법 기력을 회복했다. 황제가 그녀를 찾지 않으니 그녀가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부부 사이의 문제는 거리를 두는 것보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편이 훨씬 나은 법이었다. 도량이 좁은 황제는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생각을 쉽게 고치지 못했다.

영춘과 유복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길 양쪽으로 쓸어 둔 눈이 하얀 제방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성을 수호하는 두 마리 용처럼 보이기도 했다. 쌓인 눈을 바라보던 황후는 불현듯 백천범을 떠올렸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황후에게는 풍경에 불과했다. 그녀는 마음대로 뛰어놀 수 없었지만 백천범은 그래도 되었다.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군이 있으므로.

그날 장합전에서 묵용감은 다른 이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백천범에게 입을 맞추었다. 황후는 그 광경에 매우 놀라긴 했지만 백천범을 향한 묵용감의 깊은 은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만큼 체면과 예의 같은 것들은 내려놓고 감정을 오롯이 표출했을 터였다. 어쩌면 그게 바로 진정한 은애의 형태가 아닐까.

물론, 그녀와 황제도 서로 은애하는 사이였다. 순행을 갔을 때를 제외하면 그녀가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마음은 늘 황제를 향한 간절함과 기대로 가득했다. 그를 만날 때면 그녀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는 자신만큼이나 황제의 마음도 은애라고 믿었다.

그녀의 몸이 아플 때마다 그는 근심에 잠겨 있었다. 나랏일보다 그녀의 병환에 더 가슴을 졸였다. 밤에 그녀가 기침을 하면 황제는 직접 옷을 걸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물을 따라 주었다. 그녀가 편히 잠들지 못해 몸을 뒤척이면 황제도 뜬눈으로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다.

옛일을 조금씩 떠올리자 황후의 마음이 천천히 따뜻해졌다. 그래, 그는 정말 바쁜 것뿐일지도 몰랐다. 연말이면 황제가 지휘해야 할 일들이 넘쳐났으니 마냥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근면 성실한 황제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승덕전에 다다른 황후는 평소와 다름없이 계단을 올랐다. 문 앞에 서 있던 소태감이 서둘러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유복이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계십니다.”

소태감이 공손히 답했다.

“마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가서 고하겠습니다.”

황후가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 황제에게 그녀가 찾아온 사실을 고했단 말인가?

유복이 얼굴을 굳혔다.

“어디서 감히! 지금껏 마마께서 폐하를 뵐 땐 한 번도 보고한 적이 없거늘……!”

황후가 손을 들어 유복을 제지했다.

“괜찮다. 폐하께 일이 있으신가 보구나. 들어가 고하라고 하거라.”

그때, 고승해가 나와 활짝 웃는 얼굴로 예를 갖췄다.

“마마,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폐하께서 아시면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오나…….”

그가 황후의 눈치를 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폐하께서는 잠시 주무시고 계십니다. 잠시 뒤에 다시 찾아 주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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