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백천범의 회복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겨울이었지만 상처 부위에 빠르게 새살이 돋아났다. 약을 발라 줄 때마다 묵용감은 그녀의 여린 살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녀가 아파할 걸 알기에 선뜻 손을 대진 못했다.
이틀 전부터 백천범은 침대를 벗어나 바깥바람을 쐬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묵용감의 말에 첫날은 인내심을 갖고 참았지만, 다음날은 평소처럼 성큼성큼 다니다 재빨리 남월각으로 돌아와 토끼를 보러 갔다.
그녀는 역시 자신의 처소가 편하고 좋았다. 어느 곳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선반에는 그녀가 만들다 만 매듭이, 탁자에는 붓글씨 연습 종이가, 옷장에는 녹하가 만들어 준 옷가지에, 화장대 위에는 묵용감이 선물한 연지와 머리 장신구까지…….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는 조금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감과 함께 있는 것도 좋았지만 남월각에도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묵용감은 멀리서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의 지아비였다. 하지만 남월각을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신의 처소가 낯설게 느껴질까 걱정이 되었다.
눈이 제법 많이 쌓인 덕에 백천범은 하인들과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다. 월규는 신이 난 눈치였지만, 월향은 걱정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월향이 백천범을 복도로 잡아끌었다.
“마마,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으셨잖습니까. 풍한이라도 드시면 왕야께서 소인의 목을 치실 것입니다!”
백천범이 그녀의 팔을 뿌리치며 헤헤 웃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아무도 없을 때 신나게 놀아야지! 어르신께서 데리러 오시면 놀지도 못한단 말이야.”
어느새 월규가 눈덩이를 들고 웃으며 소리쳤다.
“이런 겁쟁이한테는 눈 맛 좀 보여 줘야지!”
남월각 하인들은 이미 백천범에게 물들어 있었다. 월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인들이 곧장 월향의 주변을 에워쌌다.
살짝 겁이 난 월향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큰소리를 쳤다.
“쓸데없는 짓들 하지 마. 학평관 어르신한테 다 말씀 드려서 벌로 곤장을 내려 달라고 할 테니까!”
“아이고, 어르신한테까지 이르신단다. 얼른 파묻어!”
월규가 무방비 상태인 월향의 어깨를 짓누르자 백천범이 서둘러 뛰어들어 월규의 몸을 깔아뭉개며 소리쳤다.
“빨리, 둘 다 깔아뭉개!”
남월각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렇게 떠들썩했던 적이 없었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담이 작았던 련이마저도 활짝 웃으며 두 시녀와 백천범을 깔아뭉갰다.
가장 밑에 깔려 있던 월향은 숨도 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입을 벌리면 웃음이 새어 나오는 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즐거움은 쉽게 전염되어 모든 이들이 웃고 떠들며 백천범 일행의 장난에 가담했다.
옷을 두껍게 입은 탓에 몇 명 올라타지도 않았는데 대열이 쉽게 무너졌다. 미끄러져 내려온 하인들은 자신이 깔리기 전에 재빨리 다시 위로 올라갔고, 모두가 얼굴이 얼얼할 만큼 신나게 웃었다.
떠들썩한 소리에 추문이 정원에서 까치발을 들고 남월각을 바라보았다. 담장에 가려 내부가 잘 보이지 않자, 추문은 결국 정원을 나섰다. 그녀는 비탈길에 서서 고개를 내밀고 남월각 안의 상황을 살폈다. 이내 깜짝 놀란 추문이 수원상에게 돌아가 이 소식을 전했다.
“마마, 어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인들이 왕비 마마를 깔아뭉개고 있습니다. 대체 무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원상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백천범은 저택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인데 누가 감히 그녀를 깔아뭉갠단 말인가?
그녀는 서둘러 처소를 나와 비탈길로 향했다. 벽 틈을 통해 남월각 안의 상황을 확인한 수원상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려 초왕비라는 사람이 하인들과 소란을 피우다니, 체통은 어찌하고? 설마 저런 자유분방한 성격이 초왕의 호감을 산 것이란 말인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데 건장한 형체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못 본 척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도 그녀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할 리 만무했다. 그녀를 무심히 스쳐 지나간 그가 곧장 남월각 문턱을 넘어섰고, 백천범이 밑에 깔린 광경을 바라보고는 매섭게 소리쳤다.
“모두 일어나거라!”
갑작스러운 초왕의 행차에 혼비백산한 하인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일어났다. 담이 작은 련이는 아예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백천범만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에게 뛰어갔다. 이미 묵용감의 성격을 꿰고 있던 그녀는 그가 화났을 땐 뻔뻔하게 애교를 부려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달려들자 묵용감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안으면서도 상처는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두꺼운 솜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안은 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저들이 그대를 깔아뭉갠 것이오?”
“제가 아니라 월향이를 깔아뭉갠 거예요. 월향이가 가장 아래쪽에 있었거든요. 눈 속에 파묻으려고요.”
“무엇 하러 사람을 파묻는단 말이오?”
“재미있잖아요. 왕야는 이런 것도 안 해 보셨어요? 얼굴만 빼고 온몸을 눈으로 뒤덮으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지금보다 더 어릴 때, 함께 놀 사람이 없었던 백천범은 나무 뒤에 숨어 오빠들이 노는 모습만 몰래 훔쳐보았다. 같이 논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눈이 쌓여 있으니 오빠들처럼 놀아 보고 싶은 마음에 한바탕 소란을 피운 것이었는데, 역시 기대만큼이나 재미있었다.
묵용감의 분노는 하인들에게 향했다. 그가 철없는 하인들을 노려았다.
“왕비의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깔아뭉갤 생각을 하다니, 다들 곤장을 맞으러 가거라!”
감히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던 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백천범이 묵용감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왕야, 왜 벌하시는 거예요. 저 애들은 그저 저와 놀아 준 것뿐이에요.”
“노는 것도 정도가 있소!”
“전 이미 다 나았는걸요.”
그녀가 소매를 접어 올리더니 가늘고 새하얀 팔을 내밀었다.
“이것 좀 보세요. 새살이 올라왔잖아요. 정말 다 나았어요.”
연지를 살짝 바른 듯 분홍빛 부드러운 새살이 드러나자 묵용감은 서둘러 그녀의 소매를 내렸다.
“어찌 걸핏하면 소매를 올리는 것이오. 그러다 풍한이 들 수도 있소.”
백천범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계속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결국 백천범은 발끝을 세우고 그의 목을 감싼 뒤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왕야, 잠시 협상 좀 해요.”
협상이라니.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우스웠지만 그저 허리를 굽혔다.
“말해 보시오.”
“왕야, 계속 제 새살을 만져 보고 싶으셨죠? 방에 가서 만지게 해 드릴 테니 하인들을 용서해 주세요!”
묵용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단 말인가! 세상에 어찌 이리 부끄러움 모르는 계집이 있단 말인가!
묵용감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그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에 입맞춤까지요. 어때요?”
묵용감은 그녀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이런 조건을 내걸다니!
별안간 그가 쌀자루를 둘러메듯 그녀를 어깨에 들쳐 안았다.
“오늘은 왕비가 너희 대신 벌을 받겠다고 하니, 죄는 묻지 않겠다. 단, 또 이런 일이 생기거든 그땐 가중 처벌을 내릴 것이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하인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왕비가 자신들 대신 벌을 받는다는 말은 대수롭지도 않은 듯했다. 하기야 왕비를 아껴 주기만 해도 모자랄 초왕이 어찌 벌을 내릴 수 있겠는가! 왕비가 나서면 초왕이 당해내지 못한다는 걸, 하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묵용감이 백천범을 회림각으로 데려갈 때, 수원상은 여전히 길목에 서 있었다. 찬바람을 맞아 얼굴이 빨개져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은 생기로 반짝였다. 그녀가 손과 발을 흔들며 큰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은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은방울 소리 같은 백천범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그녀의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수원상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질투심을 느꼈다. 묵용감의 맹목적인 총애뿐만 아니라 저 밝은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번이라도 저렇게 웃어 본 적이 있었던가.
묵용감이 백천범을 들쳐 안고 돌아오자 괜스레 기홍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둘러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기홍을 녹하가 재빨리 붙잡았다.
“부부 사이의 일에 뭐 하러 끼어들어?”
그제야 기홍이 미소를 보였다. 그녀가 조금은 감격스럽다는 듯 말했다.
“왕야께서 정말 다른 사람이 되신 것만 같아.”
“넌 잘 모르겠지만 그게 바로 은애의 힘이라는 거야.”
“나야 당연히 잘 모르지.”
기홍이 멀리 서 있는 가동을 힐끔거리다 웃었다.
“은애하는 사람이 있는 너랑은 다르니까.”
녹하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그녀가 기홍의 입을 늘리려는 시늉을 했다.
“질투하기는, 너도 한 명 찾아봐!”
기홍이 깔깔 웃으며 도망쳤다.
“아이고, 드디어 인정하셨네요. 가동 무사님한테 말해 주러 가야겠다!”
“그러기만 해 봐!”
녹하는 짐짓 화난 척 치맛자락을 잡고 기홍의 뒤를 쫓았다.
방에 도착한 백천범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여기요. 사양하지 말고 만져 보세요.”
묵용감은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정말 사양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애써 마음을 누른 그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분홍빛 새살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 막 돋아나 깨끗하고 여린 살이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빨갛게 부풀 것만 같았다.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던 그는 소매를 내려 주고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백천범은 그런 그의 태도가 의아하여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설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일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분명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묵용감은 마른침을 삼키고 또 삼키며, 입 밖으로 내고 싶었던 말도 힘겹게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때, 문밖에서 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물이 다 데워졌습니다. 지금 씻으시겠습니까?”
묵용감은 재빨리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자신의 허리를 감싼 자그마한 손을 떼어 냈다.
“목욕을 하고 올 테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시오. 돌아오면 그대와 다시 담판을 짓겠소.”
그러나 백천범은 넉살 좋게 그의 곁을 쫓아다녔다.
“왕야, 지금 목욕하실 거예요?”
“그렇소. 오늘 훈련이 있어 땀을 흘렸소.”
훈련을 끝내자마자 저택에 돌아온 그는 그녀가 보이지 않으니 바로 남월각을 찾은 것이었다.
“그럼 제가 왕야의 목욕 시중을 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