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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48)화 (247/1,192)

제248화

예왕은 서복궁에서 옷깃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침대 맡에 기대 야광배夜光杯를 든 그의 얼굴은 여한 없이 즐긴 듯 옅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나흘째다. 이러다 본왕이 말라비틀어지겠구나. 언제 나를 보내 줄 것이냐?”

백 귀비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예왕야께서는 본궁의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예왕은 남녀 간의 애정에 있어 고수 중의 고수였지만 백 귀비는 그런 그에게마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우리 아기는 그런 재주를 어디서 배웠을까? 폐하께서 널 얻으셨으니 아주 좋아 죽으시겠구나?”

순간 백 귀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제는 열 달하고도 보름이 넘도록 그녀를 찾지 않았다. 한데 어찌 좋아 죽겠는가? 입궁 전, 이씨 부인은 성에서 가장 유명한 기녀를 찾아 특별히 기교를 배우게 했다.

기교야 배우면 그만이었지만 도무지 쓸 기회가 없었다. 황제의 마음은 늘 황후에게 있었고 다른 여인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벌써 며칠이나 봉명궁에서 잠을 청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그녀에게도 곧 기회가 오리란 뜻이기도 했다.

예왕이 백 귀비를 바라보며 웃었다.

“초왕비와 정말 친자매가 맞는 것이냐? 전혀 닮지 않았군.”

백 귀비의 표정이 절로 언짢아졌다.

“그 애 이야기는 어찌 꺼내시는 겁니까?”

“계략은 네가 짰지만 실천한 사람은 나다. 그러니 내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지. 내가 널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왜요, 초왕이 성가시게 굴까 걱정되십니까?”

백 귀비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성격이라면 예왕야의 저택도 찾아갔을 것입니다.”

예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날 찾지 못하면 초왕이라도 별수 없겠지. 초왕은 나보다 손아래다. 난 손아래뻘과는 상대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았음…….”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별안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초왕이 내 보물에 화풀이를 한 것은 아니겠지? 만에 하나라도 깨뜨렸다간…….”

그가 급히 신발을 신으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안 되겠다. 궁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백 귀비가 그의 뒤태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지금 돌아가시면 돌이 아니라 예왕야께서 으스러질 텐데요.”

예왕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밖에서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 * *

창밖으로 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며칠 전 내린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었다. 어느새 눈으로 뒤덮인 황궁이 창백한 은빛으로 반짝였다.

황후는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몸이 편치 않아 좀처럼 편히 잠들지 못한 탓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 정신이 몽롱했던 그녀는 환한 창밖을 알아차리고 곧장 영춘을 불렀다. 영춘은 옷매무새도 정돈하지 못한 채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지금이 몇 시진이냐?”

“인시(오전 3시~5시)이옵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황후가 다시 물었다.

“인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리 밝은 것이냐?”

“날이 밝은 게 아니라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황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어도 잠들지 못하니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영춘이 손뼉을 쳐서 다른 하인들을 불렀고, 곧 하인들과 함께 황후의 환복과 세안 시중을 들었다.

황후는 화장대에 앉아 머리 손질을 받았다. 그때, 은은하게 퍼진 향기를 알아차린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원에 납매臘梅(음력 섣달에 꽃이 피는 매화)가 핀 것이냐?”

영춘도 기쁘게 답했다.

“예. 어제까지만 해도 봉우리가 맺혀 있었는데 눈을 맞더니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 탓에 꽃송이가 눈에 덮여 버렸지만요.”

“그래도 피었으니 되었다.”

황후의 얼굴에도 화색이 피어났다.

“외투를 가져오너라. 본궁이 나가서 좀 봐야겠다.”

영춘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마마, 밖이 매우 춥습니다. 방 안에서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잠시 나가는 것뿐이니 그리 걱정할 것 없다.”

영춘은 하는 수 없이 푸른색 물총새 깃털로 장식된 외투를 가져와 황후에게 입혀 주었다. 구리로 만든 손화로까지 쥐여 준 후에 영춘이 그녀를 부축했다.

황제는 납매 향기를 좋아하는 황후를 위해 특별히 좋은 품종의 납매를 구해다가 손수 그녀의 침전 처마 밑에 심어 주었다. 이곳에 심어야 방 안에서도 볼 수 있고 향기도 잘 전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매년 꽃이 피면 황제는 어김없이 봉명궁을 찾았다. 좋은 술을 준비하여 그녀와 마주 앉아 꽃향기를 맡고 술도 즐겼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정사政事도, 후궁들도 잊은 채 그저 서로의 따뜻한 시선과 편안한 미소만이 존재하던 순간. 취기가 오르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침전으로 향했고, 그녀는 황제의 다정한 마음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갔다…….

올해도 납매가 피었는데, 황제가 이곳을 찾아줄까? 그녀는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홀로 꽃을 감상하는 황후의 곁으로 영춘이 다가왔다.

“마마, 조반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입맛이 없던 황후는 흰죽에 무채만 조금 맛본 뒤 상을 물렸다. 다시 뒷전으로 돌아온 황후는 푹신한 평상에 기대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연꽃 향을 피운 덕에 은은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곧 영춘이 약을 가져왔다.

“마마, 탕약을 드셔야 합니다.”

눈을 뜨고 허리를 일으켜 세운 황후가 김이 모락모락 피는 약사발을 건네받아 천천히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 방에 들어와 고했다.

“마마, 장복長福이옵니다.”

장복은 황제를 모시는 소태감이다. 황제와 황후 사이에는 일종의 관례가 있었다. 황제가 봉명궁에서 잠을 청하지 않거나 황후가 승덕전을 찾지 않으면, 이튿날 소태감이 찾아와 황제의 숙면 상태를 보고하곤 했다.

황제는 천자天子다. 재채기를 하는 사소한 일마저도 중요했기에 밤사이에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는지 확인하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몇 시진에 잠들고 몇 시진에 깼는지, 밤새 몸은 몇 차례나 뒤척였는지, 새벽에 깨어나진 않았는지, 심지어 잠자리를 몇 차례 가졌는지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사실 이 내용은 규율상 태후에게 보고해야 했으나, 지금은 태후가 없었기 때문에 황후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장복이 허리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며 예를 갖췄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아랫사람들에게 늘 온화했던 황후가 웃으며 답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황제에 대해 물었다.

“폐하께서는 간밤에 잘 주무셨는가?”

장복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마마께 아룁니다. 폐하께서는 어제 술시에 잠드셨고 오늘 진시 삼 각에 기침하셨습니다.”

황후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진시 삼 각에 기침하시다니, 조회에 늦으셨단 말인가?”

장복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오늘 조회를 취소하셨습니다.”

황후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간 늘 근면 성실하게 일하던 황제다. 조정 대신들은 항상 인시에 일어난다며 그 또한 인시에 일어났고, 가끔 늦게 일어나더라도 묘시를 넘기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조회에 늦은 적 없던 황제가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폐하께서 어젯밤 편히 주무시지 못한 것인가? 혹여 어디 편찮으신가?”

장복의 표정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졌다.

“폐하께서 원기가 왕성하시어 간밤에 두 차례나 합방을 하신 탓에 조금 늦게 기침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황후의 손이 잘게 떨렸다. 하마터면 약사발에 담긴 약이 밖으로 넘칠 뻔했다. 영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와 황제의 감정은 평범한 부부들과는 달랐다. 황제가 다른 비빈들의 궁을 찾는 일은 지극히 적었지만, 그가 드물게나마 다른 궁에 발길을 줄 때면 황후의 안색은 늘 어두워졌다.

하지만 잠시 안색만 어두워질 뿐, 황후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황제에게 비빈들의 처소를 고루 찾으라고 타이르는 것도 황후의 의무였다. 그래도 황제는 들은 척도 않고 매일 봉명궁만 찾았다.

다만 요 며칠,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거리가 생겼다. 황제는 황후의 처소에 잠시 다녀가긴 해도 잠은 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봉명궁이 아닌 다른 궁을 찾은 것이었다니.

황후는 고개를 숙이고 약을 마셨다. 시커먼 약에서 역한 냄새가 났지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녀는 약을 다 들이켰다. 영춘이 서둘러 그녀의 입에 설탕에 잰 매실을 넣어 주었다.

입 안의 쓴맛이 달콤한 맛으로 바뀌자 황후가 입을 열었다.

“어느 궁에서 주무신 것이냐?”

“마마께 아룁니다. 폐하께선 어젯밤 서복궁에 드셨습니다.”

황후가 흠칫 놀랐다. 서복궁에 들다니, 정말 백 귀비의 뜻대로 되어가는 듯했다.

천천히 매실을 삼킨 그녀가 쟁반에 씨를 뱉었다. 장복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돌아가거라. 폐하를 잘 모셔야 한다.”

장복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영춘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웃어 보였다.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에 대한 폐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마마의 옥체가 편치 않으시니 폐하께서도…….”

영춘도 어쨌든 아가씨니 이런 일을 입에 올리는 게 다소 부끄러웠다. 영춘은 조금 우물거렸지만 말을 끝맺었다.

“폐하께서도 해소는 하셔야 할 테니 다른 궁을 찾으신 것이겠지요. 마마의 병환만 좋아지신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마마 곁을 지키실 것입니다.”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황후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날은 다신 오지 않을 것이다. 백 귀비의 지략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백 귀비는 백 승상을 닮아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승산이 없는 싸움도 절대 하지 않았다. 지금껏 몸을 낮춰 왔으니, 기회가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룰 사람이다.

하지만 황제는…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본래의 성격을 억누르고 어진 군주와 현량賢良이 된 그였다. 그간 억눌렸던 편협하고 어두운 감정이 폭발했으니 다시 통제하긴 힘들 터였다. 서복궁에서 하룻밤에 두 차례라……. 정말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는 군주였다면 그런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으리라.

황후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한번 탐욕이 생기고 나면 위로 올라가기란 매우 어려웠고, 내리막길을 걷는 건 순간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백 귀비의 말을 믿지 않기만을 바랐다. 황제가 부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기를, 계속 어진 군주로 남을 수 있기를…….

그가 천하를 잘 지켜야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조정이 어지러우면 백성들의 삶은 더 고단해질 테고,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성군의 자리도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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