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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47)화 (246/1,192)

제247화

입궁한 그는 곧장 봉명궁으로 향했다. 황후는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태감 유복이 서둘러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왕야, 잠시 앉으시지요. 소인이 들어가 고하겠습니다.”

초왕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유복이 들어오기도 전에 황후가 궁녀를 보냈다.

“마마께서 안으로 드시랍니다.”

유복이 서둘러 안으로 안내했다.

“왕야, 이쪽으로 오시지요.”

황후의 침전은 묵용감도 처음 방문한 차였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황후는 기다란 평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며칠 전보다 병세가 심해진 듯 안색이 파리했다. 그 모습에 묵용감마저 흠칫 놀랐다.

“마마,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좌당중에게 진찰은 받으셨는지요?”

“고질병입니다. 겨울만 되면 이러지요. 좌당중이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고 있으니 겨울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묵용감이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그리 춥지 않군요. 제 생각에 황수께서는 원기가 부족하신 듯합니다. 보약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며칠 전 선물로 들어온 좋은 산삼이 있습니다. 황수께 보내드릴 테니 원기를 보충하십시오.”

묵용감은 황후보다는 황수라는 호칭을 좋아했다. 그쪽이 조금 더 친근감이 느껴졌고, 무엇보다 그가 진심으로 황후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 큰형수는 어머니 같은 존재인 법이다. 게다가 황후는 도리를 깊게 이해하여 많은 일에서 황제보다 본질을 잘 간파해 냈다. 황제의 무른 성격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날들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평화에는 황후의 숨은 노고가 있었다.

“황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태비 마마의 탄일 밤…….”

그가 막 입을 열었을 때 밖에서 유복의 외침이 들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묵용감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향했고, 황후도 힘겹게 평상에서 내려와 황제를 영접하러 나갔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오자 두 사람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황제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또 누구라고. 셋째가 이곳에 와 있었구나. 초왕비가 아프다더니 어찌 짬을 내어 온 것이냐?”

황제가 몸을 돌려 황후를 부축했다.

“몸도 좋지 않으면서 어찌 이리 예를 갖추는 것이오. 어서 가서 누우시오. 이러다 병이 더 나빠지겠소.”

희미하게나마 책망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황제가 직접 황후를 평상에 앉히고 자신은 꽃이 조각된 자단목 의자에 앉았다. 궁녀가 내온 차를 받아 든 황제가 찻잔 뚜껑을 열고 찻잎을 건져 냈다.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묵용감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수께서 며칠이나 옥체가 편치 않으시다는 말에 뵈러 왔습니다.”

“셋째가 아주 세심하구나.”

황제는 차를 마시지 않고 찻잔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황후가 늘 앓는 병이다. 겨울이 지나면 괜찮아지지. 지금은 그저 고통을 견디는 방법밖에 없구나. 짐도 황후를 보고 있으면 애가 탄다.”

“폐하. 걱정 마시옵소서. 신첩, 겨울마다 이리 앓았지만 봄이 되면 좋아지지 않습니까.”

황제는 엄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가 황후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묵용감에게 물었다.

“초왕비는 좀 어떠하느냐? 정무가 바빠 직접 가 보질 못했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크게 병이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다 나았습니다.”

“사흘이나 연이어 나타나질 않으니 초왕비의 병세가 심각한 줄 알았다.”

황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짐도 마음이 놓인다.”

그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시작되었다. 황제와 초왕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고, 황후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 평상에 기대앉아 있었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창가에 걸린 발을 살짝 흔들었다. 부드러운 천 자락이 아름답게 흔들리는 모습이 묵용감의 시야에 아른거리자 그는 갑작스레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니 묻고자 했던 일은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만 했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물러가겠다고 고했다.

그를 더 붙잡을 수 없던 황후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후는 몸이 좋지 않으니 짐이 대신 배웅해 주마.”

묵용감이 급히 그를 말렸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배웅을 받겠습니까. 나오지 마시고 황수와 함께 계시지요.”

말을 마친 묵용감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황제는 자신의 옷소매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셋째 이놈은 어찌 저리 급하게 간단 말이오. 꼭 쫓기는 것 같구려.”

황후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쾌한 마음을 억눌렀다.

“셋째가 무슨 일로 황후를 찾아온 것이오?”

“폐하께서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신첩의 병문안을 왔을 뿐입니다.”

짧게 웃음을 터뜨린 황제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황후에게 다가갔다.

“셋째가 황후를 참 세심히도 살피는구려.”

비로소 황후가 시선을 올려 가만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혹 궁 안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들으셨는지요?”

황제가 짐짓 태연히 되물었다.

“무슨 유언비어를 말하는 것이오?”

“못 들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괜스레 노여움만 커지실 겁니다.”

“그리 말하니 궁금하지 않소. 대체 무슨 유언비어이길래 그러오?”

“정말 모르십니까, 폐하?”

“짐은 정말 모르오.”

황제는 깨끗하고 투명한 황후의 눈망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황후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터무니없는 헛소문일 뿐입니다. 신첩과 초왕이 그날 밤 석가산에서 밀회를 했다더군요. 폐하께선 그 말을 믿으십니까?”

“당치도 않은 소리!”

황제의 이마에 시퍼런 핏대가 도드라졌다. 새어 나오는 분노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를 꽉 깨문 황제에게서 당장이라도 사람을 해칠 듯한 분노가 넘실거렸다.

“누가 그런 소릴 떠든단 말이오. 짐이 당장 그자의 목을 베겠소!”

“신첩이 듣지 않는 게 나을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진노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황제가 어두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햇빛이 방 안을 내리쬐었다. 검은 바닥 위에 뿌려진 금가루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어금니를 으스러질 듯 깨물었다. 드물게도 황제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 신첩과 초왕의 사이를 의심하시옵니까?”

“물론 아니오.”

황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령 초왕은 믿지 못한다 해도 어찌 황후를 믿지 못하겠소?”

황후 곁에 다가가 앉은 황제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번 일은 짐이 철저히 조사하여 그대의 결백을 밝혀 주겠소.”

황제의 손이 조금 차갑고 축축했다. 놀란 황후가 손을 빼 내어 그의 손을 다시 감쌌다.

“폐하, 추우십니까? 손이 어찌 이리 차갑습니까?”

황제 역시 손을 빼내더니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짐은 춥지 않으니 걱정 말고 편히 쉬시오. 시간이 나면 또 그대를 보러 오겠소.”

“폐하, 신첩은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신첩은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당분간 폐하를 뵈러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부부끼리 그런 말 마시오. 그대만 건강하다면 짐은 더 바랄 게 없소.”

황제는 황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후의 눈가에 서서히 이슬이 맺혔다.

황제와 황후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전각을 떠나자 시중을 드는 궁녀 영춘迎春이 곧바로 황후 곁으로 다가왔다. 황후를 살피려던 그녀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혹여 어디가 불편하신 것입니까?”

황후의 두 눈에 일렁이던 눈물이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곧 바뀔 것 같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마?”

영춘이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곤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게 금방 바뀔 것 같진 않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법이다. 황제의 성격은 황후가 제일 잘 알았다. 묵용한墨容瀚은 대황자였지만 재능 면에서는 태자 묵용연墨容淵만 못했고, 도량과 의지 면에서는 묵용감만 못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어좌에 앉혔다. 좋은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그를 위해 그녀도 태평성세를 이루려 최선을 다했다.

묵용한의 사고는 너무 근시안적이었고 도량도 좁았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태도를 고치고 싶어 했고, 그녀의 충고를 가감 없이 듣곤 했다. 그는 다방면으로 그녀에게 의존했다. 그가 갈피를 잡지 못할 땐 그녀가 대신 지시를 내리거나 계획을 수정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밤이 깊을수록 추워지는 날씨에 그녀는 쉽게 풍한이 들었다. 병도 그렇게 깊어지고 말았다.

기품 있고 온화한 성격의 황제는 역사에 좋은 황제로 기록되길 원했다. 그는 새로운 정치를 시행하면서 조정 신하들을 응집시키고자 수많은 여인을 후궁으로 들였다. 다만 그가 후궁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후궁을 들이는 것은 그저 정치적 수단이었다. 그녀는 그 여인들이 안타까웠지만, 큰 일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으니 책망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결정을 지지해 줘야 할 황후이므로. 그렇게 그의 행동을 묵인했다.

그는 유난히 백여름을 의지했지만 이강의 일로 그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 후 황제는 대학사에게 힘을 실어 주며 백 승상과 맞섰다. 이런 이유로 초왕과 수원상의 이혼을 막은 것이었다.

그녀와 초왕이야말로 황제의 진정한 양팔이었다. 그의 나라와 사직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내던질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어찌 그녀와 초왕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그녀와 초왕만큼은 의심해선 안 되었다. 그녀는 그와 어린 시절부터 부부의 연을 맺었고, 초왕은 그의 형제가 아닌가.

아무리 혈육 간의 정이 깊지 않은 황가라고 해도, 초왕은 지금껏 황제에게 불순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 또한 한 번도 그릇된 행실을 한 적이 없건만, 황제는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오늘 황제는… 말로는 유언비어를 터뜨린 자를 책망했지만, 눈빛은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녀를 믿지 않는다니, 그는 지금껏 그 누구도 진정으로 믿어 본 적이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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