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이튿날, 영 씨가 울상이 되어 서 태비에게 고했다.
“왕야께서 여영이의 아버지를 전당포 관리로 보내셨습니다. 형부 시랑이 전당포라니요.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서 태비가 품에 안고 있던 삵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이내 먼 곳을 바라보고 처량하게 말했다.
“그 애의 방식이다. 영아, 애가가 널 놓아주어야겠구나. 출궁하거라.”
영 씨가 곧장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소인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태비 마마 곁을 지킬 것입니다.”
“바보 같은 계집.”
서 태비가 희끗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출궁을 해야만 네가 산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초왕비가 무탈했으니 망정이지, 애가도 그 애와 함께 묻힐 뻔했구나.”
영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야께서 소인도 죽이실 거란 말씀이십니까?”
“애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영이는 네가 소개한 아이니 너도 휘말릴까 겁이 나는구나.”
영 씨의 얼굴은 아예 잿빛이 되었다.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지금껏 잔꾀 한번 부려 본 적이 없었다. 서 태비의 시녀로 친왕의 저택에 들어갔다가 입궁하기까지, 일생의 가장 좋은 시절을 이 쓸쓸한 황궁에 모두 바쳤다. 그토록 성실하게 살아온 그녀였다. 말년이 되어 잠시 사사로운 마음이 생긴 것으로 어찌 그녀의 목숨을 해하려 한단 말인가?
궁을 나간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형제는 한순간에 전당포 관리가 되었으니 분명 그녀를 원망할 터였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데다 부모도 일찍 여의었는데 궁을 나가면 무얼 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태비 마마, 소인은 못 떠납니다. 왕야께서 정말 소인의 목숨을 거두시겠다면 소인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서 태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도 지긋한데 어찌 무릎을 꿇는 게야. 일어나거라. 궁에 남아 있겠다면 애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목숨은 지킬 것이다.”
두 사람이 처량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유도가 들어와 서 태비에게 예를 갖추었다.
“태비 마마, 큰일입니다.”
서 태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이냐?”
황유도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인이 방금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왕야께서 황후 마마와… 미심쩍은 사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서 태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헛소문이다. 초왕이 왕비를 끔찍이 여기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니더냐? 어찌 그런 소문이 났단 말이냐?”
“잊으셨습니까?”
황유도가 지난 일을 언급했다.
“태비 마마의 탄일 밤, 왕야께서 황후 마마와 단둘이 석가산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던…….”
“애가도 그곳에 있었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누가 감히 입을 놀린단 말이냐?”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후궁에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소인은 이 일이 폐하께 전해질까 걱정입니다. 분명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유모 영 씨가 조용히 덧붙였다.
“태비 마마, 아무래도 그 말을 폐하께서도 들으신 듯합니다. 이미 이틀 동안 봉명궁을 찾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서 태비는 품에 안고 있는 삵을 처연하게 내려다보았다.
“기어코 소란을 피우는구나. 지금처럼 태평성세가 계속되면 황상이 초왕을 의지할 일도 자연스레 줄어드는데… 이럴 때 사이까지 멀어지면 어찌한단 말이냐?”
영 씨가 그녀를 위로했다.
“태비 마마,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줄곧 마마께 효심을 다하셨고 왕야도 지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피를 나눈 형제 사이이니 이런 유언비어는 절대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유도 역시 거들었다.
“태비 마마, 소인 생각에는 왕야께 서신을 보내 알려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서 태비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화가 나 있을 테니 아니 된다. 애가가 서신을 보낸다 한들 받지 않을 게야.”
“하지만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왕야께서도 필히…….”
서 태비가 끝끝내 손을 내저었다.
“초왕은 재주가 탁월한 애다. 서신을 보내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 걱정할 것 없다.”
* * *
황제는 상주문을 내던지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는 식은 지 오래였다. 시원해진 찻물을 한숨에 들이켠 황제가 찻잔을 힘껏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승해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폐하,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잠시 어화원御花園을 둘러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초록 국화와 백차 꽃이 예쁘게 피었다고 합니다. 기분 전환을 하시는 것도 좋은 듯합니다.”
황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초왕은 벌써 사흘째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비록 다른 이를 통해 휴가를 내긴 했지만, 초왕비의 병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황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따사로운 볕을 쬐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긴 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황제는 마음속의 울적함을 조금씩 걷어 내었다.
겨울의 어화원은 경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부분 잎이 바싹 말라 있었고 몇몇 푸른 나무들만 풍경을 장식했다. 고승해가 말한 초록 국화와 백차 꽃도 눈에 띄었다. 워낙 진귀한 품종인 데다 키우기 어려운 까닭에 화분에 심어 화원 한편에서 기르고 있었다.
천천히 어화원을 거니는 황제의 귀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그날 초왕야랑 황후 마마가 석가산에서 밀회를 가지다가 폐하께 들켰대. 초왕야는 벌써 삼 일을 조정에 얼굴도 안 비친다더라.”
무언가가 황제의 심장을 강하게 내리친 듯했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초왕야도 참 이상하지. 황보주아 때문에 홀로 살 것처럼 굴더니 왕비를 셋이나 들였잖아. 특히 백 승상 댁 아가씨를 예뻐한다면서? 별이든 달이든 다 따 줄 것처럼 잘해 준다던데……. 어떻게 황후 마마를 마음에 둘 수 있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다들 초왕야한테 속은 거라니까. 황보주아 때문에 혼인을 안 하긴, 눈속임이었던 거지. 진작에 황후 마마와 가까운 사이였대. 지난번에 궁에서 묵겠다고 소란을 피웠을 때도 그렇잖아. 폐하께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황후 마마께서 애걸복걸한 덕에 겨우 허락하셨다던데?
생각해 봐. 황후 마마와 초왕은 후원에 있고 폐하 홀로 전정에 있는데 궁문이 닫히면 더 편하겠지…….”
황제는 창백해진 얼굴로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의 머릿속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초왕비 때문이 아니다. 떳떳하지 못해서 그를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초왕이 조정을 찾지 않는 진짜 이유였다!
* * *
백천범이 눈을 뜨니 코앞에 묵용감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깼소?”
백천범은 천천히 눈을 비볐다.
“왕야, 오늘도 조정에 안 가시려고요? 그러다 일에 지장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그런 일은 걱정할 필요 없소. 어서 낫는 것에만 신경 쓰시오.”
그가 상처를 언급하니 괜스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백천범이 손을 들어 올려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새살이 돋고 있는지 너무 간지러워요.”
“움직이지 마시오.”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옷소매를 걷어 올리자 천으로 둘러싼 상처가 드러났다. 그가 손끝으로 조심스레 상처 부근을 어루만졌다.
“조금 나아졌소?”
백천범이 목을 움츠렸다.
“그래도 간지러워요.”
묵용감은 원을 그리듯 상처 주변에 입을 맞추었다.
“이리하면?”
백천범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더 간지러워요!”
그녀는 잇몸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명랑하고 기분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묵용감은 아랫배가 기묘하게 뻐근해졌다. 상처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고 마구 문질러 주고 싶었다.
한바탕 웃고 난 그녀가 아랫배를 만지며 말했다.
“왕야, 오늘은 침대에만 누워 있기 싫어요. 이것 좀 보세요. 뱃살이 또 잔뜩 나왔다고요.”
그녀가 거리낌 없이 중의를 걷어 올렸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아랫배가 숨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희미하지만 그윽한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묵용감은 힘겹게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배꼽이 어찌 이리 더러운 것이오. 잘 씻긴 하는 것이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얼마나 깨끗하게 닦는데요.”
백천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묵용감이 서둘러 그녀를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상처가 벌어질지도 모르오. 내가 한번 보겠소.”
그가 유심히 작은 배꼽을 보더니, 갑작스레 입을 맞췄다. 그리곤 혀로 움푹 파인 자그마한 골을 핥았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다급히 옷을 내리며 물었다.
“왕야,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까만 게 묻어 있었소. 손으로는 닦을 수 없으니…….”
“그럼 핥으시면 안 되죠. 더럽잖아요!”
묵용감이 피식 웃고는 그녀의 몸에 기대었다.
“맞소. 더러워도 너무 더럽소. 내게 왔으니 망정이지, 다른 이었으면 그대를 싫어했을 것이오.”
백천범이 한 손으로 그를 밀어내며 입을 삐죽였다.
“왕야야말로 더럽거든요. 이렇게 거리낌이 없으셔서.”
묵용감이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하, 이제는 그대도 더러워졌소.”
백천범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내며 눈을 부릅떴다.
“왕야,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짓이에요?”
그제야 묵용감은 그녀를 놀리는 것을 멈췄다. 그가 손을 뻗어 장막을 살짝 걷어 올렸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밖에 앉아 햇빛을 쐬는 것도 좋겠소. 하지만 걷거나 뛰어서는 안 되오. 난 궁에 다녀올 테니 돌아오면 함께 점심을 듭시다.”
“왕야, 바쁘시면 어서 볼일 보세요. 기홍 언니랑 녹하 언니도 있으니까 전 괜찮아요.”
“알겠소.”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홍이와 녹하, 월향, 월규까지 있으니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그 애들을 부르시오.”
묵용감은 그녀의 상처에 닿지 않게 조심히 옷을 걸쳐 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시중을 들어 본 적 없었지만, 세심한 손길은 타고난 것처럼 섬세했다. 갑옷을 입었을 땐 위풍당당한 한 군신이 갑옷만 벗으면 온화하고 다정한 부군으로 변하다니, 묘한 일이었다.
묵용감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궁으로 향했다. 그날 밤 수상쩍었던 일이 또 있었으니 제대로 확인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