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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45)화 (244/1,192)

제245화

어좌에 앉은 황제는 줄곧 한 곳만 응시하며 넋을 놓고 있었다. 문무백관들은 귓속말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영민한 황제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극히 이례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잡다한 소리에 정신을 차린 황제가 고개를 돌려 고승해를 바라보았다. 고승해가 곧장 불진을 흔들며 목청을 높였다.

“더 상주할 것이 없거든 퇴조退朝(조정의 조회에서 물러남)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황제가 위엄 있게 소리쳤다.

“퇴조하라!”

고승해가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퇴조하라!”

모든 문무백관이 깊숙이 절하며 소리쳤다.

“오황吾皇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외침을 들을 때마다 황제는 기쁨과 만족감을 느꼈다. 이는 가장 드높은 권력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만민 위에 선 존귀와 영예를 뜻하는 동시에 천명을 받은 천자에 대한 신하들의 경외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신하가 그를 경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틀이나 조회에 불참한 초왕 같은 신하랄까.

조회에는 엄격한 규율이 존재했다. 휴가도 청하지 않고 불참하거나 거짓을 고했다가 발각되면 불경죄로 다스렸다. 종실 친왕인 만큼 이 점을 똑똑히 인지했던 초왕은 어제 조회가 끝난 뒤, 사람을 보내 초왕비의 몸이 좋지 않아 곁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 본인이 의원도 아니건만, 곁을 지킨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무려 친왕이란 자가 아내 때문에 지엄한 본분을 잊다니, 세간의 비웃음을 사도 좋단 말인가?

몸이 좋지 않은 건 황후도 마찬가지였지만, 황제인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제시간에 조정을 찾았다. 한데 일개 친왕이 황제보다 더 거드름을 피우다니.

황제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회랑을 걷던 그는 길가에 핀 새빨간 홍매화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한 소태감이 급히 다가와 고승해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이윽고 안색이 급변한 고승해가 황급히 소태감을 돌려보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황제가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어젯밤 실종된 정기마마가…….”

고승해가 잠시 주저하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쪽 우물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상태가 안 좋았지만 어찌어찌 얼굴은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황제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급히 남서방으로 향했고 고승해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방에 들어간 황제는 곧바로 붉은 유약이 발린 귀한 도자기를 내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도자기 파편이 나뒹굴었다.

“감히, 감히! 궁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짐이 안중에나 있긴 한 것이냐!”

황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옥여의玉如意를 집어 들었다. 고승해가 황급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그것만은 아니되옵니다. 태후 마마께서 남기신 유품이 아닙니까!”

고승해가 말하는 태후는 황제의 생모다. 소의昭儀였던 그녀는 그리 총애를 받지 못하여 아들을 낳고도 품계가 그대로였다. 그녀는 평생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서비궁으로 보내졌을 때도 감히 찾아가지도 못하고 그가 있는 곳을 서성거리며 우연히 마주칠 날만 손꼽았다.

막 봄의 문턱을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나무 뒤에 서서 수학受學을 끝낸 아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내린 봄비에 몸이 흠뻑 젖고 말았다. 이른 봄이었던지라 금세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닥쳐왔고, 그녀는 결국 풍한이 들고 말았다. 병세는 몇 달이 지나며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이미 기력이 크게 쇠약해진 후였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등잔불이 힘겹게 타듯 시들어가던 그녀는 결국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옥여의는 상을 치를 당시에 그녀의 궁에서 가져온 유품이었다. 황제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옥여의를 꺼내 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러니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옥여의를 깨트리면 후회가 막심할 게 분명했다.

잠시 생모의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천천히 옥여의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궁녀나 소태감이 사라지는 일은 종종 있었다. 각 궁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배척하는 중에 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사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을 땐 황제도 모른 척 넘어가곤 했다. 다만 이번엔 신분이 높은 정기마마가 죽지 않았던가. 마땅히 죄를 묻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고승태가 고하자마자 황제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묵용감이었다.

공 마마가 실종되기 직전, 그녀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은 초왕비뿐이었다. 초왕은 왕비를 끔찍이 아꼈고, 공 마마의 엄격한 교육 방식도 소문이 자자했으니 분명 내막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유를 불문하고 누구도 그의 궁에서 멋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오늘은 공 마마를 죽였지만, 내일은 그 칼끝이 황제를 겨누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초왕은 이미 불경죄를 너무 많이 저질렀다. 진상품을 가로채고 설조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의 궁에서 중신까지 죽였다. 궁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조회에 불참한 것도 분명 잘못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가 치밀진 않았다.

감히 그의 궁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병권을 쥐고 있으니 사람을 죽이는 일도 참으로 쉬웠다. 하지만 그 병권도 본디 그의 것, 황제의 권력이었다!

“폐하.”

그때 문 앞에서 들려온 나직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멈췄다.

황후의 목소리였다. 이틀 전에 난 병으로 봉명궁에서 꼼짝도 못 하던 그녀가 어찌 갑자기 찾아왔단 말인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한 황제가 걱정과 원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몸도 안 좋은데 누워 있지 않고. 이곳은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얼굴이 창백해진 황후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신첩, 폐하께서 크게 노하셨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바닥에 나뒹구는 붉은 도자기 조각을 보고 다시금 기침을 했다.

“정말이었군요. 폐하, 어찌 이리 노하신 것입니까?”

황제는 그녀를 조심히 의자에 앉히고 궁녀에게 차를 내어오라 분부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잠시 화를 주체하지 못한 것이오. 이제는 괜찮소.”

황후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그를 다독이기 위해 찾아온 터였다. 황후가 잠시 말을 골랐다.

“폐하, 공 마마의 일 때문이십니까?”

황후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첩도 방금 들었습니다. 지체 높은 정기마마 우물에 뛰어들다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후의 생각은 어떠하오?”

“신첩도 공 마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워낙 엄격한 데다 매질에도 능숙하다고 하더군요. 많은 이들이 공 마마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공 마마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황제가 입꼬리를 올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황후의 말도 일리가 있소. 다만 그들이 앙심을 품었다 해도 정기마마의 목숨까지 해할 수는 없소. 발각되면 그들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 않소.”

“짐작 가는 이가 있으신지요?”

황제가 마음에 있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얼마 전까지 공 마마가 장합전에서 초왕비를 가르쳤소. 초왕비가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공 마마가 실종되더니 우물에 빠진 채 발견되었소. 궁에서 감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소. 아직도 모르오, 황후?”

황후가 흠칫 놀라더니 다급히 물었다.

“폐하. 어찌 초왕을 의심하십니까?”

“초왕은 짐의 아우지만 법도를 위반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소. 황자의 범법 행위는 백성들과 동일하게 다스릴 것이오.”

황후가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폐하, 초왕과 관련된 일이라면 진상을 명확하게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괜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신첩은 초왕이 연관되어 있다 해도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초왕을 궁으로 불러 물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황제가 조금 불쾌해진 듯 물었다.

“황후는 어찌 초왕의 역성을 드는 것이오? 그 애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권력이 막강해서?”

“신첩은 폐하를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초왕은 조정에 막대한 공로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그만하면 됐소!”

결국 황제가 호통을 쳤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니, 다신 언급하지 마시오!”

황후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만큼은 화를 낸 적 없었던 황제였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조금은 애달픈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황제 역시 마음이 쓰여 편히 잠들 수 없었다.

* * *

공 마마가 우물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장합전에도 전해졌다. 서 태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런 못난 놈, 기어코 감히… 네가 어찌 감히…….”

유모 영 씨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태비 마마, 초왕야께서 이틀이나 조회에 나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초왕비의 몸이 좋지 않아서라는데… 아무래도 발각된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경고를 보내시는 것이 아닐까요? 마마, 왕야께서 설마… 이, 이곳까지 손을 뻗진 않으시겠지요?”

“그럴 리 없다.”

서 태비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애가는 그 애의 친모다. 부모를 시해한다면 천륜을 저버리는 것이지!”

영 씨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공 마마가 한 짓이니 왕야께서는 공 마마에게 화가 나신 것입니다. 저희는 모른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서 태비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무능한 태비구나. 다 그 애를 위해서였는데 원망만 사고, 모른 척을 해야 한다니.”

영 씨가 멋쩍어하며 그녀를 달랬다.

“태비 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야께서도 마마의 마음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서 태비가 잠시 침묵하더니 마음에 있는 고민을 꺼냈다.

“애가는 끝이 아닐까 봐 걱정이구나. 여영이에게도 한동안 밖에 나오지 말라고 이르거라.”

영 씨가 흠칫 놀라 물었다.

“공 마마를 처리했는데도 왕야께서 아직 원한을 풀지 못했단 말씀이신지요?”

초왕은 원한을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 쉽게 원한을 품진 않았지만, 한번 품으면 절대 잊지 않고 기어이 갚아 주었다. 백 승상이 대표적인 예였다. 서 태비도 그런 아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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