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예왕의 고질병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흠칫 놀란 예왕비는 예왕의 추태를 원망했다. 정말인지 욕정에 눈이 멀어 뵈는 게 없는 듯했다. 중추절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초왕에게 얻어맞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의 심기를 또 건드렸단 말인가? 예왕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그녀가 그의 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가동과 영구가 다가와 묵용감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묵용감이 모멸감 섞인 미소를 내보였다.
“비겁한 놈이로구나. 가자, 앞뜰에서 그놈이 애지중지하는 것을 가져가겠다.”
초왕이 똑같이 갚아 준다고 했을 때, 예왕비는 후원의 여인들을 뜻하는 줄 알았다. 초왕이 가장 아끼는 사람은 분명 초왕비일 테니 예왕의 처첩들에게 갚아 준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예왕에게 처는 첩만 못했고, 첩은 다른 이의 아내만 못했다. 초왕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예왕비는 마치 뺨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예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도였고, 그다음은 수석壽石이었다. 그것도 수석을 따로 모아 두는 정원이 있을 만큼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끼는 돌은 서재에 두고 매일 지켜보길 즐겼다.
묵용감은 서재로 들어가 고풍스러운 선반 위에 놓인 각종 수석을 훑어보았다. 그중에서도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번쩍이는 순금 받침에 고이 모셔진 용을 닮은 회흑색 돌. 예왕이 가장 아끼는 흑산석黑山石이었다.
묵용감은 곧바로 흑산석을 집어 들었다. 총관리인이 울부짖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초왕야, 그것만은 아니 됩니다. 저희 왕야의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초왕의 곁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영구가 그를 붙들었다. 묵용감은 흑산석을 가동에게 던지며 말했다.
“잘 듣거라. 되찾고 싶거든, 예왕이 직접 본왕의 저택에 찾아오라고 이르거라.”
예왕의 저택을 나서자 짙은 구름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묵용감의 주위에 환한 빛이 내려앉았다. 워낙 풍채가 좋은 데다 준엄한 용모와 비범한 기개가 그를 보는 이들에게 천신天神을 연상케 했다. 길을 걷던 백성들은 저절로 그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길가에서 잠시 생각을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본왕의 예상이 틀렸다. 예왕은 어젯밤 궁을 나오지 않았어.”
가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왕야, 예왕이 궁에서 하룻밤을 보냈단 말씀이십니까? 지금이라도 입궁할까요?”
영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계신 곳 외에 다른 곳은 예왕이 머물 곳이 못 됩니다. 만약 폐하 곁에 계신 게 아니라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가동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네 말은, 예왕이 황제 폐하의 여인을 꾀었단 거지? 그럼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입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폐하께 예왕의 죄를 물어 달라 청하면 되지 않습니까!”
영구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이 영패를 꺼내 영구에게 건넸다.
“당직실에서 소장강蕭長康을 찾아 서둘러 움직이라고 전하거라.”
영구는 영패를 받아 들고 재빨리 궁문을 향해 내달렸다.
가동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조금 부족한 그였지만 방금 묵용감의 의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공 마마에게 손을 쓰려는 것이었다.
가동이 조금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
“왕야, 혹 폐하께서 아시면…….”
묵용감은 먼 곳만 바라보았다.
“많은 걸 신경 쓸 틈이 없다. 감히 내 여인을 건드리다니! 이제 그자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날이 밝아 오며 시장이 점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가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야,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묵용감은 말에 올라 고삐를 당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동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궁으로 가는 갈림길에 다다르자 묵용감은 다른 길을 택했다. 가동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왕야, 조정에 가지 않으십니까?”
“그래, 저택에 돌아갈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힘껏 채찍을 내리쳐 달려 나갔다.
가동은 의아함에 코끝을 문질렀다. 초왕은 근면 성실한 친왕이었다. 궂은 날씨에도 조정에 가는 일을 빠트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바람도 잔잔하고 햇살도 따사로운 날에 조정에 가지 않겠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묵용감은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면 분명 그를 찾을 것이었다. 몸을 다치면 평소보다 더 마음이 허약해지는 법이다. 그럴 때일수록 그녀 곁을 더 지켜 주어야 했다.
저택에서 돌아온 그는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마중을 나온 학평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묵용감도 저절로 목소리를 낮췄다.
“편히 자는 것이냐?”
“기홍 아가씨가 곁을 지키고 있는데 무척 곤히 주무신다고 합니다.”
묵용감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곧 문발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을 지키던 기홍이 그를 보자마자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는 손을 휘저어 그녀를 내보냈다.
걸치고 있던 외투에서 바깥의 시린 공기가 느껴졌다. 그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 두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곧장 잠에서 깬 그녀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혹여 그녀가 몸을 뒤척이며 상처를 건드리진 않을까, 그는 서둘러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는 똑바로 누워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이 손에 가려 갸름한 턱만 보였다.
그가 백옥처럼 하얀 그녀의 턱에 입을 맞췄다.
“일어났소?”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잠결에 상처를 잊은 백천범이 그를 끌어당겼다. 곧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묵용감이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지금은 움직이면 안 되오.”
백천범은 고통을 참는 데 익숙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흠씬 두들겨 맞을 땐 울부짖을수록 더욱 세게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어려 고통을 참지 못했던 땐 목놓아 울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씨 부인은 웃는 낯으로 심하게 손을 내려쳤다. 꼭 변태적인 취향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맞을 때마다 유모는 눈물을 머금고 끊임없이 머리를 땅에 내리찧으며 이씨 부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유모는 그녀에게도 울지 말라고 애원했다. 선홍빛 피가 유모의 얼굴에 천천히 흘러내리는 걸 보고 어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이씨 부인 앞에서 절대로,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그 후, 그녀는 아무리 맞아도 울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씨 부인은 그 모습에 흥미를 잃었는지 대충 때리다 금방 손을 떼곤 했다.
백천범은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방법과 사람을 따돌리는 법까지 익히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녀가 맞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픔을 참는 습관은 고스란히 몸에 밴 탓에 공 마마에게 맞을 때도 꾹 참기만 했다. 하지만 묵용감 앞에선 달랐다. 묵용감 앞에서는 긴장이 풀렸기에 그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
“많이 아프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어루만졌다.
“입김 좀 불어 주오?”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백천범이 웃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아직도 저를 어린아이라 생각하시는군요.”
묵용감이 침대에 몸을 반쯤 기대고 미소로 답했다.
“아니라는 것이오?”
“저는 혼사도 치른 여인인걸요!”
백천범이 그의 턱을 더듬거렸다. 짧은 수염 자국이 그녀의 손을 간지럽혔다.
“저는 왕야의 아내라고요.”
묵용감이 한바탕 크게 웃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그는 아쉬움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입술을 빨아들였다.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좋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숨결마저 좋았다. 깨끗하고 따뜻해, 꼭 햇빛 같은 맛이었다.
그가 그녀의 입안을 혀로 간지럽혔다.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점차 열정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의 짙은 입맞춤에 숨이 가빠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마침내 그녀를 놓아 주었을 때, 그녀는 그도 얼굴이 달아올라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는 그저 곧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두운 두 눈망울에 약간의 슬픔과 자책이 서려 있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문지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잘못이오. 내가 그대를 아프게 했소.”
“전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은걸요.”
자책하는 그의 눈빛을 차마 견딜 수 없어서, 그녀는 더 명랑하게 말했다.
“어릴 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묵용감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의 모친이 그녀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던가. 이유를 물으면 분명 다 그를 위해서라고 하겠지.
착잡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그가 화제를 돌렸다.
“배고프진 않소?”
“조금요.”
백천범이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묵용감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음식을 가져오라 하겠소.”
그가 장막을 걷고 기홍을 부르더니 조용히 분부를 내렸다.
백천범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타일렀다.
“일어나긴 해야지요. 누워서 어떻게 밥을 먹겠어요? 게다가 세수도 하지 않은걸요.”
묵용감이 신발을 벗고 침대에 앉더니 그녀를 품에 조심스럽게 안았다.
“충분히 깨끗하니 씻지 않아도 되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백천범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눈곱도 끼었잖아요.”
묵용감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에 입을 맞췄다.
“이젠 없소.”
“…….”
더러운 걸 싫어하던 그가 어찌 이리 변했단 말인가.
곧 기홍과 녹하가 침대 옆에 자그마한 상을 펴고 접시를 놓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있을 땐 회림각의 아침상이 평소보다 다채로웠다.
가득 차려진 접시를 보며 백천범이 활짝 웃었다.
“침대에서 먹으라고요?”
묵용감이 답했다.
“그렇소. 먹고 나면 다시 눈을 붙이시오.”
백천범이 눈을 크게 치떴다.
“일어나자마자 먹고 또 자다니요. 돼지를 기르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초왕은 못된 심보라도 품은 듯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맞소. 다 크면 잡아먹을 것이오.”
그의 농담에 백천범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