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43)화 (242/1,192)

제243화

황제가 손을 휘저었다.

“이제 나가 보거라. 짐은 다시 눈을 붙일 것이다.”

고승해가 주저하다 물었다.

“폐하, 날이 밝으면 초왕의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 초왕을…….”

“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리 급한 일이 아니구나. 내일 조정에서 만나면 말할 것이다.”

고승해는 곧장 대답을 올리고 황제의 잠자리를 살폈다.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 준 뒤에야 그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환한 등불 아래, 은도가 살갗을 스치자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백천범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녀는 입에 수건을 물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면 묵용감이 슬퍼할 터였다.

칼이 닿으니 곧장 피부가 찢기고 갈라졌다. 엄습하는 고통에 이를 악문 그녀보다 묵용감의 안색이 더욱더 희게 질렸다. 비록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의 두 눈동자만큼은 검게 빛나며 백천범의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리자 기홍은 수건으로 틈틈이 땀을 닦아 주었다.

녹하는 작은 종지를 상처 근처에 대고 서 있었다. 상처를 째자 누런 고름이 천천히 종지 안으로 흘러내렸다.

기홍이 얼른 금창약을 따뜻한 물에 섞어 풀처럼 만든 뒤, 부드러운 천을 담가 약이 스며들게 했다. 그리곤 고량주를 묵용감에게 건넸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물고 있던 수건을 조심히 빼내고 그녀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많이 아플 것이오. 참기 힘들면 날 물어도 좋소.”

“싫어요. 저는…….”

“물라면 무시오.”

그가 명령을 내리듯 차갑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아픔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정신만큼은 그녀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를 물지 않으면 도저히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백천범의 눈가에 희뿌연 물안개가 스며들었다. 혹여 묵용감이 볼까 그녀는 얼른 그의 어깨에 얼굴을 숨겼다.

묵용감이 천에 고량주를 묻혀 상처를 닦아 냈다. 백천범이 흠칫 놀라더니 고통으로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어깨와 맞닿은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날 물라니까!”

묵용감은 낮게 고함을 질렀다. 백천범은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에 본능적으로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얇은 내의를 뚫고 그녀의 이가 날카롭게 살갗을 찔렀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덜어 주었다. 그는 빠르게 약이 묻은 천을 그녀의 상처에 넣었다. 짓무른 피부에는 사발만 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고, 천 두 조각을 넣고 나서야 겨우 찢어진 피부를 메울 수 있었다.

차가운 약이 피부에 스며들자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그의 어깨에서 입을 떼니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상처를 낸 것이었다.

묵용감의 어깨 위로 백천범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많이 아픈 것이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왕야의 어깨에 상처를 냈습니다.”

“바보 같긴. 나는 전혀 아프지 않소.”

그는 곁에 시녀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묵용감은 이번 일로 백천범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팔뚝만큼 상태가 심각하진 않았지만, 다리는 칼로 베었을 때의 통증은 훨씬 더 심하게 느껴지는 부위였다. 이번에 그녀는 그의 어깨를 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양어깨의 가는 떨림이 그녀의 고통을 알려 줄 뿐이었다.

묵용감은 상처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억눌렀다. 다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천을 감싼 뒤에야 그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등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그는 옷을 벗고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백천범을 끌어안고 자리에 누웠다.

통증 때문에 그녀는 편히 잠들지 못할 터였다. 잠을 설치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잠들고 싶어도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침대 맡에 놓인 연등 불빛이 장막을 뚫고 은은한 빛을 비추었다. 그녀는 따스한 불빛 아래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세한 찌푸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녀가 이상하고, 신기했다. 이렇게 평온한 표정이라니, 아프지도 않단 말인가?

그간 전쟁에서 수없이 많은 부상을 입었던 그였다. 팔에 독화살을 맞았을 때, 그 또한 칼로 살을 베어 치료했었다. 그 고통을 그도 모르지 않는데, 그녀는 어찌 이리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그가 만났던 여인 중 가장 강인한 사람이다. 묵용감은 그녀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이 미어졌다.

깊은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옭아맸다. 다 그의 잘못이었다. 그가 지켜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이런 고통을 겪고 말았다.

그녀에게 고통을 줬을 얼굴들을 떠올리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에서 미세하게 뚝뚝 소리가 났다. 그들은 절대로,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결국 그는 죄책감과 증오심에 휩싸인 채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눈을 감고만 있던 백천범은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은 뒤에야 겨우 잠이 든 듯했다.

묵용감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소리 없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기홍이 서둘러 아침상을 내왔지만 입맛이 없던 그는 대충 요기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중문에서 말에 올라탄 그는 학평관을 불러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왕비를 잘 보살피거라. 입구에 친위병도 배치하도록. 오늘은 누구도 회림각을 오갈 수 없다.”

“예, 왕야.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학평관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걱정 마시옵소서, 왕야. 소인이 왕비 마마를 잘 모시겠습니다.”

묵용감은 고삐를 틀어 대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저택을 나선 그는 궁이 아닌 성의 남쪽 길을 따라 질주했다. 가동과 영구도 급히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응회암이 깔린 길 위를 빠르게 내달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높다란 문 위로 달린 현판에 「예왕부豫王府」라는 금색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주홍색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 앞에 높게 걸린 등불도 꺼진 상태였다. 말에서 내린 가동이 한달음에 문 앞으로 뛰어가 있는 힘껏 구리 문고리를 쳤다.

“누구냐!”

문 너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리 요란이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문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던 하인은 문을 열자마자 입을 꾹 닫았다. 커다란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초왕이었다. 그는 곧장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렸다.

“초왕 전하셨군요. 전하를 뵈옵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하하…….”

예왕의 저택에는 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오갔기에 대문을 지키는 하인은 아첨에 능숙했다. 다만 초왕은 예왕부에 찾아오던 다른 손님들과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였다. 그는 손님이 아니라, 예왕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 같은 기백을 뿜고 있었다. 하인은 몸을 벌벌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말에서 내린 묵용감은 하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제야 하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뒤를 쫓았다.

“초왕야, 혹 저희 왕야를 찾으시는 것입니까? 와, 왕야께서는 저택에 안 계십니다.”

묵용감은 대꾸도 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소식을 들은 총관리인이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급히 달려 나와 예를 갖췄다.

“소인, 초왕야를 뵈옵니다. 왕야…….”

묵용감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목소리가 영구와 가동에게 분부를 내렸다.

“너희 둘은 후원을 뒤지거라!”

“왕야, 이게 대체…….”

초왕의 굳은 표정에 총관리인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는 속으로 자신의 주인을 원망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필 군신을 건드리다니.

“왕야,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소인에게 말씀해 주시면 대신 찾아 드리겠습니다.”

“네 주인은 어디 있느냐?”

그가 예왕의 침소에 들어서며 물었다. 아무도 없는 침대의 이불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어젯밤 이곳에서 잠들지 않은 듯했다.

총관리인은 허리를 굽힌 채 벌벌 떨며 답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태비 마마의 탄일을 맞아 축하를 드리기 위해 입궁하시고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하! 뒤가 켕기니 그를 피해 숨은 게 틀림없었다!

묵용감은 후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총관리인이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르며 간곡하게 매달렸다.

“왕야, 이러시면 규율에 맞지 않사옵니다. 후원은 왕비 마마와 부인들께서 계신 곳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드시면…….”

그가 황급히 묵용감의 앞을 가로막았다. 잔뜩 성이 난 묵용감은 발을 들어 올려 그의 가슴팍을 힘껏 차 버렸고, 그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예왕의 처첩은 수도 없이 많았기에 후원은 많은 이들로 붐볐다. 가동과 영구는 구역을 나누어 처소를 급습했다. 흉악한 사내들이 난데없이 규방에 침입하자 예왕의 처첩들은 혼비백산했다. 놀란 여인들이 마구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통에 후원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뒤늦게 저택 경비들이 대열을 갖춰 후원으로 달려왔지만 남다른 풍채의 사내에게 가로막혔다. 홀로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그에게서는 천군만마로도 이길 수 없을 만큼의 기개가 느껴졌다. 경비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발걸음을 멈추었고,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때, 예왕비가 급히 초왕에게 다가왔다. 그의 명성이 워낙 자자했던 탓에 그녀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후원의 가장 큰 어른이 아랫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위엄을 보이며 냉랭한 목소리를 내었다.

“초왕야, 무슨 짓입니까? 이른 아침부터 예왕야의 후원에서 소란을 피우시다니요. 소문이라도 나면 모든 이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비웃음당할 사람은 예왕이오. 추악한 짓을 할 용기는 있으면서 감당할 용기는 없단 말이오? 거북이가 목 움츠리듯 숨어 버리다니. 예왕은 어디 있소?”

“왕야라면 전정에서 찾으셨어야지요. 어찌 후원에서 난동을 피우신답니까?”

“본왕은 어디가 되었든 예왕만 찾으면 그만이오. 만약 찾지 못한다면…….”

“찾지 못한다면요. 어찌하시렵니까?”

묵용감이 입꼬리를 올리고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감히 본왕이 가장 아끼는 사람을 건드렸으니, 본왕도 응당 똑같이 갚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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