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백천범이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스레 말했다.
“왕야와 초야를 치른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잖아요.”
“그땐 무엇 하다가…….”
묵용감이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웃었다.
“이제야 신경을 쓰는 것이오. 그들과는 초야를 치르지 않았소. 그대가 늘 훼방을 놓지 않았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부랴부랴 대답한 백천범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제가 훼방을 놓지 않았더라면, 왕야께서는 합례를 치르셨을 거예요?”
묵용감은 묵묵히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아 그녀의 이마에 턱을 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말이 아니었다. 그 대답이 그의 진심이었다. 비록 한 침대에 눕고, 합방을 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어떻게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다른 여인들과 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범은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묵용감은 그녀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레 소맷자락 안쪽으로 손을 넣어 살을 매만졌다.
손끝에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지자 심장이 매섭게 날뛰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실렸다. 이대로 그녀를 으스러지게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갑작스레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 아파라.”
묵용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에 힘을 풀었다.
“아프오?”
백천범이 이불 속에서 팔을 꺼냈다.
“전부터 조금 아팠어요.”
묵용감은 침대 맡에 놓인 등불을 들어 그녀의 팔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미간이 점점 좁혀지다 마침내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누가 한 것이오?”
백천범도 몸을 일으켜 앉아 새카맣게 멍든 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규율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공 마마가 목판으로 때린 거예요.”
묵용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또 어딜 때렸소?”
“다리요.”
백천범은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에 남은 시퍼런 멍을 보여 주었다.
“공 마마는 눈이 참 예리한 것 같아요. 매번 때린 곳만 내리치더라고요. 왕야께서 가볍게 만지는 건 괜찮지만, 힘을 주시면 아파요.”
별안간 묵용감이 이를 악물었다.
“몹쓸 것 같으니……!”
그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바깥방에 있던 기홍이 그의 호통에 서둘러 옷을 걸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왕야, 무슨 일이십니까?”
“방에 등을 전부 켜고 은도銀刀와 종지, 젖은 수건, 고량주, 부드러운 천, 금창약金瘡藥(주로 상처에 바르는 약)을 준비하거라. 그리고 영구를 들라 해라.”
기홍은 흠칫 놀랐다. 한밤중에 왜 그런 것들을 원하시는 걸까. 어디 다치시기라도 한 것인가. 기홍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대답을 올린 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엄숙한 표정과 태도가 의아하기만 했다.
“왕야, 무엇을 하시려는 거예요?”
묵용감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정작 머리를 써야 할 땐 어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오. 일찍 발견했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할 뻔했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수법이었지만 그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후궁에 있는 여인들이 사람을 해할 땐 눈앞에서 피를 보지 않는다, 음흉하고 악랄하게 손을 쓸 뿐. 그들의 수법은 그조차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백천범이 팔에 난 까만 멍을 바라보았다.
“…설마요. 이런 멍은 며칠 지나면 없어지는걸요. 목숨이 위험해지다니, 왕야께서 너무 심각하게 여기시는 거 아니에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충분히 심각한 일이었다. 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마마들은 사람을 교묘하게 때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곳만 때리다 보면 피부에 검푸른 멍이 올라오는데, 만질 땐 그리 아프지 않아도 피부 속은 천천히 짓무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맞은 곳은 시간이 지나도 멍이 풀리지 않다가, 나중에는 어두운 자색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미 피부가 괴사한 것이었다. 더 시간이 흐르면 괴사한 부분은 검푸른 빛을 띠게 되고, 다른 부위까지 점점 죽어 가는 것이다.
피부가 천천히 짓무른다 하여 완저緩疽라는 이름이 붙은 병이기도 했다. 완저는 심하면 일 년 안에 목숨을 잃었고, 병세가 느려도 몇 년 안에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만들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으니 은도로 상처 부위를 갈라 고름을 짜내고 약을 바르면 나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겁에 질릴까 봐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심은 감출 길이 없었다. 감히 백천범을, 자신의 아내를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반드시 그들을 제명에 죽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서 태비는 그도 방법이 없었다. 그 어떤 악랄한 짓을 해도 그녀는 그의 친모이지 아닌가. 다만 본보기를 보인다면, 그녀에게 강력한 경고는 될 터였다.
* * *
눈 내리는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유독 많은 날이었다.
묵용감, 서 태비, 심지어 승덕전의 황제까지도. 침대에 누운 황제는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궁녀에게 차를 가져오라 분부했다.
궁녀는 황제의 분부에 곧장 차를 올렸다. 황제는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멍하니 차를 건네받았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순간, 그는 뜨거운 찻물에 입을 데고 말았다.
갑작스레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찻잔을 있는 힘껏 바닥에 던졌다. 새하얀 자기 찻잔이 반짝이는 검은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이 깨지며, 찻물과 찻잎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진노한 황제 앞에서 궁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문 밖을 지키던 이들도 슬쩍 고개를 빼 보았지만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황제가 목청을 높였다.
“이자를 당장 끌고 가서 호되게 매질을 하거라!”
황제는 어진 군주였다. 시중을 드는 이들에게도 늘 상냥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화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호된 매질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때리라는 뜻이었다. 궁녀는 질겁하여 궁에서 큰소리를 낼 수 없다는 규율도 잊고 울부짖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
태감 고승해가 급히 다가와 옆에 있던 소태감에게 눈짓을 보냈다. 소태감 두 명이 울부짖는 궁녀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폐하.”
고승해가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소인이 다시 차를 올리겠습니다.”
황제는 한참 동안 숨을 가다듬으며 묵묵히 있다가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잠시 뒤, 그가 말을 이었다.
“추령秋靈이를 풀어 주거라. 해가 지나면 출궁을 할 아이인데 난처하게 할 것 없다.”
“폐하께서는 어질고 너그러우시어 오늘날 현군으로 손색이 없으십니다.”
고승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 혹 황후 마마의 옥체가 염려되시는 것인지요?”
황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이 되니 황후의 몸이 날로 더 쇠하는구나. 짐의 근심이 크다.”
황제와 황후는 어린 시절 부부의 연을 맺었다. 열네 살에 혼사를 치른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유달리 깊었다. 관례대로라면 황후와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날은 한 달 중 초하루와 열닷새째 날 딱 이틀뿐이었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몇몇 지위가 높은 비들을 제외하고, 다른 비빈들은 거의 홀로 지내야 했다.
비빈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조건으로 그들의 아비와 형제들이 이 나라를 굳건히 지켰다. 다만 그뿐이었다. 황제와 비빈 사이에 부부의 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 황후의 궁에서 잠을 청했고, 이따금 황후가 그의 궁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황제의 품을 독차지한 황후에 대해 말이 나올 법했지만, 그 누구도 입을 놀리지 못했다. 황제와 황후는 어린 시절부터 부부의 연을 맺어 사이가 각별했고, 본디 부부 사이의 은애는 인륜이자 미덕이었다.
병을 오래 앓은 탓에 황후는 점차 힘겨워했지만, 황제는 그녀를 멀리하기는커녕 더욱더 진심으로 그녀를 돌봐 주었다. 황후의 병세가 악화할까 봐 불안했던 황제는 자나 깨나 황후 걱정뿐이었다.
황후는 밤중에 바람을 쐰 탓이었는지 봉명궁으로 돌아오자 안색이 크게 나빠졌다. 황제는 어의를 불러 황후를 진찰하라 분부했다. 어의가 처방한 환약을 먹고 나니 황후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황제는 늘 황후의 곁을 지켰지만, 오늘은 봉명궁 태감인 유복劉福에게 몇 마디 지시 사항을 내린 뒤 승덕전으로 돌아왔다.
그때 고승해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석가산에서 황후를 마주쳤을 때 그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는 황제가 초왕과 황후를 발견했을 때 황제의 눈에 깃든 냉혹함을 똑똑히 보았다.
황제는 종종 초왕을 남서방으로 불러 공무를 논의했고, 황후도 자주 그곳에 자리했으니 시동생과 형수 사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가까웠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가깝다고 한들, 그 밤에 석가산에서 단둘이 만난 건 분명 문제였다.
“폐하, 소인이 볼 때 황후 마마께선 오랜 시간 병환을 앓으시어 지금은 좀 고되시겠지만, 워낙 복이 많으신 분이니 분명 차도를 보이실 것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황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이 몇 시진이더냐?”
“폐하, 축시이옵니다. 조금 더 눈을 붙이십시오.”
황제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망설이다 분부를 내렸다.
“날이 밝으면 장합전에 가서 초왕을 불러오거라.”
“폐하, 초왕은 이미 출궁을 하였습니다.”
황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출궁을 했다? 언제더냐?”
“폐하께서 마마를 봉명궁에 모셔다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왕은 초왕비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대략 해시 오 각쯤 될 것입니다.”
“궁 문을 닫는 시각은 삼 각이 아니더냐? 어찌 궁을 나갔다는 것이냐?”
“그것이…….”
고승해는 몸을 더욱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제도 그가 왜 말을 못 하는지 알고 있었다. 궁 안의 금군들은 초왕이 관리하니, 그가 궁을 오가는 것은 말 한마디면 될 일이다. 하지만 닫힌 궁문을 여는 건 급박한 사안이 아닌 이상 황제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황궁의 지엄한 규율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한데 초왕은… 주인 없는 집을 드나들 듯 궁을 참 편히도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