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왕비는 궁 밖에서 지내니 태비 마마의 고초를 모르겠지요. 궁 안의 아랫사람들이 태비 마마를 자주 찾아뵙긴 하지만 친아들과 며느리만 하겠습니까. 곧 해가 바뀔 텐데 새해까지 궁에서 머물며 오붓하게 보내는 게…….”
묵용감은 백 귀비의 지겨운 재잘거림을 다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백천범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백천범을 궁에 묶어 두려 할수록 그는 더더욱 빨리 돌아가야 했다. 궁 안 여인들의 언행에는 늘 목적이 있다. 그의 아내를 잡아 두는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백천범도 걷는 속도가 제법 빨랐기에 묵용감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자, 서 태비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다 끝났다.”
백 귀비가 물었다.
“태비 마마, 무엇이 끝났단 말씀이십니까?”
서 태비는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 씨가 그녀를 부축해 장합전으로 돌아갔다.
서 태비가 멀어지자 현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초왕비가 이렇게 달아났으니 태비께서 다시 궁에 불러들이기 어렵겠습니다.”
백 귀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조급할 것 없습니다. 이번은 이렇게 끝났지만 기회는 아직 남았으니까요. 오늘 일을 널리 퍼뜨린 뒤, 구경만 하면 됩니다. 소문이 무성하면 거짓도 진실이 되는 법이지요.”
“조만간 덕비에게 이 일을 흘리겠습니다. 덕비가 알게 되면 분명 궁 안에 소문이 자자해질 테지요.”
백 귀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우리가 책임을 피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일에 얽히지만 않으면 폐하든 초왕이든 우리를 어찌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현비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누구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시간이 되겠습니다!”
* * *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하지만 궁 안의 금군 모두가 묵용감의 수하였다. 그들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영구와 가동은 궁문 근처에 마련된 병사兵舍에 있었다. 오늘은 태비의 탄일이니 그들은 묵용감이 궁에서 묵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왕비를 데리고 나온 묵용감을 보고 그들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궁을 나오던 순간, 백천범은 긴 한숨을 내쉬며 육중한 문이 천천히 닫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두운 밤임에도 궁은 엄숙한 위엄을 발산했다. 높다란 처마에 달린 신수神獸(신령스러운 짐승. 용, 봉황, 해태, 주작, 현무 따위를 가리킴)는 흉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음이 위축된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궁을 나왔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몇 년 뒤, 위엄이 서린 이 궁에 무슨 수를 써서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정해진 출궁이었기에 가마를 준비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묵용감은 그녀와 함께 말에 올라 천천히 저택으로 향했다.
깊은 밤이라 인적이 드물어, 순찰을 하는 금군 대열만 이따금 마주쳤다. 그들은 초왕을 발견하면 곧장 예를 갖추었다. 슬쩍 고개를 든 몇몇 병사들은 초왕의 금색 외투 사이로 자그마한 얼굴을 빼꼼히 내놓은 여인을 보았다.
다른 점은 몰라도 그녀의 새까만 두 눈에서 날카로움과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엿보였다. 초왕이 애처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지만, 한밤중에도 애처가 기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초왕이었다. 병사들은 넋을 놓고 둘을 바라보다 그가 가까워지자 곧장 시선을 거두었다.
“왕야.”
백천범이 별안간 낭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내일 눈이 쌓이면 같이 눈사람 만들어요.”
“알겠소.”
그때 묵용감이 갑자기 말을 멈춰 세웠다.
백천범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왕야, 왜 멈추신 거예요?”
가녀린 얼굴에 떠오른 새까만 눈망울이 생기 넘치는 빛으로 반짝였다. 이마 위로 빠져나온 잔머리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는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스쳤다. 그는 그녀를 가슴에 온전히 새기려는 듯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그는 이날 밤을, 이 순간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입을 맞춰 주겠소?”
그녀는 잠시 겁을 먹은 듯했지만, 곧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 순간, 묵용감은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에 휩싸였다. 더는 사장풍이나 다른 사내에게 그녀를 빼앗길까 두렵지 않았다. 그녀를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온전히 그의 사람이었다.
그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그간의 갈증을 해소하듯 꽃봉오리 같은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또 머금었다…….
멀리서 뒤따르던 영구와 가동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영구는 역시나 덤덤했지만 가동은 코를 훌쩍였다. 부러움과 감동이 함께 밀려온 탓이었다.
“우리 왕야께서는 참 대범하시다니까. 이리 큰길가에서 입을 맞추시다니. 나였다면, 헤헤…….”
영구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형님이었으면요?”
가동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랬다면 녹하한테 찐빵이 될 때까지 맞았겠지.”
그 말에 영구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분수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백천범에게 신비한 세계를 열어 주었다. 이전에는 그가 입을 맞추면 겁이 나서 숨도 쉬지 못했지만, 지금 백천범은 신비한 세계 안에서 거닐고 있었다. 달콤하고, 달콤하고, 더없이 달콤했다. 너무나 달콤해 꼭 꿈을 꾸는 듯했다.
그와의 입맞춤이 너무 달콤했던 나머지, 그가 입술을 떼려 하자 그녀가 아쉬움에 그를 끌어당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입술을 핥기까지 했다.
그녀의 과감한 행동을 알아차린 묵용감이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내 입술이 그리 달단 말이오?”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달아요!”
대갓집 규수의 조신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묵용감은 자유분방한 그녀의 성격이 좋았다. 그녀는 그 어떤 진귀한 보석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흩날리는 눈으로 물든 세상에서 멈춰 버린 두 사람은 아름다운 풍경화 같았다. 어찌나 다정한지, 바라만 보아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가동이 중얼거렸다.
“또 얼마나 오래 하시려고? 이러다 얼어 죽겠네.”
가동의 질투 섞인 말에 영구가 놀리듯 말했다.
“얼어 죽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가서 녹하 아가씨에게 입을 맞춰 달라고 하면 바로 살아날 테니까요.”
가동이 의기양양해져 웃었다.
“영구야, 난 녹하라도 있지. 너는 얼어 죽으면 누구한테 부탁할래?”
영구는 뜨겁게 입을 맞추는 두 사람만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영결무람寧缺毋濫(모자랄지언정 아무나 마구 쓰지는 않음)이라 했습니다.”
가동이 해맑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영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초왕의 뒤를 따르며 홀로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도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여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 *
연정에 눈을 뜨기 시작한 백천범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등불 아래의 초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이 나올 만큼 멋졌다. 짙고 긴 눈썹과 구레나룻, 눈을 내리깔 때마다 보이는 풍성한 속눈썹, 높고 곧은 콧대와 붉은 입술까지 전부 그녀의 혼을 빼 놓았다.
그의 붉은 입술을 한참 바라보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가 마구 입을 맞추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온 정신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높은 하늘 위 구름에 앉아 있는 듯했고, 바다에 가만히 떠올라 몸을 맡기는 느낌이기도 했다. 이따금 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듯 열이 오르기도 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그 기분이 지나면 늘 달콤함이 남았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남쪽 변방 군영에서 보낸 보고서를 읽던 묵용감은 도통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백천범이 그의 온 신경을 지배하고 있는데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줄곧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향해 끝없는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아내가 좀 쳐다본다고 어찌 마음이 산란해진단 말인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보고서를 읽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손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도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그리도 잘생겼소?”
다른 여인이었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겠지만 백천범은 예외였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생기셨습니다. 왕야는 제가 만나 본 사내 중에 가장 잘생기신 분이에요.”
그녀의 말에 되려 묵용감이 부끄러워졌다. 그가 손에 집히는 대로 공문을 정리하며 말했다.
“너무 늦었으니 그만 잠을 청하는 게 좋겠소.”
그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떠보았다.
“가동에게 그대를 데려다주라고 하겠소.”
사실 그는 조금 소심한 면이 있었다. 평소라면 온갖 핑곗거리를 대거나 억지로라도 그녀를 남게 했겠지만, 그녀가 연정에 눈을 뜬 뒤로는 오히려 점잖은 척 무게를 잡고 있었다.
그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백천범이 그의 팔을 감싸안았다.
“오늘은 왕야와 함께 잘래요.”
그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뻤지만 말은 그리 곱게 나오지 않았다.
“상관은 없지만, 발로 걷어차면 안 될 것이오.”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 없어요. 왕야를 걷어차면 제 마음이 더 아플 거예요.”
본래 이런 말은 그가 해 왔지만… 그녀의 입으로 듣게 되니 꽤나 색다르게 들렸다. 우습기도 했고, 큰 감격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동안 그가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이 그녀의 한마디에 모두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늘 비굴하게 무릎 꿇던 이가 주인이 된 것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만함과 편안함이 밀려왔다.
백천범이 아무리 자유분방한 성격일지언정, 그래도 다 큰 아가씨였다. 막상 침대 앞에 서자 부끄러움이 밀려온 그녀는 묵용감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한 침대에 눕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찌 그러는 것이오? 벌써 잊었소? 우리는 혼삿날부터 한 침대에서 잔 사이오.”
백천범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왕야께서 말씀 안 하셨으면 잊을 뻔했네요. 도망친다는 게 왕야의 방에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침대에 누운 묵용감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그녀의 코끝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게 바로 인연이 아니겠소. 합례를 치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신혼 초야는 치른 셈이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