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예왕의 말은 더욱더 백천범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서 태비는 바들바들 떨며 백천범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네, 네 이 년, 참으로 여우가 따로 없구나. 이러고도 감이를 볼 낯이 있겠느냐?”
앙칼지게 소리친 서 태비가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상, 이 일은 황상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부디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여인을 폐위하여 주십시오!”
황제가 급히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
“태비 마마, 일어나서 말씀하십시오. 어찌 제게 무릎을 꿇으십니까.”
서 태비는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흐느꼈다.
“이리 들켰기에 망정이지 보는 눈이 없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감이는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어요. 감이가 저런 애에게 화를 입을 순 없는 법입니다. 황상, 부디 명을 내려 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백 귀비가 크게 혀를 찼다.
“한 번도 아니고 중추절에 이어 두 번째라니. 천범 동생, 어찌 이리 비웃음 살 짓만 한답니까!”
죄를 뒤집어쓴 경험이 많았던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하면 할수록 그녀의 입장만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백천범은 묵용감에게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황제가 겨우 서 태비를 일으켜 다정하게 위로했다.
“오늘은 태비 마마의 탄일입니다. 부디 몸이 상하는 일은 없게 하십시오. 이 일은 셋째가 오면 결정하도록 합시다.”
서 태비가 고개를 저으며 애달픈 표정을 보였다.
“그간 아무리 소문이 떠돌아도 애가는 믿지 않았습니다. 한데 두 눈으로 확인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여운 우리 감이, 아무것도 모르고……. 감이는 속이 무른 아이라 책벌을 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황상은 그 애의 형이니 부디 대신 처리해 주세요. 이 화근을 없애 감이가 평안히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황상.”
예왕은 냉소를 머금었다. 어쨌든 이런 일로 자신의 목이 날아가진 않는다. 일이 커지면 명예가 더럽혀질 일이지만, 어차피 그는 더럽혀질 명예도 없었다.
“태비 마마, 폐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하하, 세 번째가 없으리라고 장담하긴 힘들겠습니다. 폐하께서 명만 내려 주신다면 바로 혼인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되면 묵용감은 왕비를 숙모라 불러야 할 테지요.”
“황상, 보십시오.”
화를 이기지 못한 서 태비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말이나 됩니까?”
예왕의 말에 황제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짐이 명을 내리면 혼사를 치르겠단 말인가?”
예왕이 고개를 들더니 힘껏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그리하면 짐도 앞으로 초왕비를 숙모라 불러야 하고?”
예왕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이미 성이 난 황제를 더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 그가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분명 겁에 질려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백천범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억울해하기는커녕 화도 나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이 기이했던 예왕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귀염둥이가 어찌 아무 말도 없을까?”
백천범이 시선을 올려 그를 노려보았다.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입니까! 늙은 호랑말코 같으니……!”
면전에서 욕을 들었음에도 예왕은 오히려 활짝 웃었다.
“좋구나, 좋아. 본왕은 이런 화끈한 성격이 좋더군!”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백 귀비에게 화살을 돌렸다.
“귀비는 어딜 다녀오는 것이오, 황후는 보지 못하였소?”
백 귀비는 조금 주저하며 현비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찌 아무 대답도 않는 것이오?”
현비가 난처한 미소를 보였다.
“폐하, 신첩과 귀비 마마가 정확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황후 마마로 보이는 분이 석가산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구와?”
현비가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꼭 초왕야 같았습니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석가산에 있단 말에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뒤를 따랐다.
남아 있던 이들도 서로 눈치만 보다 함께 석가산으로 향했다.
석가산은 장합전의 서북쪽에 있는데, 마침 대나무 숲과 길이 이어져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백천범은 자신이 이곳의 지리에 익숙지 않음을 깨닫고 천천히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황제가 앞장서 서쪽으로 향했다. 백천범이 다시 황제의 뒤를 따랐다. 눈이 흩날리며 희미한 빛을 뿌리는 밤인지라 등불이 없어도 길을 걷는 데 그리 불편함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와 백천범은 석가산에 도착했다. 역시나 황후와 묵용감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묵용감이 황후의 어깨를 감싸 쥔 채…….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초왕비는 대나무 숲에서 예왕과, 초왕은 석가산에서 황후와 밀회를 가진다? 낮에만 해도 애정을 자랑하던 두 부부가 날이 어두워지니 사이가 뒤틀려 보였다.
묵용감을 발견한 백천범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소리쳤다.
“왕야!”
뒤를 돌아본 묵용감은 속을 알 수 없는 황제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뗐다.
“폐하, 황수께서 몸이 불편하십니다. 어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로 황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황제가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황후, 어디가 불편한 것이오?”
황후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폐하. 신첩의 지병이지 않습니까. 돌아가서 잠시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황후의 상태를 본 황제는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그는 때마침 도착한 태비에게 예를 갖추고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올렸다.
황제에게 다시 명을 내려 달라 청할 계획이었던 서 태비는 돌아가겠다는 말을 듣자 초조해졌다.
“황상, 방금 이 일은 황상께서…….”
황제가 묵용감을 돌아보았다.
“셋째의 집안일이니 짐은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에게 직접 해결하라 하십시오.”
말을 마친 황제는 황후를 부축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상황을 알 리 없던 묵용감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떠들었던 서 태비였지만 어쩐지 묵용감의 면전에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황제와는 성격이 딴판이다. 황제는 늘 온화하고 끈기 있게 상대방의 말을 들어 주었지만, 묵용감의 성격이 급하고 검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조금의 거짓이라도 알아차리면 꼭 자신의 가슴을 찌를 듯한 불길함이 일었다.
그녀는 속상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돌렸다.
“대단한 네 처에게 물어보려무나. 애가는 도무지 부끄러워 입을 열 수가 없다.”
황제가 있었다면 백 귀비도 거들었을 테지만 그녀는 묵용감 앞에서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그와 부딪히면 화를 일으킬 뿐이었다. 백 귀비가 옆에 있던 현비를 몰래 꼬집었다. 그러자 현비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것이, 조금 전 대나무 숲에서 왕비와 예왕야가 담소를 나누는 걸 보신 것…….”
묵용감이 손을 들어 올려 현비의 말을 막았다.
“잠시. 누구라고 하였습니까, 현비 마마? 예왕이라 하였습니까?”
“예, 예왕이라 하였습니다.”
묵용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 자식이 또 왕비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이오?”
서 태비가 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애가가 본 것은 왕비가 예왕의 품에 뛰어든 모습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백천범이 손을 꼼지락대다 웅얼거렸다.
“왕야인 줄 알았어요.”
묵용감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지아비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오? 그러고도 어찌 아내라 할 수 있소?”
이때다 싶었던 서 태비가 계속해서 부추겼다.
“착각? 들켰을 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더니 왕야의 앞에서는 말도 잘하는구나.”
백천범이 묵용감의 소매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품에 안긴 게 아니라 팔만 감쌌을 뿐이에요……. 왕야, 절 못 믿으세요?”
물론, 그는 그녀를 믿었다. 가끔 능구렁이처럼 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절대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예왕이 왕비를 어찌하였소?”
“저를… 껴안았어요.”
백천범은 거짓 없이 털어놓았다.
“그 뒤에 바로 태비 마마와 황제 폐하, 두 마마께서 오셨어요.”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묵용감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찮은 농간으로 그의 눈을 가릴 수는 없건만, 태비는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 이리 갑작스럽게 마음을 쓰기 시작했을까?
서 태비는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입을 열었다.
“감아, 애가가 왕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왕비가 너무나 부도덕한 탓이다. 예왕과 두 번이나 밀회를 갖다니! 듣자 하니 외간 남자를 만나겠다고 오밤중에 저택을 나섰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궁 안에만 머무는 서 태비가 어찌 이런 사실까지 알까. 미리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묵용감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지만 표정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백천범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제 아내는 제가 잘 압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태비 마마의 탄일이니 언짢은 일은 되도록 피하시고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지요.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왕비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현비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왕야, 벌써 궁 문이 닫혔습니다. 내일 가시지요.”
이곳에선 분명 편히 잠들 수 없을 터였다. 묵용감은 현비와 백귀 비의 얼굴을 천천히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본왕이 궁을 나서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겠다는 그의 말에 서 태비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거의 다 된 일이건만, 이렇게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백천범을 붙잡았다. 백천범을 향하던 혐오스러운 눈빛이 어느새 자애로운 빛을 띠었다.
“왕비, 당분간 애가와 지내겠다고 하질 않았나? 며칠이나 되었다고 가려고 하는 겐가?”
백천범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비 마마, 어찌 저를 남겨두려 하시는 것입니까? 절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저를 보실 때마다 화가 나실 텐데요?”
“…….”
이리 직설적으로 말하니 어찌 응수할까. 서 태비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마… 다 오해일 테지.”
서 태비가 백 귀비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백 귀비가 살포시 웃으며 나섰다.
“그래도 남아 있는 게 좋겠습니다. 태비께서 왕비를 이렇게나 아껴주시질 않습니까? 아끼는 마음이 클수록 감정도 크게 사무치는 법이지요. 예왕야 때문에 화가 나시긴 했지만 예왕야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들 잘 아는걸요. 그저 오해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