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서 태비도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묵용감을 더 설득하려 해 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그는 가족이라고 넘어가는 법이 없으니,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수십 년간 황궁에서 내공을 쌓은 태비인지라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됐네. 이 일은 두 번 다시 꺼내지 않도록 하겠네. 연회 상이 다 차려진 듯하니 황상과 황후는 어서 자리에 드시게.”
황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오늘은 태비 마마께서 가장 어른이십니다. 짐은 아랫사람이니 태비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황후도 서 태비의 다른 쪽 팔을 부축했다. 그녀의 체면이 그나마 회복되는 듯했다. 황제와 황후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으로 향하다니, 이보다 영예로운 일은 없었다.
백천범은 모두 떠날 때까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막 발걸음을 내디디려는데 묵용감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속삭였다.
“어째서 내가 서왕비를 들이길 원치 않는다고 하였소?”
백천범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는 대체 첩을 들이고 싶으신 거예요? 들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내가 들이고 싶다 하면, 동의할 것이오?”
까닭 없이 억울한 마음이 들어, 백천범은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뜯겨 피가 새어 나왔다. 비릿한 맛에 그녀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묵용감은 깊은 눈망울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말해 주시오. 내가 첩을 들이면 기쁠 것 같소?”
백천범이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에 물안개가 묻어났다.
흠칫 놀란 묵용감이 급히 그녀를 안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 필요 없소. 다 아오. 그대의 마음이 어떠한지 아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목이 메었다. 그간 혼자서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그녀가 드디어 연정에 눈을 떠 준 것이다!
주위의 궁녀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는 숨이 멎을 듯했다. 바보같이, 그녀는 입술에 상처를 낼 정도로 고민했단 말인가. 그는 정말… 이 순간을 아무리 기뻐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가장 뒤에서 방을 나서던 중,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숙비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대낮부터 저리 입을 맞춘단 말인가? 그녀가 조심스레 덕비와 현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두 황비도 뒤를 돌아보았다. 외향적인 성격의 덕비는 두 사람을 보고 즐거운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앞서가던 황후가 웃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길래 아우님이 그리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덕비는 그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두 사람을 바라본 황후가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이참, 셋째는 장소도 가리지 않고.”
결국 황제와 서 태비까지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서 태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속으로는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계획이 남아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간 연회를 치르고 싶은 마음까지 죄다 사라질 뻔했다.
오찬에는 간단히 연회석 하나만 준비되었다. 중요한 행사는 저녁에 치를 예정이었다. 저녁에는 각 궁의 상전들이 모두 참석하니, 네 개 이상의 연회석을 준비해야 했다. 극단도 초청해 정원의 무대에서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후궁에는 공연을 위한 전용 무대가 따로 있었는데, 장합전과 그리 멀지 않았다. 담장을 따라 걸어도 무대가 나왔지만, 자그마한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도 금방이었다. 문 앞에 놓인 작은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가는 방법도 있었다.
무대는 일반적인 생김새와 달리, 커다란 빨간 기둥이 평평한 지붕을 받치고 아래쪽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구조였다.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 여름에는 시원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두꺼운 솜이불로 꼼꼼하게 발을 두르고 네 모퉁이에 화로를 놓아 따뜻하게 공연을 관람했다. 지금은 다들 손화로를 들고 있는 데다 인파의 열기까지 더해져 그리 춥지 않았다.
연회석에서 과실주를 몇 잔 마신 백천범은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속에서 열기가 느껴지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묵용감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그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낮에 있었던 일로 그녀는 한참이 지나도 들뜬 마음을 쉬이 가라앉힐 수 없었다.
입을 맞추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낯설고도 달콤한 맛이 떠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절대 느끼게 해 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그녀는 그의 지아비가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는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자 잠시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유엽이 얼른 물었다.
“왕비 마마,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왕야께서는?”
유엽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이곳에 계셨는데, 어째서 안 보이시지? 소인이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야.”
백천범이 손을 저었다.
“내가 찾아볼게. 어차피 바람 좀 쐬려고 했거든. 여기는 너무 답답해서.”
유엽이 그녀에게 외투를 입혀 주었다.
“소인이 등불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밖에도 등이 켜져 있으니까 나오지 마. 날씨도 쌀쌀하니까. 잠깐만 있다 들어올 거야.”
며칠간 백천범의 시중을 들었던 유엽은 그녀의 성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유엽은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마침 재미난 공연이 한창인지라 내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입구에 계시다 들어오십시오.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곧장 소인을 불러 주십시오.”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인 뒤 외투를 여몄다. 무대에서는 경극 분장을 한 남녀 배우가 시끌벅적하게 노래를 하고 있었다. 객석에서 배우들을 향해 끊임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대를 보느라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잽싸게 빠져나왔다.
그녀는 오늘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래가 너무 늘어지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자고로 공연이란 무사 분장을 한 배우가 멋들어지게 공중회전을 하며 긴 창을 휘둘러야 제맛이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첫눈이 늦은 데다 횟수도 적어 올겨울 들어서도 겨우 세 번째로 보는 눈이었다. 보아하니 하늘도 서 태비를 굽어살펴 탄일에 눈을 내려 주는 것 같았다. 길한 눈은 풍년을 부른다던데, 정말로 좋은 징조였다.
손화로가 없는 그녀는 발을 구르고 손을 비비며 밖으로 향했다. 손을 내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꽃을 만지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가 금세 녹아 내렸다. 언제 보아도 참 신기한 장면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까치발을 들고 장합전 쪽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궁전은 꼭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들짐승 같았다. 그녀는 묵용감이 전각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합전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올 때 돌다리를 건너온 터라 돌아갈 땐 대나무 숲을 지나가 보고 싶었다. 곳곳에 등불이 놓여 있어 주변이 그리 어둡진 않았다. 눈이 흩날리는 날씨에 대나무 숲을 지니는 일도 제법 운치가 있을 터였다.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묵용감과 함께 거닐었다면 더 즐거웠을 텐데.
그녀는 곧장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커다란 연등이 입구 기둥에 걸려 있었다. 밝은 빛 아래에서 눈꽃을 바라보니 꼭 자그마한 잎이 춤을 추듯 휘날리는 듯했다. 눈꽃은 천천히 그녀의 머리에, 두 볼에, 어깨 위에 떨어졌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 안쪽은 바깥보다 조금 어두웠다. 그래도 열 걸음만 걸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출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맞은편 출구에 도착하니 누군가 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혹 저 사람이 묵용감은 아닐까. 그녀의 마음이 다시금 부풀어 올랐다. 백천범은 기쁜 마음으로 뛰어가 그의 팔을 감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셨던 거예요, 한참 찾았잖아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짙은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그는 살짝 웃는 듯했다. 그가 팔을 빼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여기서 계속 그대를 기다렸지.”
백천범은 화들짝 놀랐다. 묵용감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느 겁없는 자가 그녀에게 무례하게 군단 말인가!
그때, 길 양쪽에서 등불의 빛이 어른거리며 빠르게 번져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길 한가운데에서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며 버둥거렸다.
“대체 누구시오. 어서 풀어 주시오. 소리를 지르겠소!”
“에이, 뭘 그리 겁내시나.”
그 사내는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처음 들킨 사이도 아닌데.”
백천범은 흠칫 놀랐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목소리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다름 아닌 예왕이었다. 처음이 아니라며 뻔뻔하게 떠드는 걸 보면 그자가 분명했다.
대나무 숲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에서 걸어오던 이들이 금세 두 사람 앞에 다가왔다. 무대 쪽에서 걸어오던 이는 서 태비와 황제였고, 반대쪽에서 걸어온 사람은 백 귀비와 현비였다.
서 태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부릅뜨더니 곧 온몸을 덜덜 떨었다.
“황상, 보셨습니까. 외도를 하는 며느리라니요, 애가는 살 수가 없어요!”
황제가 굳은 얼굴로 예왕을 응시했다.
“작은 황숙, 아직도 손을 놓지 않다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그제야 손을 놓은 예왕이 입꼬리를 올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했다.
“폐하와 태비께서는 공연도 보시지 않고 어찌 나와 계신단 말입니까?”
서 태비가 기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황상께서는 그래도 황숙이라며 예를 갖춰 주시지만 애가는 선황의 황비입니다. 예왕야의 황수란 말입니다. 대체 예왕야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조카며느리를 꾀어내고 있었단 말입니까?”
“내가 꾀어낸 것이 아니라.”
예왕이 백천범을 흘겨보다 태연하게 말했다.
“초왕비가 먼저 본왕의 품에 뛰어들었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백천범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백천범이 먼저 그의 팔을 감싸쥐었으니.
“대체 무슨 일이더냐?”
황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천범의 얼굴을 훑었다.
“초왕비가 말해 보게.”
“그것이…….”
백천범이 주저하며 웅얼거렸다.
“저는 저분이 왕야이신 줄 알고…….”
“우리 조카며느리가 하는 말을 누가 믿을까?”
예왕이 코웃음을 쳤다.
“어렵사리 만났는데 이리 난장판이 되다니. 그래도 걱정 말거라. 묵용감이 그대를 폐위할 테니 더 잘된 일이지. 그때 본왕에게 시집을 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