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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38)화 (237/1,192)

제238화

바삐 일하던 하인들은 그제야 주변을 알짱거리던 사람이 왕비임을 알아차렸다.

다들 처음 보는 사람인 데다 하인 옷차림은 아닌지라 서 태비의 궁 밖 친척이 도와주러 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양득광이 왕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초왕비가 틀림없었다. 군신 초왕의 살기 어린 얼굴이 떠올린 하인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난감했던 백천범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사소한 일이니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왕비를 발견한 이상 양득광은 그녀가 다시 부엌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그는 서둘러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공손히 요청했다.

“왕비 마마, 부디 다시는 부엌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태비 마마나 왕야께서 아시면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백천범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겁낼 것 없어요. 그리 심각한 일도 아닌걸요.”

그녀의 말에도 양득광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백천범이 서둘러 그를 일으켰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안 들어갈게요. 왕야와 태비 마마께도 말씀 안 드릴 테니 마음 놓으세요.”

부엌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니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백천범은 양득광과 시답잖은 말이나 조금 주고받고서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각에 돌아온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황제, 황후, 백 귀비를 비롯하여 처음 보는 몇몇 부인들이 앉아 있었다. 다급히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고정됐다, 묵용감이었다. 그가 드디어 온 것이다.

기쁜 마음에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공 마마가 헛기침으로 그녀를 일깨웠다. 그제야 규율을 떠올린 그녀는 먼저 황후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리고 안부를 물은 뒤, 백 귀비와 비빈들에게 순서대로 인사를 올렸다.

공 마마가 비빈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각각 광현궁廣賢宮의 덕비德妃, 소양궁昭陽宮의 현비賢妃, 원숙궁元淑宮의 숙비淑妃였다.

 황비와 황후가 있는 걸 보니 궁에서 품계가 가장 높은 이들이 모두 모인 듯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옷차림에 휘황찬란한 장신구를 둘러 고귀한 자태를 뽐냈다. 그들 앞에 서 있자니 백천범은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서 태비가 상냥한 말투로 그녀를 불렀다.

“왕비는 애가 옆에 와서 앉게.”

서 태비의 체면을 깎을 수 없었기에, 백천범은 조용히 그녀 곁에 앉았다.

지켜보던 황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가장 귀여운 며느리인지라 태비께서 남달리 아껴 주십니다.”

“당연한 일이라네.”

서 태비가 자애로운 웃음을 보였다.

“왕비가 아직 어리니 자연스레 마음이 더 간다네. 부디 마음 쓰지 말게.”

그때 백 귀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거들었다.

“천범 동생은 복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시어머니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백천범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남몰래 번득였다.

“태비께서 이렇게 아껴 주시니 천범 동생도 하루빨리 대를 잇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백천범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하, 저는 아직 어려서 그리 서두르면 안 될 것입니다.”

백 귀비가 조소를 교묘히 섞으며 받아쳤다.

“그렇지요. 아직 어린 데다 몸도 다 자라지 않았으니까요. 한 해 반 정도는 지나야겠습니다. 그래도 왕비 두 분이 더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때 그녀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 제가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떠났으니 저택에는 한 분뿐이군요.”

서 태비는 서둘러 묵용감의 안색을 살폈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차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애가도 그 일이 걱정이라네. 하여 올해가 가기 전, 그 자리를 메워 주는 게 어떨지 생각하던 참이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덕비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태비께서 미리 점찍어 놓은 분이 있으신지요?”

서 태비가 다시 묵용감의 안색을 살폈다. 묵용감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문벌이나 용모는 따지지 않고, 그저 왕야가 좋아할 사람으로 골라 보았네. 안 그래도 애가가 잠시 데리고 있는데, 왕비도 자매라 여기며 아주 좋아한다네. 그리 사이가 좋으니, 저택에 들어가서도 잘 지낼 걸세.”

떠들썩한 일을 가장 좋아하는 덕비가 얼른 청했다.

“이리 모인 김에 모두에게 소개를 해 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서로 얼굴도 익히고 좋지 않겠습니까?”

서 태비는 줄곧 묵용감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을 감춘 채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그가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서 태비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는 그 역시 이 혼사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닌가?

잠시 후 풍여영이 나타나자 다들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초왕비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아이가 아닌가. 자그마한 몸집에 작은 얼굴과 큰 눈, 다른 이를 쳐다볼 때 짓는 어벙한 표정까지 백천범과 꼭 닮아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초왕이 좋아할 사람으로 골랐다는 서 태비의 말을 이해했다. 풍여영은 왕비와 유사한 분위기를 가졌으니 분명 초왕도 그녀를 좋아할 터였다.

시선이 다시 백천범에게 쏠렸다. 초왕과 초왕비의 사이가 그렇게 좋다던데, 시집도 오지 않은 서왕비가 눈앞에 있으니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백천범은 넋이 나간 듯하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먼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벌써 이런 말이 오갔으니 조만간 날을 잡고 혼사를 치를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서 태비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 다들 왕비를 보고 있네.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말해 주시게.”

백천범이 황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진 않으리라 생각한 서 태비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백천범은 무의식적으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방에 들어온 후 그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저리 여유롭게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원치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모두의 시선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뀌었다.

백천범도 멍해지긴 마찬가지였다. 원치 않는다니, 자신은 이 일에 이미 동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묵용감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묵용감에게 솔직했다.

그녀는 묵용감이 풍여영과 혼인을 하는 게 싫었다. 풍여영이 그녀와 닮았든 닮지 않았든 다 싫었다.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만큼, 싫었다.

묵용감도 분명 화가 났을 텐데, 큰일이었다. 겁에 질린 그녀가 시선을 위로 옮겼다. 어느새 묵용감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어쩐지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묵용감의 심기가 나쁘지 않아 보여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서 태비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괜찮다던 백천범이 이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가장 괴로웠던 사람은 풍여영이었다. 이목이 쏠린 가운데 초왕비에게 거부를 당했으니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제와 황후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흐느끼며 뒷문으로 뛰쳐나갔다.

풍여영이 자리를 뜨자 그제야 긴장된 공기가 조금 풀렸다. 황후가 애써 웃으며 수습에 나섰다.

“초왕비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왕비가 원치 않는다고 하니, 이 일은 천천히 고민해 보시지요.”

단 한 사람만이 솟구치는 기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묵용감이었다. 그는 백천범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어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혼사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기 전에는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원치 않았다. 그가 첩을 들이길 원치 않았다!

그는 속으로 긴긴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이 단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나 큰 반전에 그는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마구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가장 기분이 나빠진 사람은 물론 서 태비였다. 얼굴이 온통 새빨개진 그녀는 아무리 화를 가라앉히려 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감히 남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리다니, 이리도 가증스러울 수가!

곁눈질로 서 태비를 본 백천범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서 태비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야 할 것 같았다.

“태비 마마, 저는…….”

“왕비는 지금 애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는 겐가?”

서 태비는 서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어젯밤에 물어봤을 땐 좋다고 하더니, 애가의 앞에서 말을 번복하는 겐가? 여영이는 무슨 낯으로 살라고?”

“그게, 저는, 저는…….”

겁에 질려 뒷걸음치던 백천범이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다. 그녀는 금세 품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넓은 그의 품이 그녀 뒤를 지켜 주자 그것만으로도 큰 의지가 되었다.

“태비 마마,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자연스럽게 책임을 떠넘겼다.

“왕야께서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왕야께서 동의하시면 저도 동의합니다.”

묵용감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정말 능구렁이 같은 부인이었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그에게 떠넘기다니.

그는 백천범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겨 손을 꽉 붙잡았다.

“왕비는 본왕의 생각이 묻고 싶은가 봅니다. 적절한 사람을 구한 김에 저택에 들이는 것도 과한 일은 아니지요…….”

백천범은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는 정말 풍여영이 마음에 들었단 말인가…….

반면 다시 희망이 생긴 서 태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묵용감이 말머리를 틀었다.

“다만 안채의 일은 안주인인 왕비가 결정해야 하는 법이지요. 왕비의 생각이 곧 본왕의 생각입니다. 왕비가 동의하지 않으니 이 일은 그만두겠습니다.”

초왕이 못을 박으니 의논할 여지도 없었다.

황제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풍여영은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 아닌지라 그가 직접 나설 일이 아니었다. 황제가 침묵을 지키자 황후 역시 조용히 상황을 보고만 있었다. 네 황비도 그녀를 따라 차만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 귀비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비 마마께서 고심하신 일인데 물거품이 되었군요. 동생이 아직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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