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밤이 깊었는데 어찌 잠을 청하지 않는 겐가?”
백천범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첩, 이제 막 곁채에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태비 마마께서는 어찌 침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애가는 본래 늦게 자는 편이라네. 곧 자야지.”
그녀가 백천범을 유심히 바라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왕야를 기다리는가 보군. 기다리지 말게나. 오늘은 이곳에 오지 않을 걸세. 왕야와 여영이 모두 잠들었으니 왕비도 그만 잠을 청하시게.”
역시나 두 사람은 이미 침소에 든 뒤였다. 맥이 풀린 백천범은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예를 갖춘 후 뒤쪽 곁채로 향했다. 가는 길이 유난히 어두웠다.
* * *
이튿날은 서 태비의 탄일이었다.
백천범은 묵용감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편전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서 태비의 부름을 받았다. 곧 궁 안의 여러 상전들이 선물을 보내올 테니 옆에서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백천범은 서 태비의 정식 며느리였으니 이런 일이 있을 땐 마땅히 서 태비의 옆을 지켜야 했다. 또 선물을 가져오느라 고생한 하인들에게 보상을 주는 것도 도와야 했다.
정전에 도착하자 궁녀들이 아침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맛있는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올라왔다. 백천범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이나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오늘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공 마마가 조용히 옆에 섰다. 손에는 영락없이 기다란 목판을 쥐고 있었다. 백천범은 그녀를 보자마자 겁에 질렸다.
눈치를 보다 겨우 손을 뻗어 찐빵을 집으려는데 찰싹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 마마는 옷 안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지 늘 같은 자리만 내리쳤다. 어깨가 너무 아픈 나머지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왕비께서는 젓가락 쓰시는 법부터 배우셔야겠습니다. 왕비께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야만인이 아니십니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하얀 상아 젓가락으로 찐빵을 집었다. 젓가락은 무겁고 미끄러워 좀처럼 힘이 실리지를 않았다. 결국 찐빵 피가 찢어지며 진홍색 설탕 소가 흘러나왔다. 접시에 떨어진 소가 마치 피처럼 보였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생일에 붉은색 국물을 보이는 것은 금기였다. 붉게 물들고 있는 백천범의 그릇을 알아차린 서 태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백천범이 멋쩍게 웃으며 하얀 손으로 찐빵을 들어 재빨리 입에 쑤셔 넣었다. 그릇에 묻어 있던 붉은 소가 조용히 흔적을 감추었다.
하인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공 마마가 목판을 들어 호되게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다.
“왕비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니십니다. 거듭 이러시면 웃음거리가 되실 겁니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아야,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통을 참기가 어려웠다.
공 마마가 또다시 목판을 내리쳤다.
“존귀한 왕비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함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분노와 기쁨 모두 제어할 줄 아셔야 합니다.”
백천범은 어깨를 감싸 쥐고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공 마마가 한번 목판을 휘두를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맞는 말만 했기 때문에 뭐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젓가락을 써야 하는 음식 대신 죽을 떠먹었다. 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공 마마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멈추고 공 마마가 그릇을 가져가는 모습만 빤히 바라봐야 했다.
정말이지 심각한 낭비였다. 맛있는 음식이 이렇게나 많은데, 손도 대지 않고 전부 치워 버리다니. 드디어 배부르게 먹을 줄 알았던 백천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을 치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 궁의 주인들이 하나둘 선물을 보내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선물은 봉명궁의 백수도百壽圖(여러 자체字體의 ‘수壽’ 자로 큰 ‘수’자를 만든 것으로 주로 축하용으로 쓰임)였다.
월백색의 천 위에 금색 실로 백 개의 ‘목숨 수’자를 수놓았는데, 단 한 글자도 모양이 겹치지 않았다. 자수 실력도 정교하거니와 글자도 아름다웠다. 듣자니 황후가 직접 수를 놓았다는데 거의 한 달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백수도를 바라보던 서 태비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내뱉었다. 선물을 가져온 소태감에게는 금괴 한 주머니를 상으로 내렸다. 그녀는 황후의 몸이 편치 않음에도 선물을 준비한 효심과 정성에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소태감이 떠나자 서 태비는 선물을 치우라고 분부한 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뒤이어 백 귀비의 선물이 도착했다. 어른 키의 절반쯤 되는 아왜나무였다. 백천범은 이렇게 예쁜 아왜나무를 난생 처음 보았다. 붉게 빛나는 가지와 반들반들한 잎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녀가 처음 세상 구경을 하는 시골 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서 태비는 환하게 웃으며 이번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이 나는 나뭇잎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그녀는 백 귀비의 소태감에게도 금괴 한 주머니를 상으로 내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천범은 서 태비가 백 귀비의 아왜나무를 더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수도는 금세 치워졌지만, 아왜나무는 계속 대전에 두고 오랜 시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분명 마음에 들어 하는 정도가 달랐다.
다른 궁에서 보낸 선물 중 백 귀비의 선물보다 귀하거나 황후의 선물보다 정성이 들어간 물건은 없었다. 서 태비의 태도 또한 조금씩 달라졌고, 그녀가 내리는 상도 자연스레 차이가 났다.
선물을 가져온 하인들이 모두 떠나자 서 태비가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는 선물을 보고 깨달은 이치가 있는가?”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소첩은 아직 식견이 좁지만, 낮은 지위의 주인들은 황후와 귀비께서 준비한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을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닐까요?”
서 태비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왕비의 말이 맞네. 자연스러운 것이지. 선물을 보낼 때도 차례를 지켜야 하네. 황후와 귀비가 선물을 보낸 뒤에 다른 이들이 보내야 하는 게 도리지. 그들보다 먼저 보내서는 안 된다네.
사람은 위치에 따라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네.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했다간 다른 이들에게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지. 왕비도 이 이치를 말하고자 한 게 아닌가?”
백천범은 연거푸 그렇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선물을 줄 때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성의를 보이면 되는데 무엇 하러 계급을 나누고 차례까지 따져야 한단 말인가?
예전에 그녀가 실이 덕지덕지 뭉친 주머니를 선물했을 때도 초왕은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궁 안은 정말 성가신 일투성이였다. 뭐든 규율을 따지고, 다른 이의 억압을 견뎌야 했다.
황제에게 시집을 오는 일이 옥살이보다도 비참한 것은 아닌가. 그녀는 초왕에게 시집을 갔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잘 먹고 잘 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초왕의 총애까지 받았다. 초왕은 늘 진심을 다해 그녀를 돌봐 주었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를 떠올리자, 백천범은 묵용감이 조금 보고 싶었다. 어제는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은 태비의 탄일이니 분명 볼 수 있을 터였다. 백천범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먼저 다가가 화해하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얌전히 말도 잘 듣고, 심기는 더더욱 건드리지 않기로 거듭 마음먹었다.
만약 풍여영을 좋아하게 된 그가 더는 자신을 원치 않는다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초왕은 싫증을 잘 내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초왕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서 태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혼자 무엇을 그리 중얼거리는 겐가. 곧 연회를 열어야 하는데 음식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부엌에 가 보는 게 어떤가?”
백천범은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어머니의 탄일인 만큼 며느리로서 본분을 다해야 했다. 그녀는 서 태비의 분부를 따라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서 태비의 음식을 담당하는 부엌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열기를 내뿜으며 음식 준비로 분주하게 돌아가는 부엌 안에서 누군가 크게 외쳤다.
“다들 더 잽싸게 움직이라고! 오늘은 태비 마마의 탄일이니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그는 부엌 관리인 양득광楊得廣이었다. 온종일 열과 성을 다해 굽실거려서인지 그의 등은 가만히 서 있는 지금도 한껏 굽어 있었다.
백천범을 발견한 양득광이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다가왔다.
“아이고, 왕비 마마께서 이곳은 어쩐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잘못하면 냄새가 다 밸 텐데요.”
그녀는 과하게 예를 갖추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덩달아 몸을 살짝 굽힌 백천범이 조용히 물었다.
“태비 마마께서 한번 와 보라고 하셔서요.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소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축하연을 그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빠르게 부엌 안을 살핀 백천범이 손바닥을 비볐다.
“양 관리인, 혹 제가 도울 일은 없는지요?”
“아이고, 어찌 왕비 마마께 도움을 요청하겠습니까.”
양득광이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이곳에서 쉬고 계십시오. 소인이 금방 차를 내올 테니 드시고 가시지요.”
백천범은 어렵사리 공 마마의 시야를 벗어난 만큼 서둘러 돌아가기는 싫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볼일 보십시오. 잠시 살펴보다 돌아갈게요.”
마침 누군가 양득광에게 질문을 한 덕분에 백천범은 슬쩍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나 부엌 내부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커다란 솥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솥 안에서는 각종 재료가 연기를 내며 익고 있었다. 한쪽에는 찜통이 잔뜩 놓여 있었는데, 찜통에서 올라오는 희뿌연 수증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백천범은 열기가 넘치는 부엌의 냄새가 좋았다. 이곳에 오니 드디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연회에는 황제도 참석할 예정이라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되었다. 다들 자신의 일에 집중한 데다 연기로 뒤덮인 곳이라 자그마한 백천범을 알아보지 못했다. 덕분에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백천범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할 만한 일을 찾아보았다. 백 승상의 저택에 있을 때는 밤마다 직접 찐빵을 쪄 먹었고, 초왕의 저택에서도 기홍을 돕기도 했으니 부엌일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땔감을 더하고 접시와 요리를 나르다 보니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차를 내오던 양득광은 백천범이 보이지 않으니 부엌으로 들어왔다. 하인들을 감시하느라 빛나는 그의 눈에 열심히 일하는 백천범이 보였다. 그가 기절할 듯이 놀라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왕비 마마. 어찌 이런 일에 손을 대십니까?”
그가 하인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어떤 놈이 감히 왕비께 일을 시켰단 말이냐? 더는 살고 싶지 않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