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이번엔 묵용감이 질문했다.
“황수께서는 어디에 가시는 길이십니까?”
“태의가 매일 아침 정원을 산책하라더군요.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 도움이 된다면서요. 폐하께서도 함께하시기로 했습니다. 셋째도 가시겠습니까?”
묵용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아우가 폐하와 황수 사이에 눈치 없이 있으면 미움을 사지 않겠습니까?”
황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꾸짖었다.
“초왕비에게 배운 것인지 셋째도 점점 능글맞아지십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안개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기품 있는 걸음을 내디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나 했더니, 셋째였구나. 황후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것이냐?”
묵용감이 곧장 예를 갖췄다.
“안개가 짙어 앞이 잘 보이지 않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아우, 폐하와 황수의 산책을 방해하지 않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홀연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제가 의아해했다.
“어찌 짐을 보자마자 저리 간단 말이오?”
* * *
백천범은 또다시 불당에서 온종일 경전을 써야 했다. 다행히 그새 요령이 생겨 어제만큼 많이 맞지는 않았다. 다만 공 마마가 수문신처럼 옆을 지키고 서 있으니 경전을 쓰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어제 이후로 서 태비는 그녀에게 유독 더 잘해 주었다. 저녁을 먹은 후 서 태비가 성의만 보이면 된다며 그만 쓰라는 말을 전했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졌다. 유엽이 등불을 들고 그녀의 앞길을 비추었다.
전각에 들어서자 서 태비가 작은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금과 은으로 장식된 호갑투가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백천범을 바라보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그녀가 백천범에게 가까이 앉으라며 권하곤 하인들에게 백천범의 차를 준비해 오라 분부했다.
백천범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묵용감은 보이지 않았다. 두근거리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젯밤 두 사람은 말다툼 비슷한 걸 한 셈이다. 게다가 한 침대에서 등을 지고 누워 잠을 청했다. 토라진 아이들도 아니고, 돌이켜보면 퍽 우스운 일이다.
서 태비가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왕비는 누굴 찾는 겐가?”
백천범은 어물쩍 둘러댔다.
“여영 동생이 보이지 않아서요.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서 태비는 그녀의 대답이 다소 미심쩍었다. 어젯밤 두 사람이 함께 있었으니 분명 모두 알아차렸을 텐데. 게다가 아침 일찍 떠난 묵용감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니 그녀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풍여영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백천범이 축하한다는 말을 꺼낼 줄이야.
그녀는 백천범을 조금 떠보기로 했다.
“어젯밤 왕야와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닌가?”
찻잔을 들고 조심스레 입김을 불던 백천범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피곤하셨는지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제가 불당에 갈 때는 아직 왕야께서 일어나시기 전이었습니다.”
서 태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직 모든 게 밝혀지진 않았다. 역시 그녀는 묵용감을 제법 잘 꿰고 있었다. 별말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짢은 심기를 의미했다. 사내들은 체면이 중요한 법이다. 오해가 조금 남긴 했지만 이 또한 나쁘진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다시 불을 붙여 단번에 해결하면 그만이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왕비의 동생은 부끄러움이 많아 아무도 만나려 하질 않는다네.”
그녀가 주변을 물리고 영 씨만 옆에 남겨 놓았다.
“실은 규율에 맞지 않는 일이지. 혼사를 치르기도 전에 합방부터 했으니, 이 일을 어디에 말하겠나. 우리 왕야도 참 재미있는 아이지. 예전에는 여인을 그리 싫어하더니, 좋아하는 여인상이 따로 있는 것이었어. 앞으로 왕비와 여영이 같은 여인을 골라 주면 그 애의 눈에 들 수 있겠네.”
백천범은 어색한 웃음으로 답하고 시선을 떨군 채 차를 들이켰다.
옆에 서 있던 영 씨가 거들었다.
“마음 놓으십시오, 태비 마마. 새해가 되면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여영이가 어려 보이긴 해도 아주 건강하니 아이를 낳는 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영 씨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초왕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집안의 경사이니, 백천범도 기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일이 닥쳐오니 상상했던 것처럼 그리 기쁘진 않았다.
서 태비가 별안간 다리를 내리치며 기뻐했다.
“첫날밤에 아이가 생길 확률이 높은 법이지. 새해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영아, 어서 아기 옷과 신발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장수와 복을 비는 장신구들도…….”
영 씨가 웃으며 답했다.
“태비 마마, 그리 조급하실 것 없습니다. 우선은 아기 옷과 신발부터 마련해 두겠습니다. 또 유모도 구하고, 요람을 짜라고 분부하시면 얼추 될 듯싶습니다.”
두 사람이 어찌나 호들갑인지 아이가 당장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다. 백천범은 기이하리만치 마음이 무거웠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듣고 싶지 않은 마음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묵묵히 차만 들이켰다. 두세 번 들이켜니 어느새 찻잔이 바닥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궁녀가 조용히 다가와 차가 가득 담긴 새 잔으로 바꿔 주었다.
그녀는 찻잔을 손에 쥐고 입김을 불어 차를 식혔다. 따분하고 불편하기만 한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차만 계속 마시다 보니 금세 배가 빵빵해졌다. 결국 백천범은 궁녀를 불러 측간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자 서 태비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애는 애로구나. 저리 쉽게 속다니.”
그러나 영 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태비 마마, 왕비 마마는 그렇다 해도 왕야께서는…….”
서 태비는 웃음기를 거두고 잠시 고민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때그때 살피면서 진행해야지.”
* * *
묵용감은 몹시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 조회를 마친 뒤에는 관청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파견에서 돌아온 부하들의 업무 보고를 받았다. 그 후에는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갔다. 무관들의 술자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법이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묵용감은 초조해졌다. 서둘러 입궁하지 않으면 성문이 닫혀 들어가기 곤란했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들어갔다간 백천범이 첩을 들이라는 이야기를 꺼낼지도 몰랐다. 그 말을 들으면 그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혹여 폭발해서 누군가를 발로 걷어차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속앓이를 하던 그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몇몇 부하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그를 힐끔거렸다. 설마 초왕에게 무슨 걱정이라도 있단 말인가?
늠름한 우장군右將軍 이천행李天行은 넉살이 좋아 노여움을 사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 왕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까?”
묵용감은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가 자조하듯 답했다.
“그래, 자꾸 본왕의 심기를 건드리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부하들은 초왕조차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람은 황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감히 황실의 일을 물을 수는 없으니, 그저 농담으로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묵용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술잔을 툭툭 치며 탄식을 흘렸다.
“너희가 한번 말해 보거라. 여인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황제가 아니라 여인 때문이었다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부하들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잠시 뒤 부하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혼쭐을 내 주면 됩니다. 그리 하면 알아서 성질을 죽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초왕의 수심은 한층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윤이 나는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것도 안 된다. 손을 댈 수도 없어.”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손을 댈 수도 없다니. 부하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설마 지아비가 있는 여인이란 말인가? 이는 예왕의 취향이 아니던가. 어찌 초왕마저 그 뒤를 잇는단 말인가!
무관들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만 알았다. 용맹한 기병 장군 한통韓通이 탁자에 술잔을 내리치더니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왕야,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어느 집 부인입니까? 왕야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소인이 납치해서라도 저택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초왕이 눈을 치켜뜨며 날을 세웠다.
“내 부인을 어디로 납치한단 말이냐?”
부하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머쓱해진 한통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를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보아하니 초왕은 초왕비와 말다툼을 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초왕의 혼삿날, 혼례에 참석했던 부하들은 축하주만 마시고 군영으로 돌아갔다. 워낙 먼 거리를 오갔던 탓에 기억은 희미했지만, 신부가 초왕의 철천지원수인 백 승상의 딸이라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푸대접만 받고 얼마 못 갈 줄 알았더니만, 설마 왕비가 초왕의 애를 태우고 있을 줄이야. 명색이 군신이라는 초왕이 이토록 수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니 무척 낯설었다.
부하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초왕을 애태우는 초왕비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 * *
백천범은 불당에서 조금 일찍 돌아와 묵용감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말다툼을 하는 게 싫었다. 그가 화가 나면 그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묵용감이 왜 그리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첩을 얻고 싶어 하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좋으면 몇 명을 들여도 상관없었다. 저택에 이미 측왕비가 있기도 하고.
침소에 들 때까지도 묵용감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풍여영도 마찬가지였다. 백천범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설마 두 사람이 함께 있단 말인가? 서 태비의 말대로,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 지금쯤 꿈보다 더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묵용감이 풍여영에게도 서방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을까. 어쩌면 그녀를 그의 아래에 눕혔을지도…….
이미 합방을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다 보니 별안간 모든 게 우스워졌다. 두 사람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그녀 혼자 뭘 그리 고민한단 말인가?
그때, 서 태비가 방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