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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35)화 (234/1,192)

제235화

서 태비는 겁이 났지만 위엄 있는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녀는 묵용감에게 다가가 검을 빼앗으려 했다.

“궁에서 검을 쓰다니, 목이 날아가는 죄다. 네가 정녕 모르는 것이냐?”

묵용감이 불쾌하다는 듯 서 태비를 밀어냈다.

“태비 마마, 이 아들은 진심으로 효를 다하려 했는데, 이게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저를 음해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왕비를 음해하기 위함입니까? 내 왕비는 어디에 숨겨 두셨습니까?”

서 태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들은 한번 포악해지면 가족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의 손에서 검이 유난히 번득였다. 저 검을 휘두르면, 오늘 밤 그녀는 저승길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감아, 어서 검을 내려놓거라. 소문이라도 나면 어찌하려고 이러느냐. 황상께서는 너를 아껴 검을 차고 입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럴수록 검을 꺼내는 일이 없어야 하는 걸 모른단 말이냐?

여기서 피를 흘려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애가가 이렇게 부탁하마. 어서 집어넣거라. 그 후에 말로 하자꾸나.”

그제야 냉정함을 되찾은 묵용감이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왕비는 어디에 있습니까?”

“잠들었으니 괜히 찾아갈 것 없다.”

서 태비가 눈짓을 보내자 황유도는 서둘러 풍여영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남은 모자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가도 네가 화가 난 걸 안다. 그래도 애가만 탓해선 안 되는 일이다. 실은 왕비가…….”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이 왕비와 무슨 상관입니까?”

“왕비가 여영이와 인연이 깊다며, 그 애를 서왕비 자리에 앉히는 게 어떻겠냐고 묻더구나.”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마치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여영이도 왕비와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고. 저택에서 왕비와 함께 시중을 들 수 있다고 하니 그 애도 하고 싶다더구나.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인 거란다. 네가 쉽게 허락하지 않을 거라며 왕비가 애가에게 도움을 청했지.

애가는 여영이란 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단다. 왕비도 자유분방한데 그런 아이가 늘어나면 조용할 날이 있겠니? 감아, 그만 화 풀거라. 왕비는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란다. 얼른 네 대를 잇길 바라는 게지…….”

묵용감은 줄곧 서 태비가 일을 꾸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껏 백천범은 첩을 들이는 일에 적극적이었으니까. 예전 양려낭의 일만 봐도 그녀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서 태비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백천범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전 왕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잠들었다 하지 않았느냐. 아침 일찍 경전을 써야 하니, 괜히 깨우지…….”

“제 왕비가 어디 있냐고 여쭈었습니다.”

벨 듯한 시선이 서 태비에게 향했다. 서 태비는 묵용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신이 낳은 혈육이지만,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낙담한 채 조용히 말했다.

“뒤쪽 곁채에 있단다.”

* * *

종일 고생한 백천범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그러나 잠귀가 밝았던 탓에 금세 깨어나 버렸다. 문 앞에서 궁녀가 왕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발소리다. 그녀는 묵용감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곧장 먹먹한 괴로움이 밀려왔다. 어쨌든 오늘은 초왕의 첫날밤이다. 묵용감이 있어야 할 장소는 이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묵용감이 왜 여기로 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라면 그의 품을 파고들며 편한 자세를 찾았겠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온통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녀만의 자존심과 한계가 있었다.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얼굴에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모양이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마구 뛰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희미하게나마 불쾌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깨어 있는 것 알고 있소. 이제 그만 날 좀 봐 주시오.”

그녀는 괜스레 칭얼대며 돌아누웠다.

팔꿈치를 괴고 누워 있던 묵용감이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그대도 오늘 밤 일을 알고 있었소?”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묵용감의 눈에는 켕기는 게 있어 보였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자꾸 대답을 피하면, 오늘 밤 잠은 다 잔 걸로 아시오.”

백천범은 결국 등을 보인 채로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내었다.

“알고 있었어요.”

묵용감이 다시 물었다.

“그대도 동의한 일이오?”

백천범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좋은 일이잖아요. 제가 왜 반대하겠어요?”

역시나. 그녀였다. 묵용감은 차오르는 원망에 이를 꽉 깨물었다. 예전이었다면 그도 개의치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그의 마음을 다 밝혔는데도 어찌 진심을 이리 짓밟아 버리는가?

그는 이를 갈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인이 아니라 신을 떠받들어도 이리 괴롭지는 않을 터였다. 이렇게나 애지중지하는데 그녀는 그의 심장을 찢어 놓았다. 그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돌아누웠다. 결국 두 사람은 이불의 양 끝자락을 쥐고 서로를 등졌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천범은 날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등불이 꺼져 있어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녀는 눈을 뜬 채로 한참 동안 멍하니 누워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즈음, 그녀는 묵용감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깊고 뚜렷한 이목구비, 단정한 얼굴에서 고귀함까지 느껴졌다.

그는 그녀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사내였다. 사내들이 예쁜 여인을 좋아하듯 잘생긴 외모의 사내도 여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니 풍여영도 그와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수원상과 고청접을 떠올렸다. 두 사람도 초왕을 좋아했을 터. 그렇다면 그녀 자신은… 자신도 그를 좋아하고 있을까? 오라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내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지아비였으니 좋아하지 않는 것도 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해야만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는 그녀도 좋아하고, 풍여영도 좋아했다. 아마 그는 풍여영의 예쁘고 귀여운 모습에 반해 잠자리에 들었을 테지.

그녀는 오늘도 경전을 써야 하지만 두 사람은 온종일 함께할지도 모른다. 그는 풍여영을 데리고 두루미를 보러 갈 수도 있었다. 그 애에게 맛있는 음식을 덜어 주거나 손을 잡을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해 주는 것처럼, 그녀를 보는 것처럼 풍여영에게도 똑같이…….

백천범은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 풀을 한 국자 풀어놓은 것처럼 생각이 끈덕지게 이어지고 뒤엉켰다. 결국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하기를 단념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묵용감의 몸을 넘어갔다. 그녀는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옷을 입었다.

백천범은 깊게 잠들어 있던 그가 갑작스레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깥방에 있던 곡아와 유엽이 그녀의 인기척을 듣고 급히 옷시중을 들러 나왔다. 하지만 백천범이 혼자 옷을 갖춰 입은 후였다. 두 시녀가 그녀를 옆방으로 데려가 세안 시중을 들었다.

백천범은 떠났지만 장막 안에는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입꼬리만 살짝 올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첩을 들이도록 정말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풍여영에게 머리를 감는 세발제까지 같은 걸 쓰게 하다니.

똑같은 향기, 똑같이 마르고 작은 몸집이었지만, 품에 안았을 때의 느낌은 딴판이었다. 서로의 살을 맞대고 볼을 비비던 그 순간은 그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눈을 감았다 한들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향을 피우고 은탄까지 더하면 감쪽같이 성사시킬 수 있을 거라고 여기다니. 그런 식으로 그를 현혹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게 무엇보다 화가 났다. 합방을 하고 나면 엎질러진 물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 천방지축 같은 부인이 지아비에게 정말 못하는 짓이 없었다!

절로 냉소가 흘러나왔다.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다 한들, 그에게 달라질 건 없었다. 풍여영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참은 셈이었다. 감히 그 애를 자신의 저택에 밀어 넣으려 하다니. 어찌 형부 시랑 따위를 장인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진상이 어떻다 한들, 다른 이들은 상관없었다. 그의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는 사람은 백천범뿐이었다. 그가 신경 쓰는 사람도 오직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풍여영을 첩으로 들이라 한다면, 그는 풍여영의 목을 베어 단념시킬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복잡했던 그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창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인시쯤 되었을까. 그는 가만히 앉아 바깥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사방이 고요한 걸 보니 백천범은 이미 불당에 간 듯했다.

아직 시간이 일렀기 때문에 묵용감은 잠시 산책을 나섰다. 짙은 안개가 드리워 밖은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한 장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릿했지만 그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조차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때,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은 후궁이다. 비빈들과 마주쳐선 안 될 일이기에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우아하고 귀한 자태의 여인이 안개를 뚫고 나온 뒤였다. 다만 그 기품도 얼굴에 드리운 병색을 가려주지 못했다. 여인은 다름 아닌 황후였다.

묵용감을 발견한 황후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매우 반가워했다.

“셋째가 아닙니까,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묵용감이 예를 갖추고 허리를 숙였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식구끼리 이리 예를 갖추다니요.”

황후가 살갑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궁에서 편히 주무셨습니까?”

묵용감이 담담하게 웃었다.

“궁을 떠난 지 오래되어 조금 낯설었습니다.”

웃음을 흘리던 황후가 곧 그가 혼자임을 깨닫고 물었다.

“어찌 초왕비는 보이질 않습니다?”

“왕비는 경전을 써야 해서 불당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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