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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34)화 (233/1,192)

제234화

경전을 쓰는 일은 심신을 다스려야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팔을 들고 오랜 시간 글을 쓰면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평소의 백천범이라면 기운이 넘쳐났겠지만, 이곳에 온 뒤로 계속 배가 고프니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어제저녁부터 배불리 먹지 못했고, 불당에서는 채식만 나왔다. 사실 백천범은 음식을 가리지 않으니 채식이라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옆에서 감시하는 통에 배불리 먹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디 규율이라는 것은 사람을 굶주리게 만드는 일인가? 밥을 새 모이만큼 먹는 여인들이 어찌 이런 훈련을 견뎌 낸단 말인가?

글씨를 쓰면 쓸수록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듯 어지러웠다. 어제 어깨를 너무 많이 맞은 탓에 팔을 들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공 마마가 불상처럼 꼿꼿이 서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와 고개를 곧게 세우지 않으면 곧바로 목판이 날아왔다.

원래는 자시까지 써야 했지만, 서 태비가 처음 경전을 쓰는 백천범을 배려하여 해시에 영 마마를 돌려보냈다.

종일 불당에서 머문 백천범은 기진맥진한 데다 방에 땐 불로 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그녀를 데리고 나온 영 마마가 유엽과 곡아에게 왕비의 목욕 시중을 들라고 분부했다.

묵용감은 저택으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한 뒤, 궁문이 닫히기 전에 입궁했다. 그가 궁에서 묵는다는 소식을 들은 서 태비는 걱정이 앞섰다. 태비가 출궁하여 아들의 저택에서 묵을 순 있어도, 독립한 친왕이 궁에 돌아와 묵는 법은 없었다.

황제가 동의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서 태비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서둘러 황유도에게 방을 정리하라고 분부했다.

묵용감은 정중히 사양하며 그저 우측 편전에서 묵으면 된다고 답했다.

서 태비는 선선히 승낙했다. 그녀는 묵용감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그를 불렀다. 이번 탄일은 아들 내외가 함께하니 조금 더 성대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녀가 묵용감의 의견을 구했다.

젊은 시절의 서 태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자신의 친아들조차 챙기지 않았지만, 나이가 드니 모든 일에 아들의 뜻을 물었다. 이렇다 보니 묵용감의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잡다한 이야기에는 어쩐지 가족애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하니 이상하고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세세한 부분까지 조율했다. 상은 몇 개를 놓아야 하는지,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손님들의 답례는 무엇으로 할지, 극단을 부르는 게 좋을지, 폭죽은 언제 터뜨려야 할지 등 정해야 할 것에 끝이 없었다.

그간 서 태비와 했던 말보다 오늘 밤 나눈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이 모자의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듯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가 길어진 탓에 서 태비는 지쳐 보였다. 묵용감은 서둘러 인사를 고하고 우측 편전으로 돌아왔다.

불을 때는 대신 방 안에 커다란 화로가 있어 그리 춥지 않았다. 마침 궁녀가 화로에 은탄銀炭을 더 넣고 있었다. 은탄은 황제가 사용하는 고급 숯으로, 연기가 나지 않고 은은한 향까지 풍겼다. 매우 귀한 만큼 후궁에서도 섣불리 쓰지 못했지만, 서 태비는 부족함 없이 쓸 수 있었다.

어릴 때 장합전에서 지낸 황제는 태비와 사이가 돈독했다. 선황후와 황제의 생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태후의 자리가 비어, 후궁에서 서 태비의 지위는 제법 높은 편이었다.

숯이 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침대 주변을 겹겹이 둘러싼 장막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묵용감은 혹여 백천범이 깰까 목소리를 낮췄다.

“잠들었느냐?”

궁녀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야. 소인이 세안 시중을 들겠습니다.”

묵용감은 궁녀의 안내를 받아 세안을 하고 발을 닦았다. 탁자 위에 놓인 설화고雪花膏를 발견한 그가 슬그머니 집어 들어 얼굴과 목에 꼼꼼히 펴 발랐다. 그 광경에 한쪽에 서 있던 어린 궁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의 사람이 진왕이라면 이상할 게 없었지만, 초왕이 피부에 신경을 쓴다고 하니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묵용감은 담담한 표정으로 궁녀를 힐끔 보았고, 그의 시선을 느낀 궁녀는 곧장 방을 나갔다. 무관인 그는 비바람을 맞고 전국 곳곳을 누비는 게 일이다 보니 자연히 얼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부인은 피부가 너무 여렸다. 함께 있다가 살갗을 맞댈 수도 있는데, 그의 피부가 너무 거칠면 그녀가 꺼리지 않겠는가.

계화꽃 향을 피우고 은탄까지 놓으니 방 안이 기묘한 향으로 가득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계속 맡다 보니 적응이 되는 것도 같았다. 묵용감은 모든 하인을 물린 뒤, 조심스레 장막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몸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날이 추울 때마다 백천범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청했다. 몸을 웅크리고 이불 속에 파묻힌 모습이 꼭 새끼 타조 같았다.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머리카락은 나풀대는 수초 같기도, 커다란 나무를 타고 자라는 덩굴 같기도 했다.

그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가까이하자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자그마한 몸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가 깰까 싶어 머리에만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지난 이틀 밤은 혼이 나간 것 같더니 드디어 안정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없으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품에 안은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 * *

백천범이 목욕을 마치자 궁녀들은 그녀를 곁채로 안내했다.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자는 거야?”

“예.”

곡아가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밤마다 춥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는 불을 때니 이불을 걷어차도 그리 춥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 나야 좋지.”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곁채를 둘러보았다.

“편전은 예쁘긴 한데 밤이 되면 너무 추워. 여기는 조금 작아도 따뜻하구나. 태비 마마께서 바꾸라고 하신 거야?”

“예. 왕비 마마께서 잠자리를 불편해하신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특별히 옮겨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유엽이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왕비 마마, 어찌 아직도 침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도 이미 주무시는걸요.”

그가 여기에 있다니,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백천범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왕야께서 주무신다고? 여기에서?”

“예. 모르고 계셨습니까?”

유엽이 웃으며 답했다. 다소 조금 부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오늘 밤은 여영 아가씨께서 시침을 드셨습니다.”

그 순간, 백천범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다 못해 텅 비어 버렸다. 묵용감이 첩을 몇 명 들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왜 풍여영이란 말인가?

그녀는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문 발이 다시 열리며 서 태비가 들어왔다. 서 태비의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왕비, 어찌 아직도 잠을 청하지 않은 겐가?”

퍼뜩 정신을 차린 백천범이 서 태비를 바라보았다.

“태비 마마께서도 아직 침소에 들지 않으셨잖아요.”

당돌한 대답에 서 태비는 흠칫 놀랐지만, 자애로운 미소는 잃지 않았다. 그녀가 백천범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왕비가 밤에 잠을 설친다 하여 직접 와본 것이네. 이 방은 춥지 않겠지?”

“따뜻합니다. 태비마마께서 세심히 살펴 주시는 덕분입니다.”

서 태비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왕비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백천범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한 게, 어쩐지 조금… 괴로웠다.

서 태비가 그녀를 의자에 앉히며 다독였다.

“무슨 일이 있거든 애가에게 말해 보게나. 애가를 친어미라 생각하고 말일세. 무슨 일이 있거든 애가가 도와주겠네.”

백천범이 머뭇거리다 입술을 뗐다.

“왕야께서…….”

서 태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왕비는 이틀간 경전을 써야 하니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네. 왕야는 그간 몸가짐을 깨끗이 해 왔지만, 혼사를 치렀는데 어찌 그 마음을 달랠 수 있겠는가.

왕비가 왕야를 모실 수 없으니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네. 애가가 보기에 왕야가 여영을 마음에 들어하네. 오늘 합방을 한 뒤, 며칠 뒤에 서왕비로 맞으라고 할 생각이지. 저택에서도 여영과 함께 있을 테니 왕비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백천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태비가 풍여영을 궁에 들인 이유가 이것 때문일 줄이야.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벗을 데려온 줄 알았다. 그녀는 얼이 빠져 가만히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밀려와 혼란스러웠다.

예전엔 그녀도 묵용감이 첩을 들이길 바랐지만, 두 왕비가 저택에 들어오고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처첩을 많이 들이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서 태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는 애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겐가? 자고로 아내란 현명한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대를 잇는 일이네. 왕비가 저택에 온 지도 제법 시일이 흘렀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질 않은가.

얼마 전 왕비 한 명이 저택을 떠났으니, 한 명을 더 들인다고 해도 많은 것은 아니라네. 안 그런가, 왕비?”

백천범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왕야만 좋으시다면 소첩은 괜찮습니다. 여영 동생이 저택에 오면 소첩도 잘 돌보겠습니다.”

“우리 왕비의 생각이 참으로 깊구나.”

서 태비가 그녀의 손을 두드리며 흡족해했다.

“늦었으니 침소에 들게. 일찍 일어나서 경전을 써야 하질 않나.”

서 태비가 곁채를 나오자마자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서둘러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복도에 다다르니 영 마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고했다.

“태비 마마, 큰일 났습니다. 왕야께서…….”

영 마마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서 태비가 나섰다. 그녀는 체통을 신경 쓸 새도 없이 편전으로 뛰어갔다.

방에 들어서니 묵용감이 검을 들고 풍여영을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황유도가 있는 힘을 다해 묵용감을 끌어안고 있었으며, 몇몇 소태감들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눈치만 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풍여영은 녹초가 되어 훌쩍이고 있었다. 편전 안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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