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묵용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대체 뭐 하는 여인이기에 겁도 없이 친왕을 부리려 든단 말인가? 어제는 백천범 앞에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덜어 줬을 뿐이었다. 오늘은 백천범도 없으니 좋은 사람으로 보일 필요가 없었다. 초왕인 그가 한낱 여인에게 부림을 당한다면 얼마나 체면이 깎이겠는가?
그는 공기와 젓가락을 매섭게 내려놓고 호통을 쳤다.
“당장 일어나거라!”
담이 큰 편인 풍여영도 그의 호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의식적으로 서 태비를 바라보았다.
“어딜 보는 것이냐?”
의자에 기대앉은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내가 누구더냐?”
갈피를 잡지 못하던 풍여영이 얼른 대답했다.
“초왕야이십니다.”
“너는 누구고?”
풍여영은 겁에 질렸지만 꾸물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는 풍여영입니다. 형부 시랑 풍…….”
“일개 시랑 가문의 딸이 친왕을 부려먹을 수 있더냐?”
풍여영이 저절로 목을 움츠리고 웅얼거렸다.
“아닙니다.”
“하면 방금 한 짓은 무엇이냐?”
“저는…….”
그때, 풍여영이 슬그머니 서 태비를 바라보았다.
서 태비가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어린아이지 않니?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묵용감이 굳은 표정으로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왕비가 여영 아가씨를 여동생으로 삼고 얼마나 아껴 주는지 모른다.”
역시나 백천범을 언급하니 묵용감도 이쯤에서 그만두려는 눈치였다. 그가 손을 들어 밖을 가리켰다.
“밖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며 서 있거라. 앞으로는 잘 생각하고 입을 열도록. 이런 일이 또 일어나거든 본왕은 네가 왕비의 여동생이든 누구든 처벌하겠다!”
“예, 왕야.”
풍여영은 고개를 숙이고 꾸물대며 밖으로 향했다. 두어 걸음 내디딘 그녀가 쭈뼛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왕야,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합니까?”
그녀가 가련한 눈빛을 보냈지만 묵용감의 동정은 조금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그 행동이 묵용감의 가슴에 피어난 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천하에 외모가 닮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타고난 점은 그도 어쩔 수 없다지만, 행동마저 똑같은 것은 몹시도 거슬렸다.
그의 왕비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찌푸리고, 웃고, 화를 내고, 가련한 표정을 짓는 모습 모두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풍여영이란 아이가 하는 행동은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할 뿐이었다.
목용감은 온 힘을 다해 화를 억눌러, 가까스로 풍여영에게 발을 날리지 않았다. 그래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비가 경전을 다 쓸 때까지 서 있거라.”
그의 시선이 빠르게 서 태비를 훑었다. 분명 꿍꿍이가 있는 듯했지만, 괜히 이 자리에서 힘을 빼지 않는 게 좋을 것이었다.
풍여영은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심장이 벌렁거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묵용감의 차가운 목소리를 떠올리면 심장이 옥죄어 들었다. 서 태비조차 방도가 없어 보여, 풍여영은 울상을 지은 채 밖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화를 내니 서 태비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아들이었다. 예전의 감정들이 북받쳐 올라온 그녀는, 어렵사리 관계를 회복한 만큼 더 큰 소동을 부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괜히 나섰다가 잃는 게 늘어날지도 몰랐다.
그녀는 결국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잘 짜인 연극을 시작했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으니 불편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입맛까지 사라진 그녀는 적당히 요기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묵용감의 눈썹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부디, 그의 추측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상대가 생모라 할지라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장합전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단번에 어린 왕비를 걱정했다. 하지만 불당에서 경전을 쓰고 있으니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중단했다가는 그녀가 불효를 저질렀다며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도 장합전에서 묵기로 결심했다.
독립한 황자가 다시 궁에 들어와 사는 것은 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황제에게 큰 위협이자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묵용감도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형제였으니 황제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줄 터였다.
그는 황제를 찾아가 은혜를 베풀어 달라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황궁은 암암리에 사람을 죽이는 곳이다. 그가 그의 왕비를 잘 보살필 수밖에.
* * *
황제는 남서방에서 대학사와 공무를 논의하고 있었다. 초왕이 뵙기를 청한다는 말에 황제는 곧장 들어오라 분부했다.
문턱을 넘는 순간 대학사를 발견한 묵용감은 조금 난처해졌다. 정식 장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학사는 덕성과 명망이 높은 사람이다. 황제조차 그를 중시할 정도니 그 또한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대학사가 먼저 묵용감에게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초왕야.”
묵용감도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대학사.”
황제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장인과 사위인데도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보이지 않은가!
“앉거라.”
황제가 가볍게 손짓했다.
“무슨 일로 날 보자 한 것이냐?”
묵용감은 일단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폐하를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대학사는 고리타분한 성격에 고지식했다. 그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알면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댈 게 분명했다.
뼛속까지 무관인 그는 문관들이 원칙을 내세워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 게 가장 듣기 싫었다. 그 꼬장꼬장한 목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머리에 쥐가 나는 듯했다.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황제가 웃으며 말을 돌렸다.
“대학사는 한동안 딸을 만나지 못했으니 보고 싶지 않은가?”
묵용감이 예의를 차렸다면 곧장 그의 말을 받아 측왕비는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말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학사는 체면이 땅에 떨어진 기분이었만, 그렇다고 황제의 면전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가 먼저 묵용감에게 물었다.
“원상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묵용감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처소 밖으로 나오는 걸 보지 못해 본왕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사는 인생에서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면을 깎는 묵용감의 말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대학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하, 신이 다른 용무가 있어 이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황제도 조금 화가 났지만 별 수 없이 미소로 답했다.
“경이 용무가 있다 하니 그리하라. 여봐라, 대학사를 배웅하거라!”
태감 고승해는 곧장 명을 받잡고 대학사를 밖으로 모셨다.
대학사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황제가 굳은 얼굴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이냐? 측왕비와 이혼하지 않기로 했으면 잘 지내면 되지 않느냐. 짐은 네 후원 일 때문에 웃는 낯으로 대학사를 구슬리는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느냐? 한데 너는? 도리어 일을 망치려 들다니!”
이 이야기로 발이 묶이길 원치 않았던 묵용감이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이 아우, 폐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 청하러 왔습니다.”
놀란 황제가 서둘러 그를 일으키려 했다.
“무슨 짓이냐? 할 말이 있으면 일어나서 하거라.”
묵용감은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아우, 장합전에서 이틀간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황제의 손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멀어졌다. 그의 안색이 눈에 띌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결국, 황후의 간청 끝에 황제가 양보했다. 그는 황후를 끔찍이 아꼈기에 남들 앞에서 그녀의 체면을 깎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청하는 일이라면 대부분 들어주곤 했다.
다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독립한 왕이 갑자기 궁에 들어오겠다니, 금기를 위반하는 일이 아닌가.
황제의 심기를 눈치챈 황후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따뜻하게 물었다.
“폐하, 무엇이 걱정되십니까? 셋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십니까? 초왕비가 홀로 궁에 있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러는 것입니다. 한창 사이가 좋을 때에 떨어져 지내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셋째처럼 진중한 사람이 벽복전에서 그런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그 일로 모든 이들이 초왕야가 초왕비를 끔찍이 아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도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황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황보주아의 일로 충격이 컸으니, 짐도 줄곧 그 애가 걱정이었소. 지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니, 짐도 진심으로 기쁘오. 하지만 그리 얌전하던 아이가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벌써 수도 없이 많지 않소.
친위병 수백 명을 끌고 백 승상의 집에서 위세를 부리질 않나, 황숙에게 손찌검을 하질 않나, 순행 길에는 짐을 두고 먼저 돌아오기까지 했소. 이게 어딜 봐서 친왕다운 모습이란 말이오? 이제는 더더욱 터무니없는 청을 하고 있소. 궁에서 묵겠다니! 황제가 그리 우습단 말이오?”
황후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폐하께 불경한 마음은 조금도 품지 않을 아이입니다. 늘 최선을 다해 폐하를 보좌하던 셋째가 아닙니까. 폐하께서도 이 점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신첩, 셋째의 됨됨이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체 어느 황조에서 독립한 친왕이 다시 궁에 들어와 산단 말이오? 금기를 위반하는 일임을 그 애도 모르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폐하께 청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폐하께서 헤아려 주시리라 믿고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다른 뜻이 없다는 걸 더 잘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그때 셋째가 반란군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폐하께서는…….”
“그만하면 됐소!”
별안간 황제에게서 낮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그만하시오. 짐도 생각이 있소.”
황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와 황제는 어린 나이에 혼인한 순간부터 줄곧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입궁 후, 황제가 무수한 후궁을 들여도 황제와 그녀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호통에는 그녀도 어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서둘러 놀란 그녀를 품에 안고 자상하게 다독였다.
“미안하오, 많이 놀랐소? 그래도 너무 탓하진 말아 주시구려. 일이 끊이질 않아 잠시 인내심이 부족했소. 수민이 찾아온 김에 측왕비의 일을 꺼냈는데, 셋째가 도무지 체면을 살려주지 않으니 그만…….”
황후가 황제의 품에 살짝 기대었다.
“신첩이 어찌 폐하를 탓하겠습니까? 정사를 돌보시느라 바쁘신 폐하께서 이리 사소한 일까지 마음을 쓰시니 심기가 불편하실 수밖에요. 모두 신첩의 잘못입니다. 이런 일은 응당 신첩이 폐하의 걱정을 함께해야 하는데……. 상황을 봐서 신첩이 셋째에게 잘 말해 보겠습니다.”
“황후는 몸이 좋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황제가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 애의 일이니 내버려 두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