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풍여영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언니는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니까 글을 잘 쓰시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심을 담아 경전을 쓰는 건 어때요? 태비 마마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면서 말이에요.”
백천범의 눈빛이 잠시 환하게 빛났지만 이내 다시 어둡게 물들었다. 그녀가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사실 글씨를 잘 못 써요. 어디 내놓을 수도 없는 수준인걸요.”
“그런 게 중요한가요? 글씨가 어떻든 언니가 직접 쓴 거잖아요. 진심만 담겨 있으면 태비 마마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제야 백천범은 묵용감이 붓글씨를 알려 줄 때 그만둔 게 후회스러워졌다. 그때 꾹 참고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난처하진 않았을 텐데.
풍여영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생각이 별로라면 다른 걸 생각해 볼게요.”
백천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경전을 옮겨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을 담는 거예요. 글씨 모양은 그다음이지요. 인시에 일어나서 향을 피우고 목욕까지 마친 다음에 붓을 들어야 해요. 제때 밥을 먹을 수 없으니 식사 시간도 전부 바꿔야 하고요.
자시가 될 때까지 밖에 나갈 수도, 말을 할 수도 없고 오직 경전만 써야 해요. 간단해 보여도 직접 하면 괴로운 일이지요. 할 수 있으시겠어요?”
백천범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건 일도 아니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말을 못 해도 견딜 수 있었고, 심지어 밥을 늦게 먹더라도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
* * *
저녁 식사 때가 되니 공 마마가 나타났다. 궁에서 가장 이름난 정기마마였던 만큼 그녀에게서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엄숙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뒤에 서 있으니 백천범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밥 먹는 속도를 늦췄지만 공 마마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다. 공 마마가 손에 쥔 목판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왕비 마마, 드시는 속도가 빠르십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오래 씹고 천천히 삼켜야 상전다운 존귀함이 묻어나는 법입니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씹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 씹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무렵에야 음식을 삼킬 수 있었다. 천천히 씹으며 시간을 끌다 보니 영 배가 차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음식에 젓가락을 세 번 넘게 대면 여지없이 목판이 날아왔다.
밥도 가득 담을 수 없었다. 아주 자그마한 옥 공기에 새 모이만큼 담아야 했다. 그녀에게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적은 양이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서 태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제야 왕비다운 모습이 보이네. 왕야가 너무 감싸고돌면 도리어 왕비를 망치는 법이지. 살이 찌면 남들이 예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만 구경하게 될 뿐이네. 그리 되면 불편하기만 하지.”
백천범이 표정을 굳혔다.
“태비 마마, 저는 아직 자라는 중입니다.”
“열다섯에 머리까지 올렸는데 거기서 얼마나 더 크겠나. 왕야가 왕비를 챙겨 주고 싶어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비웃음거리라네. 왕비가 아니라 왕야를 비웃는 게지. 왕야가 웃음거리가 되는 건 왕비도 원치 않겠지?”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자 백천범도 할 말이 없었다. 백천범에게도 묵용감의 체면은 밥보다 더 중요했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왕이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군신이 그녀 때문에 체면이 깎일 수는 없었다.
공 마마가 그녀 뒤로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삼 할 정도만 배를 채우시면 됩니다.”
그녀가 곁에 있던 궁녀에게 눈짓을 보내자 궁녀가 서둘러 그릇을 정리했다.
백천범은 그만 울고 싶었다. 삼 할은 무슨, 아직 일 할도 차지 않았는데!
잠들기 전, 백천범은 화로를 두 개 더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 마마가 침대 주변을 한번 살폈다.
“두 개로도 충분합니다. 열을 많이 쬐면 피부가 상하기 쉽습니다. 공주 마마들도 화로를 두 개만 놓으시지요. 왕비께서는 종실 황족이십니다. 사소한 행동도 늘 억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뒤에서 흉을 봅니다.”
금지옥엽인 공주들마저 화로를 두 개만 놓는다는데, 백천범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공주들도 참는 일을 그녀라고 못 참을까?
결국 그녀는 밤새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동이 튼 뒤에도 뼈가 시려 잠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백천범에게는 바쁜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이 트면 태비를 모시고 불당에서 불경을 읽어야 했다.
아침 식사는 승려들이 먹는 죽으로 대신했는데, 죽이라기보다는 멀건 국에 나물 몇 잎이 들어간 게 전부였다.
백천범은 먹을 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녀가 그릇을 들고 입에 대려는데, 공 마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왕비 마마, 음식을 드실 땐 천천히 드십시오. 목에 걸리십니다.”
이런 멀건 국이 어찌 목에 걸린단 말인가?
따지고 싶었지만 공 마마 앞에서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죽을 떠 먹었다.
반 정도 들이켰을 때 궁녀들이 그릇을 가져갔다. 황실에서는 그릇을 다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황제가 밥을 먹을 때도 몇몇 음식은 원래 형태 그대로 물리는데, 이를 만여滿餘라고 불렀다. 남긴 음식이 많을수록 풍요롭고 막강한 국력을 뜻했다.
멀어져 가는 그릇을 바라보는 백천범의 시선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공 마마가 목판으로 탁자 끝을 내리치며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왕비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니십니다. 게걸스러운 모습을 보이셔서는 안 됩니다.”
백천범은 억울했다. 게걸스러운 게 아니라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이다.
하지만 규율은 규율. 공 마마는 그에 맞게 가르칠 뿐,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수양이 부족하다고 여긴 백천범은 다른 사람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서 태비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영 아가씨에게 들으니 왕비가 애가의 생일 선물로 경전을 쓰겠다고 했다던데.”
“예. 소첩, 경전을 옮겨 적으며 태비 마마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려고 합니다.”
서 태비가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왕비의 마음이 참 깊네. 지금까지 애가의 생일을 축하하며 경전을 써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네. 왕비가 그리해 준다면야 애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걸세.”
서 태비가 기뻐한다면 백천범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경전을 쓰는 방은 불당 안에 있었다. 규율대로라면 부처님에 대한 공경을 담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써야 했다. 서 태비는 아직 어린 백천범을 위해 바닥에 방석 두 개를 깔아 주었다.
방석에 앉는 순간, 그녀 일생의 첫 경전 쓰기가 시작되었다. 유엽이 먹 시중을 들고, 공 마마가 옆에 서서 규율을 가르쳤다.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각기 규율이 있었다.
앉아서 글을 쓸 땐 등을 곧게 세우고 정면을 바라봐야 했다. 붓을 쥘 때도 정확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다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백천범이 처음부터 공 마마의 마음에 들긴 어려웠다.
결국 공 마마가 목판을 내리쳤는데, 계속 글을 써야 하니 팔이 아닌 다리를 맞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서 다리를 내리치는 맑은 목판 소리만 간간이 울려 퍼졌다.
백천범은 이쯤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이보다 심하게 맞지 않았던가. 규율을 배우며 이런 과정이 없으면 재목이 되기 힘든 법이었다. 공 마마는 다 그녀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매를 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백천범은 그렇게 여겼다.
그녀는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한 획 한 획 글씨를 써 내려갔다. 긴장이 풀려 고개가 내려가면 어김없이 목판이 그녀의 다리를 내리쳤다. 저 목판에 눈이 달린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맞은 곳만 정확히 짚어 내리치는 통에 그녀는 아프다 못해 점점 다리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 * *
조회를 마친 묵용감은 서둘러 장합전으로 가서 백천범을 만나고 싶었지만, 황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오가 되었고 황제는 함께 점심을 들자고 권했다. 그러나 묵용감은 태비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장합전으로 향했다.
마침 장합전에서는 상을 차리고 있었다. 묵용감이 들어서자 서 태비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마침 잘 왔다. 어서 앉으려무나. 네가 올 것 같아 특별히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했단다.”
묵용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비는 어디에 있습니까?”
“왕비는 참으로 착한 아이더구나.”
그러나 서 태비는 좀처럼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애가의 생일 선물로 경전을 써 주겠다며 불당에서 경전을 쓰고 있단다.”
묵용감이 자리를 뜨려 하자 서 태비가 그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왕야가 거긴 가서 무엇 하려고?”
“왕비를 좀 봐야겠습니다.”
“걱정 말거라. 왕비는 잘 있단다.”
서 태비가 그의 손을 다독였다.
“경전을 쓰는 규율은 잘 알지 않니. 방해를 받아선 안 되는 일이다. 마음을 다해 써야만 효과가 있지. 부디 왕비의 진심이 헛되지 않게 해 주렴.”
경전을 쓰는 규율은 묵용감도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방에 갇힌 채 한 번에 써야 하니 방해를 해서는 안 되었다. 지난번에 백천범이 붓글씨를 쓰기 싫다고 성질을 부렸을 때, 묵용감은 내심 그녀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글씨가 너무나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자발적으로 나섰다면, 그녀도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 터. 고되겠지만 이틀이면 될 일이니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초왕은 결국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우선 식사를 마치고 그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백천범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별안간 공기를 든 손이 쑥 나오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왕야, 옥수수 좀 덜어 주세요.”
낭랑한 목소리와 그릇을 내미는 손짓이 백천범과 똑 닮아 있었기에 묵용감은 아무 생각 없이 공기에 옥수수를 덜어 주었다.
그때, 공기를 들고 있던 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갸름한 얼굴의 그녀는 눈꼬리가 휠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던 묵용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를 향해 웃는 사람은 백천범이 아닌 풍여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