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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31)화 (230/1,192)

제231화

백천범은 누구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묵용감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거듭 다짐을 보이자 그녀는 다시 두루미를 보러 가자며 살짝 웃었다.

묵용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정말 금수만도 못한 짓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이었어도 그가 응당 참아야 했다. 이렇게 자그마한 체구로 어찌 그를 감당하겠는가.

그는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천천히 자라서 활짝 피어날 때까지 기다린 뒤, 그녀라는 꽃을 품에 안고 싶었다. 그때가 오면 그녀도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 터였다.

그때, 백천범을 발견한 풍여영이 곧장 뛰어와 캐묻기 시작했다.

“언니, 왕야와 안에서 무얼 하셨습니까?”

백천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풍여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어리다고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저도 다 압니다. 그걸 하셨잖아요.”

“그거라니요?”

“부부끼리 하는 일 말이에요!”

백천범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영 동생은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가 그런 걸 어찌 알아요?”

풍여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시집가기 전부터 알았지요. 오빠들이 많으니 모르기도 어려웠어요.”

풍여영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맞아요. 저희 오라버니도 정원에서 저한테 들켰습니다.”

백천범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뭐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껴안고 싸우는 거잖아요. 힘들기만 하지.”

“맞습니다.”

풍여영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사내들은 좋아하지만 정작 여인들은 좋아하는 이가 몇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울부짖는 걸 보면 아주 고통스러운 게 틀림없어요!”

풍여영이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이 가장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백천범이 그녀를 힐끔 보고 되물었다.

“제가 어찌 알겠어요?”

“언니는 시집을 가셨잖아요. 어찌 모를 수 있습니까?”

할 말이 없어진 백천범이 얼버무렸다.

“…저기 좀 보세요. 백두루미가 날아가려고 해요.”

백천범은 풍여영의 손을 빼내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정식으로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기 껄끄러웠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와의 일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날이 추운 탓에 지난번보다는 두루미의 수가 적었다. 하지만 몇 마리밖에 보이지 않아도 그 자태만큼은 여전히 우아했다. 가느다란 목, 뾰족한 부리, 진홍색 머리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유롭게 발을 내딛는 모습은 참으로 도도해 보였다.

백천범이 새 모이를 가져와 공중에 한 움큼 뿌렸다. 그러자 몇 마리가 날아와 기다란 목을 쭉 뻗고 모이를 쪼아 대기 시작했다.

풍여영은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묵용감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햇빛을 두른 그는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용모에서는 비범한 기개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천하를 제압할 듯한 기세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별안간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풍여영은 서둘러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왕비에게 다가갔다.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백천범의 허리를 가볍게 감쌌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식사 시간이 다 된 듯하오.”

백천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은 그는 따사로운 봄날만큼이나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풍여영은 자신도 모르게 새 모이를 한 주먹 쥐어 바닥에 뿌렸다. 두루미가 하나둘씩 날아들며 일으킨 바람이 유난히 시렸다.

* * *

점심은 뒤쪽 전각에 차려졌다. 계화꽃 향을 피워 놓으니 방 안의 공기가 달콤하게 물들었다.

서 태비는 상석에 앉아 있었다. 백천범이 묵용감 곁에 앉자 그녀가 눈짓했다.

“왕비는 애가 옆에 앉게.”

규율대로라면 초왕이 상석의 왼편, 초왕비가 오른편에 앉아야 했다.

백천범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묵용감이 그녀를 붙잡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태비 마마, 한 식구끼리 규율을 따질 필요 있겠습니까? 편하게 하시지요.”

서 태비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지만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지 못했다. 기녀도 아니고 어찌 한시도 사내와 떨어지지 못한단 말인가?

다만 초왕이 규율을 따지지 말자 했으니 그녀도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그녀는 풍여영을 불러 초왕비가 앉아야 하는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되니 백천범이 풍여영보다 낮은 지위의 첩처럼 보였다.

묵용감에겐 자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벽복전에서 저지른 일로 후회가 가득했다. 그 때문에 태도가 자연히 조심스러워졌고, 그는 백천범만을 바라보며 정성을 쏟았다.

그 모습을 서 태비는 차마 눈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지금 눈앞의 저 애가 정녕 만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군신이란 말인가? 어찌 어린 계집애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가? 사내로서 갖춰야 할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천범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음식에 머무르면 묵용감이 곧장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점점 그녀의 접시에 음식이 산처럼 쌓여 갔다.

서 태비는 속으로 돼지를 기를 때에도 저리 먹이지는 않을 거라며 백천범을 헐뜯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잔뜩 비틀려 있었다.

백천범은 음식이 마음에 들면 눈을 가늘게 뜨고 묵용감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함께 미소를 보였다.

반대쪽에 있던 풍여영도 먹는 속도가 백천범에게 뒤지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태감이 음식을 집어 주면 그녀가 빠르게 먹어 치웠다. 그녀는 경쟁이라도 하듯 백천범보다 빨리 접시를 비워 버렸다.

서 태비가 풍여영에게 음식을 덜어 주며 자애롭게 웃었다.

“천천히 드시게. 빨리 먹으면 소화가 안 될 테니.”

풍여영이 눈을 깜빡이며 태연히 말했다.

“태비마마, 저는 한창 크는 중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에 백천범 역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요. 우리 둘 다 많이 먹어야 키가 쑥쑥 클 거예요.”

그녀가 빈 공기를 묵용감에게 건넸다.

“왕야, 개구리찜 좀 떠 주시어요.”

묵용감이 선뜻 개구리찜 한 국자를 떠 주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풍여영도 그에게 공기를 내밀었다.

“왕야, 저도 떠 주세요.”

“…….”

묵용감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이 나갔단 말인가? 제까짓 게 뭐라고, 감히 친왕에게 음식을 덜어 달라는 건가!

그때 서 태비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왕야가 덜어 주려무나. 아직 한창 먹을 때지.”

“그냥 여영 동생 주세요.”

백천범도 그의 팔을 툭툭 치며 거들었다.

“동생이 저보다 작잖아요. 많이 먹어야 해요.”

그녀에게 성을 낼 수 없던 묵용감은 마지못해 풍여영에게도 음식을 덜어 주었다. 풍여영은 기분이 좋았는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왕야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무섭다고 하던 것과는 전혀 달라요.”

지아비가 칭찬을 들으니 백천범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 말은 누가 퍼뜨리는지 모르겠어요. 왕야께서는 소문과 달리 멋있고 다정하신걸요! 막 시집을 왔을 땐 그런 것도 모르고 담벼락을 넘을 뻔…….”

묵용감이 재빨리 그녀의 입에 음식을 넣어 말을 끊었다.

“음식을 먹을 땐 사레가 들릴 수 있으니 말을 아끼시오.”

서 태비는 속으로 탄식했다. 언젠가 아들을 살뜰히 챙겨 주는 여인이 생길 줄 알았건만, 설마 이렇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부인이 지아비를 챙기기는커녕 그녀의 아들이 아랫것처럼 왕비를 떠받들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딸을 키운다 해도 이리 공을 들이진 않을 터였다.

어느새 묵용감이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떠나기 아쉬워진 그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서 태비의 탄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올린 묵용감이 말을 돌렸다.

“이틀 뒤면 태비 마마의 탄일이지 않습니까.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 아들이 정성껏 준비해 효를 다하겠습니다.”

서 태비의 마음이 절로 뭉클해졌다. 매년 치른 탄일이었지만 묵용감과 함께한 날은 손에 꼽았다. 대부분 선물을 보내기만 할 뿐, 얼굴을 보여 주는 일이 없어 모자가 아니라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런 아들이 이제 눈앞에서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그녀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애가가 궁에서 부족할 게 뭐가 있겠니? 그저 함께 모여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구나.”

서 태비의 말에 묵용감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나는 자식은 없었다.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인 만큼 응당 효를 다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날 일찍 찾아와 태비마마께 축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서 태비는 큰 위안을 얻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단 하나, 눈에 거슬리는 백천범만 제외하고. 이렇게 착한 아들에게 어울리는 좋은 아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서 태비는 그저 아들 부부만 잘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확실히 몸이 노쇠하였는지 조금만 오래 앉아 있어도 쉽게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영 씨의 팔을 붙잡고 침소로 돌아가 잠시 낮잠을 청했다.

더는 머무르기 어려워진 묵용감은 태비에게 예를 갖추고 밖으로 향했다. 그를 배웅하러 나온 백천범은 우측 편전을 지나치다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가리켰다.

“왕야, 여기가 제가 묵는 곳이에요. 예쁘죠?”

묵용감은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를 보니 서 태비가 왕비를 잘 챙겨 주는 듯했다.

하지만 서 태비는 초왕비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다. 다만 그의 체면을 생각해 백천범을 곁에 두고 정을 들이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한 식구이니 앞으로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야 하지 않은가.

* * *

곧 시어머니의 탄일이 다가오는데 며느리가 선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수 실력은 어디 내보일 수준도 되지 않았고, 당장 자수를 놓기엔 시간도 부족했다. 백천범이 고민에 빠져 있는데 풍여영이 다가와 물었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이틀 뒤면 태비 마마의 탄일인데, 선물을 아직 준비하지 못 했어요.”

옆자리에 앉은 풍여영이 백천범처럼 턱을 괴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물은 직접 만든 걸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성의가 담겨 있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수를 잘 놓지 못하니 비웃음을 살 것 같아요.”

“음, 수를 놓기에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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