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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30)화 (229/1,192)

제230화

“어떻게 기억이 안 나겠어요. 그날 왕야께서 이씨 부인을 혼내 주셨잖아요.”

백천범이 목을 길게 빼고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더니 곧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저것 좀 보세요, 백두루미예요!”

그녀가 말한 곳을 바라보던 풍여영도 기뻐하며 소리쳤다.

“보입니다, 보여요! 정말 백두루미예요!”

그녀의 호들갑이 거슬렸던 묵용감이 눈을 부릅떴다.

“이곳은 궁이오. 큰소리로 떠들지 말고 가까이 가서 보시오.”

풍여영이 백천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니는 안 가실 거예요?”

“당연히 가야죠.”

백천범은 풍여영과 함께 앞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하지만 묵용감이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뭐가 그리 급하오. 나와 있다가 함께 가면 되지 않소.”

그가 풍여영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혼자 가시오. 성가시게 왕비에게 조르지 말고.”

풍여영이 마지못해 앞으로 향했다. 묵용감의 태도에 백천범이 괜히 더 무안해지고 말았다.

“왕야, 여영 동생에게 왜 그리 무섭게 대하시는 거예요. 겁을 먹었잖아요.”

그는 존귀하고 위엄 있는 초왕이니 누구든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애당초 모든 이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 초왕비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묻고 싶은 말이 계속 입안을 맴돌았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괜스레 민망하고 진땀이 난 그의 손이 어느새 축축해지고 말았다. 백천범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더우세요?”

덥다 뿐일까, 마음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를 흘깃 살펴보다가 혀끝에 물린 말을 툭 내뱉었다.

“…내가 보고 싶었소?”

막상 말을 꺼내자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실망할지도 모르니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해 두었다.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까만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제법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한마디. 그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그가 벅찬 마음에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그렇소. 보고 싶어 잠도 이루지 못했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이었다. 눈까지 지그시 감은 그는 스스로 뱉은 말에 심취하여 궁 안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주변은 그저 고요했지만, 무수히 많은 눈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심은 결국 타인의 마음을 흔드는가.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서방님.”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의 몸과 마음이 하나의 북처럼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 번만 더 불러 주시오.”

“서방님, 서방님, 서방님.”

그녀는 세 번이나 서방님이라 불러 주었다. 얼이 빠진 것처럼 기뻐하는 그를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제가 왕야를 부르는 게 그렇게 기쁘세요?”

한껏 의기양양해진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자신이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음을 깨달았다. 왠지 초왕으로서 쌓아 올린 체면이 깎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가 황급히 정색했다.

“기억하고 있었군. 앞으로도 절대 잊지 마시오.”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걷어냈어도, 뛸 듯이 기뻤던 마음은 차마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이끌고 벽복전으로 향했다. 전각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접이식 문에 그녀의 몸을 밀착시킨 뒤 입맞춤을 퍼부었다.

백천범은 당황하며 몸을 빼려 했다.

“왕야, 이러지 마시어요. 누가 보겠어요.”

“보면 보라지.”

그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는 이 순간을 애달프게 그리워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그녀의 입술보다 더 황홀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또다시 숨을 참을까 봐 그는 숨을 쉴 틈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눈, 코끝, 뺨, 이마, 턱 어느 곳도 놓치지 않고 입술을 찍었다. 그에게는 그녀의 모든 부분이 간절했다…….

그녀의 얼굴은 삼월에 핀 복사꽃처럼 불그스름해져 티 없이 맑은 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입술을 깨물 수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더없이 황홀한 저 과실을 덥석 베어 물고 싶었다.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거듭 묵용감을 불렀다.

“왕야, 왕야…….”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서로의 입술 사이에서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서방님이라 부르시오.”

그는 마치 깊은 못에 빠져 물살에 휩쓸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물살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점점 그 기분을 주체하기 힘들어질 즈음, 그의 눈앞에 새하얀 빛이 반짝였다. 그녀가 빛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새하얀 목을 드러낸 그녀는 아름다운 백조 같았다…….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가엽고 자그마한 입술이 달싹였지만 그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닿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얼굴에 닿았다. 뜨거운 촉감이 그의 심장을 자극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그가 시선을 떨구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침상에 올라가 있었다. 웃옷과 겹치마는 한쪽에 나뒹굴었고, 중의에 달려 있던 매듭도 죄다 풀려 분홍빛 살이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새하얀 목은 온통 붉은 자국으로 물든 것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기쁨이나 분노 따위의 감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서둘러 그녀의 옷을 단정하게 입혀 주고 차마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그가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오. 내가 그만, 결례를 범했소.”

그녀는 옷을 가다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제발 화내지 마시오.”

백천범은 고개를 떨군 채 답했다.

“화난 게 아니에요. 왕야는 제 지아비잖아요.”

“아니오. 그대를 기다린다고 했으면서, 방금은… 화내지 마시오. 내가 미안하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묵용감이 서둘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백천범의 볼을 타고 반짝이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 앞에서, 그는 속이 죄다 타들어 가는 듯했다.

“천범, 내가 잘못했소. 제발…….”

그가 애원하자 백천범이 품에 와락 안기더니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왕야, 왕야께서 방금, 방금 그렇게 하시니까, 정말 무서웠단 말이에요……!”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에 연신 입을 맞추며 달랬다.

“미안하오. 왕비를 놀라게 했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내 약조하지.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겠소!”

초왕이 벽하전에서 어린 왕비를 조용히 위로하는 사이, 그들이 벌인 일은 이미 궁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소식을 접한 서 태비가 치솟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찻잔을 힘껏 내던졌다.

“겁도 없이! 대낮에 음탕한 짓을 꾸미다니, 황제조차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초왕야가 했단 말이냐. 여우 같은 계집. 감히 내 아들을 홀렸구나! 이대로라면 큰 사달이 날 것이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한바탕 욕을 퍼붓자 막막한 슬픔이 밀려왔다. 결국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말았다.

유모 영 씨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태비 마마, 좋게 생각하십시오. 왕야께서는 한창 혈기 왕성할 때가 아니십니까? 어렵사리 여인을 두셨으니 끓어오르는 감정을 책망할 수는 없지요. 왕비께서 체통을 지키지 않으시는 바람에…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진노하실 텐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그런 계집은 초왕비가 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끌어내려야 해. 영아, 여영에게 좀 더 애를 쓰라고 전해 다오. 왕야는 한창 혈기 왕성할 때니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 이번 일만 성사된다면 그 애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줄 것이다.”

영 씨가 주저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소인이 살펴보니 왕야께서 다른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왕비께 마음을 내비치셨습니다. 단기간에 일이 성사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서 태비는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방법을 생각해야지. 이런 며느리는 필요 없다.”

* * *

소식은 서복궁에도 전해졌다. 백 귀비는 새하얀 여우 모피를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내를 홀리는 재주가 그리 좋을 줄이야, 전혀 몰랐구나.”

궁녀 난지가 웃으며 거들었다.

“마마, 이 소문이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초왕야께서 꾸지람을 들으시겠지요.”

백 귀비가 코웃음을 쳤다.

“염라대왕처럼 엄숙한 줄만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네. 초왕야의 취향이 이리 소박하다니, 정말 다시 봤어.”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초왕야가 그리 푹 빠져 있다면 잘된 일이다. 다정한 사내일수록 연정에 심하게 상처받고 오해하는 법이지. 본궁이 찍 소리도 낼 수 없게 만들 것이다, 하하!”

난지가 활짝 웃는 백 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 그 말씀은…….”

백 귀비가 그녀를 냉랭하게 훑었다.

“궁금한 것도 많구나.”

난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백 귀비는 백 승상처럼 생각과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말하지 않아도 생각해 둔 게 있을 터였다.

* * *

승덕전承德殿에서 소식을 들은 황제와 황후는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묵용감은 황제 내외 앞에서 누구보다 엄숙한 사내였다. 지금껏 여인을 바라보지도 않던 그가 대낮에 음탕한 짓을 벌였다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소태감은 상황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세세하게 고했다. 감히 누가 말을 지어내 초왕을 헐뜯고, 황제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은 사실이 틀림없었다.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아랫것들을 물렸다. 황후와 단 둘이 남자 황제가 화를 내기는커녕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 연정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다 거짓이었소. 내 보기에는 진왕과 다를 바 없구려. 감히 궁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어딘가 기특해하는 황제와 달리, 황후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셋째는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였습니다. 친왕이 궁에서 소란을 피우다니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부부가 그리 정이 넘친다면 단둘이 있을 곳을 찾았어야지요. 보는 눈이 많은 황궁에서 어찌 그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황가의 명예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황후, 노여움을 푸시오.”

황제가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

“내가 몇 마디 하면 될 일이오.”

황후는 바닥만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기침을 터트렸다. 황제가 다급히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렸다.

“갑자기 왜 이런단 말이오?”

황후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심한 기침으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자 황제가 서둘러 하인을 불렀다.

“당장 태의를 들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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