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그는 어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늘 머물던 저택이지만 한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 어딘가 불편하고 낯설었다. 정무에 몰두할 땐 그나마 견딜 수 있었으나, 짬이 나는 순간마다 그는 혼이 나간 듯했다.
저녁이 되자 증세는 더 심각해졌다. 그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둥대며 저택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백천범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월각 대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그는 화가 났고, 초조했고, 지독하게 허전했다. 하필 그런 상태에서 수원상까지 마주쳤다. 길목에 서 있다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던 수원상은 평소처럼 단아했지만, 눈동자에 희미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수치스럽게 만든 동시에 화를 일으켰다.
수원상은 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단순한 혼인이 아닌 사직의 안정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대학사를 구슬리기 위해 초왕을 압박하는 방법을 골랐다. 며칠 전에는 그를 남서방으로 불러 수원상을 자극하지 말라며 대학사의 편을 들지 않았던가.
이 천하는 묵용가家의 것이었다. 그만큼 황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문제가 쌓여 있었다. 그 짐을 나눠 드는 일은 그의 책임이기에 차마 근간을 뒤흔들 수는 없었다. 그는 수원상의 문제는 잠시 보류하고, 후에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는 한밤중에 서재에서 글씨를 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니 글씨가 잘 써질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종이를 구겨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종이 뭉치가 바닥을 가득 메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결국 그는 붓까지 내던지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뜬 그는 평소보다 기력이 저조했다. 억지로 아침을 들고 조정에 갔지만 사방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대신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누군가 그의 몸에 솜 뭉치를 가득 집어넣은 것만 같았다.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가까스로 조회를 마치고 장합전에 들어서니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그의 안에서 답답함이 사라지고 온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인들이 인사를 올렸지만 그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백천범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백천범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달려왔다.
“왕야.”
팔을 벌려 맞이한 묵용감은 내친김에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게 주고 싶다는 게 무엇이오?”
백천범이 손을 펼쳐 보였다. 힘주어 쥐고 있던 탓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울퉁불퉁해진 떡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참, 왜 이렇게 되었지?”
그의 기분이 상할까 싶어 그녀는 얼른 손을 거두려 했다.
“드시지 마시어요. 다음에 제가 다시…….”
백천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용감이 고개를 숙여 떡을 입에 넣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남은 부스러기까지 깨끗하게 핥아 먹었다.
백천범이 소리 내어 맑게 웃었다. 그녀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손을 빼내려 했지만, 묵용감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손을 집어삼키려는 시늉까지 했다.
두 사람이 희희낙락거리는 동안,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서 태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들까지 저리 변할 줄이야.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아랫것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말았다.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묵용감이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기쁜 마음에 백천범을 데리고 서 태비에게 인사를 하러 가려는데, 웬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머리를 양쪽으로 말아 올린 여인은 백천범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초왕을 올려다보다 감탄을 내뱉었다.
“이분이 초왕야시군요. 정말 늠름하십니다!”
묵용감이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무엄하다! 당장 저 애의 뺨을 치거라!”
감히 그의 면전에서 외모를 논하다니,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녀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었다. 백천범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그러지 마세요. 풍여영이라는 동생입니다.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책망하지 마시어요.”
묵용감은 왠지 그녀가 낯이 익었다. 그가 화를 가라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어디에서 온 아이란 말이오?”
참다못한 서 태비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부른 아이다. 왕비가 혼자 답답할 테니, 동무가 되면 좋을 것 같아 불렀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세심하게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들, 왕비를 데려가려고 찾아왔습니다.”
서 태비는 그저 옅게 웃으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왕비도 그러고 싶은가?”
백천범은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효를 다하기 위해 며칠간 서 태비를 모시겠다고 했는데 하루 만에 돌아갈 순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위해 동무를 데려올 만큼 신경도 써 줬는데 어찌 돌아가겠는가. 무엇보다 규율도 다 배우지 못했으니 더더욱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묵용감의 팔을 가볍게 흔들며 다정하게 말했다.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며칠만 더 있고 싶어요.”
그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더 있겠다니, 어찌 그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단 말인가? 그녀가 곁에 없으니 그는 지독히 공허했다.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바람이 드나들어도 이렇게까지 시리고 허전하진 않을 터였다.
“왕비의 효심이 참으로 지극하구나. 왕비가 애가와 좀 더 지내고 싶어 하니 왕야도 허락해 주려무나.”
서 태비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처소가 이리 떠들썩한 건 참으로 오랜만이란다. 두 아이가 애가의 종달새보다 더 재잘대는데 볼수록 즐겁구나.”
효도가 백행의 근본이라는 옛말 앞에서 묵용감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왕비가 걱정된다면 조회를 마치고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좋겠구나. 식구는 응당 자주 모여야지. 감이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묵용감이 시선을 내리깔고 정중하게 답했다.
“태비 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마음이 들뜬 서 태비가 서둘러 하인들에게 분부했다.
“왕야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묵용감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자 기분이 좋아진 백천범이 활짝 웃었다.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묵용감은 누구보다 기뻤다. 그녀의 웃음이 그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아이도 그녀처럼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감의 기분이 단숨에 언짢아졌다. 누구이기에 백천범과 그리 친한 듯이 있단 말인가?
그때 서 태비가 풍여영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형부 풍 시랑 가문의 아가씨 여영이란다. 올해 열다섯으로 왕비와 동년이지. 두 사람을 자세히 보려무나. 꽤 닮지 않았느냐?”
묵용감이 보기에 풍여영이란 아이는 백천범과 하나도 닮아 보이지 않았다. 어찌 그녀와 비교한단 말인가? 서 태비의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천범이 한술 더 떠 풍여영과 자신을 가리켰다.
“왕야, 저희 두 사람 꼭 자매 같지 않아요?”
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시 왕비와 함께 산책을 다녀오겠습니다.”
백천범이 기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왕야, 백두루미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좋소, 백두루미를 보러 갑시다.”
묵용감은 선뜻 승낙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을 보든 다 좋았다.
다만 백천범이 풍여영을 부를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여영 동생, 어서 가요. 이번에야말로 백두루미를 보여 줄게요.”
풍여영이 기뻐하며 한달음에 뛰어와 백천범의 팔을 잡았다. 묵용감이 백천범의 손을 잡은 상태로 풍여영이 백천범에게 팔짱을 끼니 기묘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뒤로 가시오.”
묵용감이 풍여영에게 눈을 부릅뜨며 꾸짖었다.
“어찌 이리 버릇이 없소!”
풍여영은 두려움에 떨며 백천범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언니…….”
마음이 약해진 백천범이 묵용감의 손을 놓았다.
“왕야께서 앞쪽으로 가시어요. 저희가 뒤에서 따라갈게요.”
“…….”
묵용감은 잠시 굳어 있었다. 어제 처음 만난 아이가 그보다 더 중요한가?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묵용감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묵용감과 함께라면 궁 안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태감과 궁인들이 그에게 다가와 예를 갖췄고, 신분이 낮은 하인들은 그를 피해 돌아갔다. 백천범은 풍여영의 손을 잡은 채 끊임없이 재잘대며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듣던 묵용감은 풍여영의 말투가 백천범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안간 뚱딴지같은 말을 늘어놓거나 조금은 바보스럽게 웃는 것까지 백천범과 비슷했다.
그가 먼 곳을 응시하며 냉소를 흘렸다. 황실의 삶은 늘 이런 식이었다. 혈육 간의 정은 뒷전이고, 각자의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했다. 아직은 서 태비의 속내를 알 길이 없지만, 그녀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풍여영을 왕비 곁에 둔 게 틀림없었다. 혹여 서 태비가 백천범을 노리는 게 아닐까. 그는 오직 그것이 걱정이었다.
역경 속에서 자란 그녀는 다소 어리바리해도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그녀는 닭 한 마리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을 정도로 인정이 넘쳤다. 풍여영을 데려온 건 아마도…….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과 그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함이 넘실거리다 그의 가슴속을 뚫고 들어왔다.
그는 풍여영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백천범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다가왔다. 풍여영도 그녀의 뒤를 따랐지만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하자 뒤로 물러섰다. 풍여영은 걸음을 늦추며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묵용감이 백천범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다른 곳은 다 말랐어도 손만큼은 통통한 그녀였다. 그 손을 잡고 있으면 묵용감은 금세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 내키는 대로 그녀의 손을 조몰락거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서둘러 앞을 가리켰다.
“저곳이 벽하전이오. 춘계 연회 때 함께 왔던 곳 말이오. 기억나오?”